등록 : 2015.02.05 22:24수정 : 2015.02.06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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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서봉총 신라 금관 |
신라 금관의 대표적 걸작들 가운데 하나인 경주 서봉총 출토 금관이 26년 출토 당시 모습과 다르게 잘못 수리된 사실이 확인됐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일제강점기인 1926년 스웨덴의 구스타프 황태자(훗날 구스타프 6세)가 발굴에 참여한 것으로 유명한 경주 노서동의 신라고분 서봉총의 조사보고서( <경주 서봉총Ⅰ(유물편)>)를 88년만에 발간했다. 일제강점기 자료조사보고사업의 열세번째 성과물로 나온 이 보고서에서 박물관 쪽은 현재까지 전시되어온 금관이 발굴 당시 원형을 잃고 잘못 복원된 것으로 드러났다고 밝혀 눈길을 끌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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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서봉총 신라 금관 |
서봉총 출토유물 중 가장 유명한 금관은 가운데에 세 마리 봉황 장식이 붙어 있다. 이런 특징 때문에 다른 신라 금관과 확연히 구별된다. 박물관쪽은 보고서 작성을 위해 금관을 정밀 재조사하는 과정에서 이 봉황 장식에 얽힌 중요한 형태상의 오류를 발견했다고 보고서에 언급하고 있다. 발굴 뒤 조선총독부가 출토금관을 복원 조립하는 과정에서 금관 본체의 대륜(금관에서 머리가 닿는 아래 둥근 테두리에 해당하는 부분)에 달려있던 곡옥 장식 4개를 떼내고 이 장식을 고정했던 이음구멍에다 금관 봉황장식을 받치는 십자형 금판을 잇는 금실을 무리하게 고정시켰다는 것이다. 설명이 복잡한 것 같지만, 실제 사진을 보면 간단명료한 오류다. 봉황 장식이 위에 달린 십자형 금판은 원래 박았던 대륜의 금속못 자리 대신 그 옆 곡옥자리의 구멍에 금실 등으로 무리하게 고정돼 전체 모양이 틀어지고 원래 원형과 상당히 달라지게 됐다는 분석이다. 특히 금관 정면 오른쪽 부분에 붙은 십자형 금판의 한갈래는 안쪽에 붙은 다른 세갈래와 달리 바깥쪽에 금실로 이어붙여 한눈에 봐도 어색한 느낌이다. 박진일 학예연구사는 “발굴 뒤 보관하는 과정에서 어떤 연유인지 금관 일부가 훼손되는 곡절이 있었고, 그 뒤 조립 수리하는 과정에서 이런 왜곡이 생겼을 것으로 보인다”고 추정했다. 일제강점기 잘못된 수리 이후 80년 넘도록 교정이 진행되지 않아 현재 모양이 원형으로 굳어질 가능성이 있는 만큼, 조속히 재복원 작업에 착수해야할 것이라고 박물관 쪽은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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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륜고정부 |
노서리 129호분이라고도 불리는 경주 서봉총은 현재 경주 대릉원 옆에 터만 남아있는데, 발굴과 보관에 얽힌 흥미로운 후일담들이 많다. 조사는 1926년 조선총독부박물관의 연구원 고이즈미 아키오(小泉顯夫)에 의해 이루어졌으나 순수 학술조사는 아니었다. 원래 경동 철도노선(오늘날 동해남부선)의 경주역사를 짓기위해 필요한 토사를 확보하려고 땅을 파다가 발견된 유적이기 때문이었다. 당시 조선총독부의 조사 현장에는 일본과 조선을 방문중이던 구스타프 황태자가 참여해 국제적인 관심을 모았다. 고고학에 관심 많은 황태자가 조선을 들러 여행하다 경주 지하에서 대단한 고대유물들이 발견됐다는 소식을 듣고 그가 참여를 간청해 황태자의 발굴이 이뤄지게 된 것이다. 구스타프 황태자가 유물들 뒤엉킨 발굴현장 한 가운데에서 금관 등 금제유물을 살펴보고 직접 발굴작업을 벌이는 장면들을 찍은 여러장의 사진들이 현재까지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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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촬영 평양기생 차릉파 |
의문이 하나 남는다. 발굴 뒤 금관의 왜곡된 조립 복원을 촉발시킨 파손 사건의 실체는 무엇이었을까. 단서들이 있다. 1926년 출토당시 금관 사진과 1934년 총독부가 찍은 금관사진에는 국립중앙박물관이 지적한 봉황장식 금판의 무리한 조립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현재 서봉총 금관은 1939년 조선총독부박물관 본관품으로 등록되어 있는데, 당시 이미 금관 대륜의 곡옥 4개가 금관 본체와 떨어진 채 별도 등록됐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그러니까 금관은 1934년과 39년 사이 어떤 사건이 일어나 일부 장식이 떨어져나가는 등의 파손이 일어난 것으로 볼 수 있다. 흥미롭게도 이런 추정에 부합하는 유명한 사건이 하나 전해진다. 26년 발굴을 총괄한 조선총독부 연구원 고이즈미 아키오는 1934년 평양부립박물관장으로 부임한다. 그 이듬해인 1935년 서봉총 금관을 평양에 가져가 평양 기생 차릉파의 머리에 씌우고 기념사진을 찍는 만행을 저지른다. 그의 파렴치한 행위는 곧 들통나 다음해 1936년 <부산일보> 등에서 신문지상을 통해 보도되면서 세간의 지탄을 받았다. 고이즈미가 당시 별다른 보호조치 없이 금관을 막무가내로 가져가 평양 기생의 머리에 씌운 정황이 당시 신문기사 등에서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따라서 문제가 된 금관의 파손은 이때 일어났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박진일 학예사는 “다른 파손 사건이 일어났을 가능성도 배제 못하지만, 곡옥이 떨어지고 봉황 장식판이 떨어질 정도로 심각한 파손 상황은 고이즈미가 평양 기생에 금관을 씌운 사건 말고는 달리 생각하기 어렵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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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서 표지 |
고이즈미는 서봉총의 유구와 유물에 대한 발굴보고서 간행을 계속 미루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 끝내 조사를 갈무리하지 않은 채 일본으로 돌아가버린다. 이후 서봉총 유물들은 보고서 없이 금관과 일부 금속공예품 정도만 대중에 알려진 채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서 보관돼 왔다.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사들이 출토 유물과 유리 건판 사진 등을 중심으로 발굴 88년만에 유물편 보고서 작업을 마무리한 것은 일제강점기 고이즈미의 책임 방기에 대한 학문적 징벌이기도 한 셈이다.
이번 보고서에는 금관을 비롯한 573건 유물의 도면과 사진이 처음 집대성돼 실렸다. 금관을 비롯한 금제품을 상세히 조사해 정리했고, 모든 금제품은 순도 분석을 벌여 그 결과를 부록에 담고있다. 박물관은 보고서 간행을 기념해 ‘다시 보는 신라 고분, 서봉총’ 테마전을 4~6월 열 예정이다. 내후년 이후 계획중인 서봉총 재발굴 조사를 마치는대로 유구편 보고서도 펴낼 계획이라고 한다. 글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제공 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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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에 작성한 서봉총 유물배치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