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시 건천읍 모량2리 베른하르트 문학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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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볕이 대지에 쏟아지는 4월 초순, 한국문단의 거장 박목월 시인 생가가 있는 경주시 건천읍 모량2리에는 현대 독일어 문화권의 대표적 소설가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문학 향기가 피어 올랐다.
목월의 시처럼 '강나루 밀밭 길을 구름 가듯 가는 나그네'와 같이 찾아간 모량2리 583-17번지에는 팔순을 훌쩍 넘긴 김연순(85·사진) 전 동아대학교 교수가 혼자 토마스 베른하르트 문학관을 지키고 있었다.
전형적인 한국의 시골마을인 모량2리 입구에 자리잡은 문학관은 김연순 교수가 허물어져 가는 폐가를 매입해 노구(老軀)를 이끌고 손수 벽돌을 쌓고 벽지를 바르는 등 단장을 해 작지만 소박하고 아름다운 문학관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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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학관은 작가의 조국인 오스트리아에서 조차도 없을 당시 김연순 교수가 이곳에서 독일에서 공부하던 시절부터 모은 베른하르트에 대한 각종 자료들을 모아놓은 곳이어서 특별한 의미가 있는 곳이다.
김연순 교수는 함경북도 부령에서 일제치하에 태어나 동나남고등학교와 원산여자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교편을 잡다가 공산치하의 박해를 견디다 못해 갖은 고생 끝에 걸어서 38선을 넘어 월남을 했다.
월남을 한 김 교수는 배움에 대한 열정으로 이화여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결혼을 한 후 서른 셋의 나이에 아이 셋을 두고 독일 유학을 감행하는 등 우리 현대사만큼이나 곡절이 많다.
김 교수는 독일로 건너가 뮌헨대학교 독문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부산 동아대학교 독문과 교수와 뮌헨대 객원교수로 제자를 양성하다가 지난 1993년 정년퇴임을 했다.
격동의 근·현대사를 거쳐 온 김 교수는 세 아들의 어머니이자 대학교수로 노년을 맞이하기까지의 인생역정을 고백하고 있는 자전적 에세이 '내겐 돌아갈 고향이 없다'를 국내와 독일에서 출판을 했다.
특히 베른하르트의 작품인 '옛 거장들'(현암사 1997), '한아이'(범우사 1998), '혼란'(범우사 2002)을 번역 출간해 국내 독자들에게 베른하르트 문학을 소개하고 독일문학을 공부하는 후학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독문학용어사전'(탐구당 1992)을 펴내기도 했다.
김 교수가 평생동안 연구하고 가르쳐온 베른하르트는 오스트리아의 작가이다. 소설, 시, 희곡 등 다양한 분야에서 독특한 작품세계를 구축하며 현대 독일어권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손꼽힌다. 사건의 흐름보다는 의식의 흐름을 따르는 소설을 쓰며 스스로를 '전형적인 이야기 파괴자'로 지칭했다.
베른하르트는 뛰어난 문학성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국내에 늦게 알려졌다. 소설 '비트겐슈타인의 조카'와 '옛 거장들'이 1997년 국내에 출간되면서 비로소 주목받기 시작했다. '소멸'은 이 두 작품에 이어진 베른하르트의 마지막 소설으로, 그의 작품 중에서 가장 대표작으로 손꼽힌다.
베른하르트의 문학은 그 자신의 삶 자체이자 전부이다. 제국주의와 두차례의 세계대전이 대륙을 휩쓰는 동안, 유럽을 비롯한 많은 서구 국가의 작가들(소위 지식인으로 분류되거나 자처한)은 대부분 '문학적 망명'을 택했다. 그들은 조국과 맞닥뜨려 모순과 회의를 깨뜨리기보다 제3의 지점에서 관조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하지만 베른하르트는 나치의 침략과 보수적인 분위기가 가득한 조국 오스트리아의 테두리 안에서 끊임없이 기득권층과 갈등하면서도 문학을 통해 진실을 고발하며 기꺼이 맞닥뜨렸다.
베른하르트는 죽음을 통해 자신의 문학을 완성(?)했다. 조국 오스트리아에서 저작권법의 유효기간 동안 자신의 작품을 출판하거나 공연하지 못하도록 하는 유언을 남긴 것이다. 조국을 정직하게 객관적으로 보았다는 이유로 기소당했던 베른하르트는 이제 죽음을 통해 조국이 자신의 저작권을 침범할 수밖에 없는 거장으로, 조국을 고소하는 존재로 관계를 역전시켰다. 주요 작품으로 소설 '혼란 Verstong(1967)', '바텐 Watten(1969)', '비트겐슈타인의 조카 Wittgensteins Neffe(1982)', '옛 거장들 Alte Meister(1985)', 시집 '이 세상과 지옥에서 Auf der Erde und in der Holle(1957)' 등이 있다. 율리우스 캄페 상, 오스트리아 국가 문학상, 프릭스 메디치 상 등 유럽의 저명한 문학상을 대부분 수상했다.
김 교수는 동아대 교수 재직시절인 지난 1986년 우연한 기회에 모량2리로 이사를 오면서 비록 국내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세계적인 작가인 베른하르트 문학관을 세계 최초로 만들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초라한 시골집으로 보이지만 문학관에는 김 교수의 평생의 연구실적과 자료가 살아 숨쉬고 있다.
허물어진 농가 헛간을 개조한 문학관은 비록 서재 정도의 규모이지만 베른하르트 작가 관련 저술 100여권과 박사학위 논문 다수와 신문 스크랩 등의 자료가 정리돼 있다, 작가의 조국인 오스트리아 빈에 있는 작가의 문학관에서조차 보유하지 못한 희귀자료들을 소장하고 있어 문학관의 학술적 가치는 높을 수 밖에 없다.
오스트리아 문학관 관계자들이 이 문학관을 찾아와 1주일간 체류를 하기도 했고 베르하르트 전집과 관련기사 자료 등을 보내주고 있다. 25년째 경주에서 생활을 하고 있는 김 교수의 제자들도 매년 5월 3, 4번째 토요일에 문학관을 찾아와 모임을 갖고 문학에 대한 토의를 한다. 올해는 6월 첫째 토요일로 일정이 잡혀져 있다.
김 교수가 문학관을 만들고 운영하는데 어려운 일을 도맡아해 준 사람은 이 마을이 고향인 김진룡 경주시청 세정과 도세담당이다. 김 교수는 김진룡 담당에 대한 고마움을 늘 잊지 못하고 있다.
팔순하고도 중반인 김 교수는 노환으로 불편한 몸을 이끌고 춥고 쓸쓸한 겨울을 혼자서 보내고 만물이 소생하는 따뜻한 봄을 맞아 문학관 정리정돈에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문학관 자료 정리는 물론 대학재직시 받은 모란꽃 그림과 단아한 병풍, 고향 부령을 생각하며 손수 만든 온돌방, 그리고 텃밭을 가꾸고 있다. 고령이어서 언제 생을 마감할지 모른다고 하지만 베른하르트 문학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때는 젊은 시절 못지않은 학문에 대한 열정이 문학관에 온기를 불어넣으며 김 교수의 훌륭한 버팀목이 되어 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