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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경주박물관 특집진열 “만파식적과 옥피리” 개최

박근닷컴 2011. 7. 21. 22:17

보도자료

2011년 7월 18일 배포

 

 

총 3쪽, 첨부 : 사진 2매

 

담당 : 국립경주박물관 학예연구실 이정은

전화: 054)740-7540 / 팩스: 740-7545 / 이메일 :younjin97@korea.kr

 

특집진열  “만파식적과 옥피리” 개최

 

  국립경주박물관(이영훈)은 7월 19일(화)부터 9월 18일(일)까지 소장 옥피리 두 점을 선보입니다.

  우리관 소장 두 점의 옥피리는 일제강점기를 거쳐 1945년 8월에 국립박물관에 입수된 것으로 조선시대 문인들의 여러 문집에서도 언급되고 있습니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옥피리를 신라 신문왕대의 대나무피리(만파식적)와 같이 적을 물러나게 하고 병을 치유하는 신이한 기물(神物)로 여겼습니다. 이것은 고대의 ‘만파식적’에 대한 기원과 소망을 옥피리가 고스란히 이어받았던 것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만파식적’이 있었는지, 그리고 어떤 모양이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통일신라시대 문화재에 표현된 천인이 연주하고 있는 피리를 참고하여 그 모양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만파식적’은 아니지만 천인이 불고 있는 피리가 천상의 세계를 표현할 때 자주 등장하는 것을 보면, 피리를 비롯한 악기들이 매우 신성시되었으며 그 소리가 바로 하늘과 통하는 음악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번전시는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두 점의 옥피리에 담긴 선인들의 인간적 정서를 느껴볼 수 있는 유익한 기회가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이 보도자료와 관련하여 보다 자세한 내용이나 취재를 원하시면

문화체육관광부 국립경주박물관 학예연구실 이정은(☎ 054-740-7540)에게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붙임

 

옥피리를 소개합니다.

 

  옥피리에는 바람을 불어 넣는 취공吹孔과 떨리는 소리가 나는 청공淸孔이 있고, 손가락으로 구멍을 막아 음률을 만드는 지공指孔이 있습니다.

  1706년 경주부윤 이인징이 아홉 구멍이 뚫려있고 둥글고 곧은 것은 대나무를 본 뜬 것이라고 쓴 것을 보면, 아마도 이 검은색 옥피리를 말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X선으로 촬영한 결과, 검은색 옥피리는 부러진 곳을 은으로 두 군데, 동으로 한 군데 감싼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이 두 점의 옥피리는 지금의 대금과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연두색 옥피리의 경우 칠성공의 수가 많고, 옥피리 두 점 모두 취공은 타원형이 아니라 둥근 원을 그리고 있어서, 대금과는 약간의 차이를 보입니다.  

 

 

만파식적과 옥피리

 

  신라의‘만파식적萬波息笛’은‘온갖 풍파를 잠재우는 피리’입니다.『삼국유사三國遺事』에 따르면, 신라 31대 신문왕神文王(재위 681~692)이 감은사感恩寺에 행차한 뒤 이견대利見臺에 들렀는데 이 때 해룡海龍이 나타나 흑옥대黑玉帶를 바쳤다고 합니다. 이 해룡의 말에 따라 바닷가에 떠 있는 산 위의 대나무를 잘라 피리를 만들어 월성月城의 천존고天尊庫에 소중히 보관하였습니다. 그 뒤 적군이 쳐들어오거나 병이 났을 때, 또는 큰 가뭄이 들거나 홍수 및 태풍이 불었을 때, 이 대나무 피리를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병이 낫는 등 모든 일이 평정되었으니 이 피리를‘만파식적’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조선시대 문인들은 이 옥피리를 신라의 보물, 즉‘만파식적’으로 여겼습니다. 조선 연산군(재위 1494~1506) 때 편찬된『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1499)에는 동해의 용이 신라왕에게 이 옥피리를 바친 것으로 적혀 있습니다. 또한 한문건(韓文健, 1765~1850)은‘고려 태조가 이 옥피리를 갖고 싶어 했으나 조령鳥嶺을 넘자 소리가 나지 않는다’하여 신라에 대한 충절을 나타내는 기물로 여겼습니다.

  이처럼 조선시대 경주 사람들은 옥피리를‘만파식적’과 같은 신물神物로 생각하였습니다. 옥적이 조령을 넘으면 소리가 나지 않는 것은 신라 지역을 벗어나지 않으려는 옥피리의 충절로 여긴 것입니다. 심지어는 옥피리가 바로 만파식적이며 경주를 한발자국도 벗어난 적이 없다고까지 생각하였습니다. 이처럼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도 만파식적에 대한 기대와 소망을 옥피리가 고스란히 이어받았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옛 기록에 보이는 옥피리

 

  조선 전기 이석형(李石亨, 1414~1477)의 계림옥적鷄林玉笛이라는 시에 신라의 옥피리가 등장합니다.  

  1530년 편찬된『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옥피리의 길이가 한 자 아홉 치인데, 그 소리가 맑다. 속설에는 동해 용이 바친 것이라고 한다. 역대 임금들이 보물로 삼아 전하였다.’고 적고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문인들의 글 속에 등장하였던 옥피리는 1582년의 화재로 훼손· 유실된 것으로 보이고, 비슷한 옥적이 이후에 다시 발견됩니다.

  1707년 객사의 무너진 토담 속에서 김승학金承鶴이라는 이가 옥피리를 주워 숨겨 놓았다가 발각되어 관아로 가지고 왔는데, 경주부윤 이인징(李麟徵,1643~1729)은 이 옥피리를 신라의 유물로 추측하였습니다.

  의성김씨 운천 종택에도 옥피리가 전해 내려오는데, 그 보관함의 뚜껑에 1804년 김희주(金熙周, 1760~1830)가 쓴 글이 있습니다. 그 글에는 자신의 옥피리가 신라 경순왕(재위 927~935)이 남긴 두 개의 옥피리 중 하나일 것이라고 하면서, 경주에 전해 내려오는 옥피리와 유사하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전시된 연두색 옥피리와 관련하여『부선생안府先生案』(1843)에는 서울에 사는 접위관接慰官 이인석이 동래에 왔다가 되돌아가는 길에 옥피리 한 개를 경주부慶州府에 전하면서‘동도東都의 옛 유물이니 악부樂府에 간직해 두라’고 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피리 소리로 하늘과 통하다.

 

  신라 사람들은 피리가 곧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도구가 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러한 믿음은 세월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고 여러 문헌에서 언급되고 있습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지봉유설芝峯類說』,『동경잡기東京雜記』 등에는 경주에 전해지는 옥피리를 신라의 보물로 인식하는 기록들이 남아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도 바래지 않았던, ‘만파식적’이 가져올 평화에 대한 기대와 소망을 읽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만파식적’이 있었는지, 그리고 어떤 모양이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통일신라시대에 대나무를 잘라 피리를 만들었다는 사실과, 천인天人이 연주하고 있는 피리를 참고하여 그 모양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만파식적’은 아니지만 천인이 불고 있는 피리 또한 천상의 세계를 표현할 때 자주 등장하는 것을 보면, 피리를 비롯한 악기들이 매우 신성시되었으며 그 소리가 바로 하늘과 통하는 음악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진1. 옥피리, 길이 55.0cm, 47cm, 국립경주박물관

 

 

 

사진 2  옥피리보관함 길이 59.5cm, 국립경주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