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왕릉은 7기뿐... 김유신 묘능 경덕왕릉故 이근직 교수
“현재 명칭이 붙여진 신라 왕릉 가운데 문화재지정명칭, 문헌기록상의 위치, 시대의 변화에 따라 변천되는 무덤양식 등 3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시키는 진짜 왕릉은 제27대 선덕여왕릉, 제29대 태종무열왕릉, 제30대 문무왕릉, 제33대 성덕왕릉, 제38대 원성왕릉, 제41대 헌덕왕릉, 제42대 흥덕왕릉 등 7기뿐이며, 나머지는 모두 주인공을 잃어버렸거나 잘못 알려져 있다.”
“현재의 김유신묘는 제35대 경덕왕릉이며, 무열왕릉 앞 김인문묘가 실제 김유신묘다.”
“오릉(五陵)은 박혁거세 무덤이 아니라 실은 5세기 이후의 적석목곽분이며 제4대 탈해왕릉·제6대 지마왕릉·제8대 아달라왕릉은 통일신라시대 횡혈식석실분이고, 제13대 미추왕릉은 5세기 이후의 적석목곽분, 제17대 나물왕릉은 7세기 무렵 횡혈식석실분이며 이들은 왕릉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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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직 교수는 고분이 산재해 있는 금척리 출신으로 경주학과 신라학에 투신해 왕릉연구에서 독보적인 연구를 펼쳐오다 지난해 6월17일 출근길에 불의의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했다. 이 책은 고인이 영남대 박사학위논문이었던 ‘신라왕릉의 기원과 변천’을 단행본으로 출판하기 위해 지난해 봄까지 수정과 보완을 거듭해 편집까지 완료해 PC에 남겨두었던 것을 미망인 주진옥(신라문화유산연구원 보존관리팀장)씨와 함께 공부했던 동료들이 12지릉 논문을 첨가하고 재차 수정 보완해서 유저로 출간하게 됐다.
신라천년의 수도인 경주는 신라가 992년간 존속하면서 수많은 능묘陵墓유적을 남겼다. 그중에서도 시조 혁거세거서간으로부터 경애왕까지 55명의 왕과 더 많았을 왕비의 장례를 치렀을 경주에서, 화장하여 산골한 몇몇 왕과 왕비를 제외한 대부분의 왕과 왕비, 수많은 왕공귀족들이 무덤을 만들었다. 이러한 신라시대 무덤의 외형과 규모, 내부에서 확인되는 유구와 유물들은 우리역사의 빈 공간을 메워주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신라가 쇠망한 이후 천년이 넘는 장구한 세월이 지나는 동안 능묘는 인위적, 자연적인 훼손도 있었지만 전승 과정에서 대부분의 능묘가 주인공을 잃어버렸거나 잘못 전승돼 주인공이 바뀌어 버린 안타까운 현실에도 불구하고 이를 풀기위한 연구는 몇몇 학자들이 시도했지만 부분적인 검토에 그쳤을 뿐, 구체적이거나 치밀한 연구는 거의 이뤄지지 못했다.
이번 『신라왕릉 연구』는 지금까지 학계가 최대 난제로 꼽으면서도 해결에 엄두를 내지 못한 신라 왕릉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를 표방한 역저로 꼽힌다. 저자는 이 책에서 신라왕릉을 기원부터 발전, 쇠퇴, 종말로 정리했을 뿐만 아니라 그동안 잘못 알려져 오던 왕릉이 어디인지를 꿰맞추는 성과를 낳았다.
이것은 저자가 경주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경주의 산천지리와 이를 두고 일어날 수 있는 공간상의 정황을 꿰뚫고 있었으며 20년간 각종 문헌기록을 뒤지고 현장을 답사하면서 무덤의 입지 조건과 규모, 양식의 변천과정을 살핀 결과이며 나아가 고고학, 미술사 왕릉 조영에 반영된 정치, 사회, 지리, 사상, 예술적인 측면 등 모든 당시 상황을 신라인의 시각으로 재해석한 통찰력이 고스란히 이 책에 담겨있다.
저자는 특히 역대 왕릉에 대한 문헌기록과 실제 무덤의 입지조건과 규모, 양식 변천과정을 함께 고려한 결과 담대한 주장들을 쏟아냈다. 저자에 따르면 오릉을 비롯해 신라 상고기上古期 왕릉이라고 전승된 무덤은 7대 일성왕릉을 제외한 모두가 실제 왕릉과는 무관한 고분으로 보았다.
나아가 중고기 왕릉 중에서도 23대 법흥왕릉, 24대 진흥왕릉, 25대 진지왕릉은 규모와 형식으로 보아 왕릉이 아니라 왕공귀족이 묻힌 묘로 해석했으며 지금의 26대 진평왕릉은 31대 신문왕릉, 지금의 28대 진덕왕릉은 실제 45대 신무왕릉이라고 했다. 또한 저자는 무열왕릉 뒤쪽 서악동 고분군은 중고기 왕릉이며, 이곳 4호분이 법흥왕릉, 3호분은 법흥왕비 보도부인릉, 2호분은 진흥왕릉, 1호분은 진지왕릉으로 비정했다.
중대中代 왕릉 중에서 신문왕릉은 실제 32대 효소왕릉이며, 지금의 효소왕릉은 왕릉이 아닌 성덕왕릉에 딸린 배장묘로, 35대 경덕왕릉은 39대 소성왕릉이라고 한다. 또, 지금의 52대 효공왕릉은 실제는 문무왕비인 자의왕후릉이며, 황복사지 동편 폐릉은 효성왕비 혜명부인릉에 해당한다고 덧붙였다. 더불어 지금의 김유신묘가 경덕왕릉이며 지금의 김인문묘가 김유신묘라는 주장은 이병도의 학설을 계승한 것이다.
하대下代 왕릉으로 지금의 경덕왕릉은 39대 소성왕릉이며, 제44대 민애왕릉은 40대 애장왕릉으로, 능지탑 석물은 제43대 희강왕릉의 것으로, 구정동 방형분은 44대 민애왕릉이며, 제49대 헌강왕릉과 제50대 정강왕릉은 실제로는 제46대 문성왕릉과 제47대 헌안왕릉이라는 것이다. 아울러 45대 신무왕릉, 46대 문성왕릉, 47대 헌안왕릉, 53대 신덕왕릉, 54대 경명왕릉, 55대 경애왕릉은 왕릉이 아닌 왕공귀족의 분묘로 보았다.
이렇게 볼 때, 현재 전하고 있는 신라 왕릉은 거의 대부분 남의 문패를 달고 있는 셈으로 생전에 저자는 이와 관련한 연구를 발표했다가 신라왕성新羅王姓 문중으로부터 거센 항의에 시달리기도 했다. 고인이 창립한 경주학연구원慶州學硏究院(원장 박임관)에서는 앞으로도 고인이 각종 학술지 등에 실었던 많은 논문들을 종류별로 묶어서 순차적으로 유고집을 출간할 계획이다.
저자의 대학원 스승인 최광식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서평에서 “지금까지 이루어진 신라사 및 신라고고학 연구에서 별로 주목받지 못하던 신라 왕릉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서”라면서 “모든 상황을 신라인의 시각으로 재해석하여 왕릉의 주인공들을 새롭게 비정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