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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금관총의 주인은 이사지왕(爾斯智王)??

박근닷컴 2013. 9. 22. 21:48

금관총의 주인은 이사지왕(爾斯智王)?

금관총 충토 칼에서 신라 왕의 이름이.....

 

 

1921년 발굴한 신라시대 적석목곽분인 경주 금관총 출토 환두대도(環頭大刀)에서 확인한

'이사지왕(爾斯智王)

 

 

1921년 경주 금관총에서 출토됐던 환두대도(環頭大刀·고리자루큰칼)에서 신라왕을 의미하는 '이사지왕(爾斯智王)'이라는 명문(銘文)이 확인됐다고 국립중앙박물관이 3일 밝혔다.

신라무덤에서 왕명(王名)이 발견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이날 "'이사지왕'은 신라 금석문(金石文·쇠로 만든 종이나 돌비석) 등에서 보이는 전형적인 신라식 표기"라며 이 같이 밝혔다.
이어 "이 명문은 금관총의 주인이 누군가를 알려주는 중요한 단서로 보인다"고 밝혔다.

1921년 조선총독부가 4~5세기의 고분으로 알려진 경주 금관총을 발굴했을 때 환두대도(環頭大刀·고리자루 큰칼)가 나왔다.

90여년 세월이 흐른 지난해 국립중앙박물관이 조선총독부 박물관 자료 공개 사업 일환으로 이 칼의 보존 처리를 위하여 녹을 제거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1년이 흘렀고, 드디어 녹에 묻혀 있던 글자 4자(字)가 실체를 드러냈다. 그것은 뜻밖에도 '이사지왕( 斯智王)'이란 글자였다.

신라에서 군주의 칭호는 거서간(居西干)→차차웅(次次雄)→이사금(尼斯今)→마립간(麻立干)을 거쳐 서기 503년 지증왕 때 비로소 '왕(王)'이라는 칭호를 쓰기 시작했고('삼국사기' 기록), 이와 함께 고대국가의 기틀이 갖춰졌다는 것이 입반적인 견해이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이전인 4~5세기부터 이미 '왕(이사지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새롭게 열린 것이다. 신라 무덤에서 처음으로 밝혀진 왕명(王名)이자, 신라의 고대국가 확립 연대를 앞당기게 될 수도 있는 단서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금관총 출토 환두대도

 

 

환두대도 하단의 명문
 

이번에 발견된 '이사지왕' 명문은 칼집 금속부에 새겨져있다.

하단 앞뒷면에 '爾斯智王(이사지왕)' '十(십)'이, 칼집 상단에 '爾(이)'가 쓰여있다.

 

박물관은 그러나 "'이사지왕'이란 명문은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 금석문에는 나오지 않기 때문에 현재로는 어떤 왕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며 "금관총의 주인공으로 당시 신라 최고 지배자였던 마립간(麻立干·내물왕~지증왕) 중 한 명으로 추정할 수 있으나 현재 자료로선 한계점이 많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사지왕'이란 명문이 당시 '왕'으로 불렸던 고위귀족 중 한 사람이라는 의견도 있다.

포항 냉수리 신라비(503년 건립)에서 발견된 글자 '차칠왕등(此七王等)'에서 보듯, 신라에서 마립간(왕)이 아닌 고위귀족도 '왕'으로 불렀다는 해석이 많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이번에 발견된 '이사지왕'이 신라시대 6세기 전반까지 마립간(왕)을 비롯해 마립간 아래 갈문왕, 간지(干支)를 가진 고위귀족도 '왕'으로 불렸다는 일부 학계의 연구를 지지하는 근거가 될 수도 있다고 국립중앙박물관은 덧붙였다.

 

 

국립경주박물관이 소장한 금관총 출토 환두대도

 

국립경주박물관이 소장한 금관총출토 환두대도의 앞면의 명문 

환두대도의 뒷면의 명문 


 

이렇게 되면 금관총·천마총 등 지금까지 금관(金冠)이 출토됐던 신라무덤을 마립간(왕)의 무덤으로 규정한 기존 수많은 국내외 연구가 재검토돼야 할 것으로 보인다.

또 '금관은 왕과 고위귀족이 함께 사용했으며 왕만의 상징물은 아니었다'는 일부 학설도 뒷받침해주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국립박물관은 "현재 진행 중인 미공개 자료 조사 사업을 좀 더 체계적으로 하고, 소장품에 대한 보존처리와 관리 방안을 한층 더 강화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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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관총 전경

 

경주시 노서동 금관총(일제시대 그림)

 

경주시 노서동에 있는 신라시대 금관총(金冠塚) 고분은 무덤에서 금관이 출토돼 '금관총'이라는 명칭을 얻었지만, 무덤의 실제 주인이 누구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 무덤에서 나온 칼에서 '이사지왕'이라는 글자가 확인됐다. 그 동안 미스터리에 싸여 있던 금관총의 주인을 밝힐 단서를 찾아낸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은 3일 1921년 금관총에서 출토된 환두대도(環頭大刀·둥근고리갖춤 쇠칼)를 보존처리하는 과정에서 칼의 손잡이 부분에 있는 명문(銘文)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칼의 칼집 하단에 '이사지왕(?斯智王)'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칼집 하단 앞·뒷면에는 '

斯智王(이사지왕)'과 '十(십)'이라는 글자가, 자루와 만나는 지점의 칼집 상단에는   (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박물관 측은 금관총 출토 또다른 환두대도(경주박물관 소장)에서도  (이)' '八(팔)' '十(십)'이라는 글자가 확인됐다고 덧붙였다.

 

 6세기 이전에 조성된 신라시대 적석목곽분(돌무지덧널무덤) 유물에서 왕 이름이 드러난 것은 처음이다.

 



 

 

왕일까 귀족일까

지증왕 4년(503년)에 '왕(王)'이라는 칭호가 도입되기 전까지 신라의 최고 지도자는 왕 대신 '마립간(麻立干)'이라는 칭호를 썼다. 금관총은 금관이 출토됐다는 이유로 그 동안 마립간의 무덤일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되어 왔다.

칼에 새겨진 '이사지왕'이라는 인물이 금관총의 주인일 경우, 마립간인 내물왕~지증왕 중 한 사람의 왕명(王名)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 신라시대 각종 기록을 검토한 결과, 이사지왕이라는 이름을 사용한 마립간은 찾을 수 없었다고 박물관 측은 밝혔다.

따라서 이사지왕은 최고 지도자인 마립간이 아니라 고위 귀족일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실제로 포항 냉수리에 있는 신라비(503년 건립)에 새겨진 '차칠왕등(此七王等·'이 일곱 왕들'이라는 뜻)' 문구 등, 당시에는 최고 지도자뿐 아니라 왕 아래에 있는 고위 귀족들까지 '왕'으로 불렸다는 증거가 존재한다.

신라사(史) 전문가인 주보돈 경북대 사학과 교수는 "이사지왕은 이 무덤의 주인으로 신라의 고위 귀족일 가능성이 높다. 금관총·천마총 등 지금까지 금관이 출토된 신라 무덤을 마립간의 무덤으로 추정한 연구는 재검토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금관총에서 여성용으로 보이는 귀걸이와 팔찌 등이 다수 출토된 것으로 보아 금관총의 주인은 여성이라는 설도 있다. 이 경우 이사지왕은 금관총에 묻힌 여성의 남편이거나 가족일 것이다.

 

 

위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금관총 환두대도

아래는 국립경주앙박물관 소장 금관총 환두대도

 

왜 이제 밝혀졌나

금관총이 처음 공개된 것은 1921년이다. 주택 공사 중 유물이 나왔다는 주민의 신고를 받고, 조선총독부가 관련 유물을 수습했다. 당시 봉분은 3분의 1 이상 무너진 상태였고, 내부도 심하게 훼손돼 유물의 정확한 발굴 위치 등을 파악할 수 없었다. 최초로 금관이 나온 신라 고분으로 세상의 주목을 받았으나 유물 정리와 보고서 작업은 일본인 연구자에 의해 독점됐다.

그로부터 무려 92년이 흐른 올해 국립중앙박물관은 '조선총독부 박물관 자료 공개 사업'의 일환으로 당시 발굴된 금관총 유물에 대한 조사·보존처리를 시작했다. 칼에 새겨진 글자 부분은 짙은 부식층(腐植層)으로 덮여 있어 눈에 띄지 않았다가 여러 차례 약품 처리를 거친 후에야 모습을 드러냈다.

국립중앙박물관 송의정 고고역사부장은 "앞으로 다른 신라 고분 유물도 차례로 조사할 예정이다. 비교 연구를 통해 금관총 주인의 신분도 보다 명확하게 드러날 것"이라고 말했다.


*********************************************************************<이영희 기자>


◆ 마립간(麻立干)=신라시대 왕의 칭호 중 하나. 제17대 내물왕부터 제22대 지증왕 4년에 중국식 왕호를 칭할 때까지 사용됐다. '마립'이란 말뚝을 의미하며, '간'은 몽골의 '칸'과 같이 왕이나 우두머리를 뜻한다. 궁궐 마당에서 왕의 말뚝이 가장 높은 곳에 놓여있었던 데서 '마립간'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6세기 이전 마립간 시대는 서기 356~500년 동안이며 '왕'이라는 칭호는 1989년 발견된 포항 냉수리 신라비에도 등장하지만, 이 비석의 건립 연대는 지증왕이 왕 칭호를 쓰기 시작한 해인 503년이었다.

'이사지왕'이란 인물은 '삼국사기' '삼국유사'와 금석문에 나오지 않는 인명이기 때문에 과연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밝혀내지 못하고, 다만 '마립간' 칭호를 썼던 내물·실성·눌지·자비·소지왕 중 한 명의 별칭으로 추정하고 있다.

'신라에선 고위 귀족도 왕으로 불렸다'는 일각의 학설에 따라 왕이 아니었을 가능성도 제기되지만, 금관(국보 87호) 같은 위세품이 함께 출토된 점으로 볼 때 왕일 가능성이 더 크다.

 

 

▶'이사지왕'이라고 새겨진 칼은 1945년 국립박물관이 총독부 박물관으로부터 돌려받은 유물 4만여점 중 하나다. 당시 유물을 받아 간수한 이가 김재원 초대 국립박물관장이다. 지금 김영나 국립중앙박물관장의 아버지다.

60여년 전 아버지 때 알 수 없었던 금관총의 비밀이 그의 딸이 관장이 돼 풀리기 시작하는 것도 재미있는 인연이다. 박물관 수장고의 녹슨 유물들 속에 또 얼마나 많은 비밀이 숨어 있는지 알 수 없다.

 

출처 : 토함산솔이파리
글쓴이 : 솔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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