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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임진왜란 당시의 이견대 위치에 관한 기록

박근닷컴 2014. 1. 24. 15:02
지난번 답사는 너무나 좋았습니다.
사실 그 날 많은 스케줄이 있었지만
처음가는 모차골 그리고 이근직 선생님과 함께하는 아름다운 답사코스에 끌려 다른일정 훌랑 헤치우고 달려갔더니 마침 천군휴계소에서 저 때문에 한 5분-10분 더 기다려주신 분들께 감사드리고
그날 답사기행을 쓸려면 며칠을 해도 하고싶은 말들이 많지만 제한된 분량의 이번주 경주신문에 연재하는 글에 짧게 적은 글을 회원들에게 공유하고 따뜻한 충고 내지는 좋은 비판 또는 도움의 글을 부탁합니다.
사진을 신문에 올린 한장으로 대신하고 나중에 좀더 나은 자료 있으면 올리겠습니다.

+++++++경주신문 연재글 ********

문화재산책 (임진왜란 당시의 이견대에 관한 기록)

지난 4월 15일 월성을 출발하여 능지탑-사천왕사지-모차골-불령봉표-세수방-용연폭포-기림사-감은사지를 거쳐 어둠이 깔리고 가랑비 내리는 대왕암 앞 바닷가에서 하루일정을 마친 경주학연구원 회원가족 제1차 역사기행 ‘만파식적의 길/ 문무왕 장례길’ 답사에 다녀왔다. 역사에 관한 해박한 지식과 유머가 넘치는 이근직 선생님의 유적설명에 모두들 시간 가는 줄 몰랐고 특히 불령봉표에서 세수방으로 내려오는 코스에 수북히 쌓인 낙엽을 밟으면서 느끼는 상쾌한 기분의 그 오솔길은 오랫동안 여운이 남는 아름다운 추억의 샘이 되었다.

감은사지에서 이 선생님은 감은사, 이견대, 대왕암에 대한 문무왕과 신문왕 그리고 만파식적과 이견대에 얽힌 스토리를 재미있게 잘 설명해주셨는데, 특히 현재 이견대의 위치에 대한 최근의 새로운 의견에 대해 많은 이들이 공감과 관심을 보였다.

일전에도 현재의 이견대 위치가 고고학적 근거가 불확실하고 바로 뒷 산 중턱이나 정상부근에 신라시대나 고려시대 기와조각들이 많이 발견되고 있는 곳이 원래의 이견대와 이견정이이 있었던 곳이라는 추정이 최근에 향토사학자들이나 학계에서 상당한 설득력을 얻고 있다.

조선시대는 육로교통 통신을 위해 전국에 500여 개의 역이 있었고, 역에는 역마를 두어 관청의 공문 전달과 공납물 수송을 담당하게 하였는데, <세종실록지리지>나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현재의 이견대 부근에 이견원(역원: 국립여관)과 이견대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30여 년전 신라오악조사단원으로 참여했던 황수영 박사도 후일 현재 이견대 뒤 산 중턱에 신라기와편이 많이 나오는 곳이 이견대일 가능성이 높다고도 했다.

물론 산 중턱에 기와출토지 부근에 대한 정밀한 고고학적 발굴이 이루어져야 하겠지만 문화재입문생으로 수 차례나 산을 오르내리고 관련자료를 찾아본 결과 필자의 조심스런 사견으로는 최소한 임진왜란 때까진 이견대가 존재하였고 아마 정자도 있었고, 그 위치는 산 중턱 어딘가라는 확신을 가진다.

다 알다시피 임진왜란시 경주 부근의 의병활동이 활발하였고 많은 의병장들이 남긴 난중일기와 문필집들이 아직도 각 문중재실이 잘 보존되어 있다. 그 중에 이견대와 관련된 기록을 남긴 것을 찾아보니, 외동읍 개곡리에서 태어났고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의병장으로 활동한 의병장 이눌(1569년출생-1599년사망)이 남긴 ‘낙의제선생유집’을 읽어보면 이견대는 임란시에 현재의 위치가 아닌 대본초등학교 뒷산 중턱 어딘가에 있었다는 것이 상당한 설들력을 얻게된다.

이 기록에 의하면 1593년(계사년) 음력 4월 11일에 우리의 의병들이 이견대 밑으로 진군했다(癸巳四月十一日 進軍于利見臺)는 내용이 나오는데, 왜군이 이견대 밑에 진을치고 있어서 의병들이 쳐들어 간 전투내용이 아닌가 생각된다. 왜군들은 하서나 대본 바닷가로 자주 쳐들어 온 기록도 있다. ‘이견대밑(利見臺下)으로 진군하다’는 것은 현재의 이견대 자리는 도저히 맞지가 않고 산중턱이나 정상부근이라야 한다.

그리고 의병장 이눌이 이견대에 머물면서 남긴 ‘이견대에서의 두수(利見臺二首)’란 한시를 해석해보면 “창을 베고 누웠으나 밤잠은 아니오고/ 검붉은 피흘러 검포자락 적시네/ 온 나라가 전쟁이라 쉴 날이 없어/ 비바람 치는 산중에 앉아 한해를 보내려니/ 병사들의 보국서사가 참으로 애석쿠나/ 숙질의 위기 임박 또 뉘와 애련해 할고/ 일편병서의 신술을 살펴보며/ 이견대 새벽공기에 또 하늘에 빌었다오/ 오랜 전쟁에 대궐 소식 격조쿠나/ 하늘 밖에 아득하고 마음도 단단하여/ 한곡조 채금가 부르며 날마다 수심이라/ 하늘 끝 저 어느곳엔 오색구름 짙겠네”라는 내용인데, ‘비바람 치는 산중에 앉아(山中坐) 한해를 보내려니’ ‘이견대 새벽공기(利見凊晨)’라는 구절을 잘 음미해보면 왜군을 물리친 의병들이 산 중턱에 있는 이견대에서 머물렀다는 것으로 추정된다.

만약에 지금의 이견대라면 ‘산중(山中)’이 아니라 ‘산아래(山下)’라든가 아니면 ‘바닷가(海邊)’이라는 표현이 옳지 않을까?

임란 의병장 이눌의 유집에 의해 최소한 400여년 전에는 이견대와 이견정자가 산 중턱이나 산정상 부근에 존재했다는 것이 명백하다. 각 문중재실에 보관된 임란의병장들의 유집을 더욱 조사하고, 산 위 기와편 출토지를 중심으로 정밀 고고학발굴이 이우러져 하루빨리 이견대를 본래의 위치로 옮기는 것이 역사바로세우기와 역사바로알기의 작은 진보가 아닌가 싶다.

사진: 이견대와 관련된 기록이 남아있는 의병장 이눌의 유집과 목판본
출처 : 경주학연구원 慶州學硏究院
글쓴이 : 운경인(雲耕人)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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