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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 운문사[2014.02.09] 대웅보전

박근닷컴 2014. 2. 11. 22:20

 

 

 

대웅보전

 

 

대웅보전

 

 

반송과  만세루 사이를 지나 넓은 광장 맞은 편에 1994년에 신축한  대웅보전이 있다.

절집에서는 법당에 석가모니 부처님을 주불로 모시면 대웅보전이라 하고, 법신불인 비로자나불을 주불로 모시면 대적광전, 혹은 비로전이라 한다. 아미타불을 모시면 무량수전, 미륵 부처님을 모시면 미륵전이다.

어느 부처님이 주불이냐에 따라 법당의 이름이 다른 것이다

이 대웅보전 안에는  원칙대로 석가모니 삼존불이 모셔져 있다. 그런데...

 

 

 

운문사에는 이 대웅보전 말고도 대웅보전이 하나 더 있다. 만세루 남쪽 옆의 대웅보전이 그것이다.

1105년(고려 숙종 10년), 원응국사에 의해 건립된 뒤 수차례에 걸쳐 중창된 보물 835호, 운문사 대웅보전(大雄寶殿)인데 최근 2006년 또 한번 보수를 한 건물이다.런데 이 건물에는 석가모니가 아닌 비로자나 삼존불이 모셔져 있다. 그렇다면 이 건물은 비로전이나 대적광전으로 바꾸어야함이 당연하다.

언제부터 이 대웅보전에 비로자나불이 모셔져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이 상태로 존속되어 오면서 대웅보전이 보물로 지정이 되어 문화재청에서 관리를 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1994년 새로운 대웅전이 신축되자 옛 대웅보전의 현판을 비로전으로 바꿔 달았다. 비로자나불을 모신 법당을 마침내 비로전으로 바로 잡은 것이다.

한개의 사찰에 본전이 두 개 일 수 없으며 비로자나불을 모셨기 때문에 비로전으로 현판을 바꾼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옛 대웅보전이 보물로 지정(1985년1월8일지정) 등록된 문화재이기 때문에 사찰(운문사)에서 마음대로 이름을 바꿀 수 없다며문화재청이 제동을 건 것이다. 즉 비로자나불이 모셔져 있지만 비로자나불의 제작 연대가 대웅보전 건물보다 앞선다는 증거가 없으며 대웅보전이라는 이름으로 지정된 것이니 비로전이라고 이름으로 바꿀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새로 붙인 비로전 현판은 떼어지고, 대웅보전이라는 현판이 다시 걸렸다. 따라서 한 개의 절에 대웅보전이 두 개가 되어버린 것이다.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이기 때문에 이렇게 잘못 이름이 붙여진 채로 후손들에게 계속 물려주어야 하는 것이 맞는 일일까?

남의 집에 세들어 사는 듯한 비로자나불은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실까? (블러그 토함산솔이파리 자료인용)

 

[민족문화대백과/문화재청]기록- 신라시대(新羅時代)에 창건된 운문사(雲門寺)는 여러차례의 중창(重創)을 거쳤는데 현재의 가람은 조선(朝鮮) 숙종(肅宗) 44년(1718)에 있었던 네번째 중창 때의 것이다. 대웅보전도 이때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비로전이라는 현판을 걸었을때사진, 뒤로는 새로지은 대웅보전이 보임 (사진출처 토함산솔이파리)

운문사 대웅보전

보물 제835호

대웅보전은 팔작지붕에 앞면과 옆면 각 3칸씩의 규모로, 대웅보전이 신축되기 전까지 대웅보전으로 사용하던 건물이었다. 안에는 비로자나불을 봉안하고 있다. 보물 제 835호로 지정된 대웅보전은 1105년(고려 숙종 10년) 원응국사가 3중창 때 건립한 것이라고도 하나 1718년(조선 숙종 44년) 4번째 중창한 것으로 추정된다. 주불로는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을 봉안하고, 후불탱화는 가운데 청정법신 비로자나불과 좌보처 석가모니불, 우보처 노사나불을 모셨다. 오른쪽에는 신중탱화를 왼쪽에는 삼장(천장보살, 지지보살, 지장보살)탱화를 봉안했다.

 

 

 

 

운문사내 석등대좌 복련문양속엔 나뭇닢문양이다.

 

 

 

 

 

 

 

 

비로전 주련 

 

 

莫謂慈容難得見 자비로운 얼굴 친히 뵙기 어렵다고 말하지 말라.

 

 

 

 

 

 

不離祗園大道場 기원정사 대도량을 여의지 않고 계시니

 

 

 

 

 

 

   虛空境界豈思量 허공의 경계를 어찌 가히 헤아릴 것인가?

 

 

大道淸幽理更長 대도는 맑고 그윽하여 생각할수록 깊은 이치라.

 

  

 

 

 

비로자나불상

 

불상뒤 후불탱화는 가운데 청정법신 비로자나불과 좌보처 석가모니불, 우보처 노사나불을 모셨다. 오른쪽에는 신중탱화를 왼쪽에는 삼장(천장보살, 지지보살, 지장보살)탱화를 봉안했다.

 

 

 

 

 

 

 

 

 

 

 

 

 

 

 

 

후불벽화 달마대사/수월관음보살

 

 

 

 

 

 

 법당 안에 들어가 쉽게 발견할 수 없으나 삼장단쪽 천장을 향해 고개를 들어보면 바로 일명 '악착보살'과 만나게 된다. 이름 그대로 이 生에 기필코 성불하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악착같이 정진하는 모습을 뜻하는 것으로, 악착보살이 외줄에 매달린 것은 오로지 수행자로서의 일념으로 한길만을 걷는 것을 나타낸다고 한다.

악착보살이 매달린 용 모양이 조각된 1m 가량의 길이로 날렵해 보이는 편인 이 조각품을 반야용선이라고 하나 운문사에 기록으로 전해져 오는 것은 없다.  

운문사를 찾는 참배객 대부분이 놓치는 귀한 유물이 있다. 전국에서 몇 곳이 없어 쉽게 볼 수 없는 것이다

반야용선은 중생을 태워 피안의 세계로 인도하는 배다. 스스로 깨달음을 얻어 피안의 세계로 이를 수 있으면 좋겠지만 모든 이들이 그리할 수 없기에 생전에 덕을 쌓고 부처에 의지하면 반야용선을 타고 극락으로 갈 수 있다고 길을 열어놓았다.

반야용선은 대개 법당의 서쪽 대들보 밑에 위치하고 배의 아랫 부분에는 작은 종들이 일렬로 달려 있다. 

 악착보살(또는 악착동자)은 피안의 세계로 가는 반야용선을 놓치지 않기 위해 그야말로 악착같이 매달려 있는 보살로 경전에 나와 있지는 않다. 반야용선에 오르지 못했지만 줄이라도 매달고 가고 싶어 하는 애처로운 중생의 모습이다.

이 보살의 이야기는 구전되어오는 설화에 따르면 ‘어느 옛날 청정하고 신앙심 깊은 이들을 서방의 극락 정토로 인도해 가는 반야용선이 도착 했을 때 이 용선을 타야 할 어떤 보살이 마지막 작별인사로 그만 너무 늦게 도착하여 이미 용선이 떠나가고 있었기에 배에서 던져준  밧줄에 악착같이 매달려서 서방극락정토로 갔다고 한다.’ 하여 악착보살이라 불려진다.

 

 

 

 

 

 

대웅보전 외벽의 정면을 제외한 나머지 면에는 부처님의 일생을 간략히 하여 8가지로 나타낸 팔상도가 그려져 있다.

 

-첫째 도솔래의상(운문사에는 첫번째그림은 없다)- 석가모니가 과거에 쌓은 공덕으로 도솔천왕으로 머물다 부처님이 되기 위해 인간 세상에 태어나기 전의 장면들을 묘사한 그림이다.

 

 

 

-둘째  비람강생상 -카필라국은 히말라야 남쪽 기슭의 초목 지대에 자리한 조그만 왕국으로서 쌀을 주식으로 하는 농업국이었다.

이웃에는 코살라와 마가다와 같은 큰 나라들이 있어 위협을 받고 있었으나 비교적 풍요롭고 평화로운 생활을 누리고 있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정반왕과 마야부인의 아들로 이 세상에 태어나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이다. 

 

 

 

 

 

 

-세째 사문유관상- 태자는 어느날 교외에 있는 동산으로 놀러가기 위해 마부에게 마차의 채비를 시켰다. 곧 보배수레를 타고 동산으로 향해 가는데, 길을 가던 중에 머리는 희고 이는 빠지고 얼굴은 주름지고 허리는 꼬부라져 지팡이를 짚고 힘없는 걸음으로 숨을 헐떡거리는 노인을 보았다.

이 같은 모습을 보고 태자는 갑자기 울적하고 슬퍼져 놀이에 갈 생각이 사라져 버려 궁중으로 돌아와 깊은 사색을 하게 되었다.

“저러한 늙음의 괴로움은 내게도 반드시 있을 것이다”

정반왕은 생각에만 잠겨있는 태자를 지켜보고는 더욱더 궁전안에서의 쾌락을 누리도록 하였으며, 그 아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 애썼다.

 

그 후 태자는 다시 마부에게 명령하여 수레를 장식해서 성밖을 나갔다가 도중에 한 병자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몹시 쇠약한 몸에 배가 부었고, 얼굴에는 검버섯이 피었는데 혼자 더러운 오물더미 위에 누워 있었으나 아무도 돌보는 사람이 없었으며 심한 고통으로 못내 고통스러워 하며 말도 하지 못했다. 풍요롭고 화려한 성(城) 안에서만 자라던 태자가 성 밖으로 나가 생로병사(生老病死)의 실상을 보고 출가를 결심하기까지의 장면을 묘사한 그림이다.

 

 

 

-네째 유성출가상-

성을 넘어 출가하시다.수행자를 만난 후 태자의 인생관은 점차 변모되었고, 마침내 부왕에게 출가하여 수도할 수 있도록 허락해 줄 것을 간청하였다.

 

-다섯째 설산수도상 - 태자가 출가해 설산(雪山)으로 들어가 궁궐로 돌아오라는 청을 거절한 채 설산에서 수행하는 모습을 묘사한 그림이다.

 

 

-여섯째 수하항마상-  석가모니께서 보리수 아래 금강보좌 위에 결가부좌하고 선정(禪定)에 들자 부처님의 성도(成道)에 위협을 느낀 마왕 파순이 여러 가지 비술로 방해하는 모습과 석가모니가 마군들을 항복시키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이다.

 

 

 

-일곱째  초전법륜상(녹원전법상)/여덟째 : 쌍림열반상

녹원전법상(녹야원에서 처음으로 포교하는 장면)진리를 설하시다.

부처님께서는 깨달으신 후 한동안 보리수 아래 머물며 삼매에 들어 있었다. 삼매에 든 부처님은 깨달음의 내용이 매우 심오하고 난해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더라도 이해되지 않을 것이라고 걱정하며 설하기를 주저하셨다. 이 때 최고의 신인 범천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부처님께 귀의하고 중생을 위해 설법해 주실 것을 세 번이나 간청하였다고 한다. 당시 부처님의 심정은 이렇게 전해진다.

 

-여덟째 : 쌍림열반상-  쿠시나가라 니련선하(泥蓮禪河) 사라쌍수(娑羅雙樹) 아래서 80세의 생애를 마치고 열반에 든 모습을 그린 장면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주로 조선 시대 후기의 팔상도가 전하는데 팔상도가 이렇게 정형화 된 것은 <기신론> 또는 <불본행집경>에 있는 이야기에 근거하였기 때문이다.

인도 녹야원(鹿野苑)에 돌에 새긴 팔상도가 남아있고 5세기 무렵 조성된 중국 원깡(雲岡 석굴에 팔상도 그림이 있는데 우리나라 사찰에서 보는 정형화된 팔상도와는 다소 다르지만 그림의 대체적인 구도와 내용은 다 다르지 아니다
그림을 찬찬이 살펴보면 알 수있듯이 여덟장면 중에 전반부의 넉장은 인간의 몸으로 태어난 석가모니가 태자 시절에 인생의 생,노,병,사에 대하여 고뇌하고 번민하는 대목을 보여주고 있고, 후반부의 넉장은 출가하여 고행 선정으로 깨달음을 얻고 전법하고 열반에 들기까지의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