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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양동마을 월성손씨 입향조 손소의 향나무

박근닷컴 2015. 5. 19. 22:42

 

 월성손씨 양동마을 압향조 손소가 1456년 (세조 2)서백당을 짓고 심었다는 향나무

 영남지방 양반가옥을 대표하는 서백당 (중요민속자료 제 23호)

 서백당 정문의 2그루 향나무는 아쉽게도 일본 원산의 가이즈까 향나무 였다.

 

문인화를 그리는 손수용 화백으로부터 양동 마을 입향조 양민공 손소(孫昭 1433~1484)가 심은 향나무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갔었으나 준비를 소홀과 동행했던 사람들과의 시간이 맞지 않아 아쉽게도 우재 손중돈의 살림집이었던 관가정의 구부러진 향나무만 보고 왔다.

따라서 나는 양동마을을 늘 마음속에 담고 다녔다. 그런 어느 날 퇴직한 동료 임업직공무원들의 모임인 ‘임우회’에서 내연산수목원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양동마을을 들린다는 것이었다. 마치 나를 위한 행사인 것 같아 날아 갈 듯이 기뻤다. 전처럼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하여 자료를 모았다. 마을 전체가 중요민속자료 제189호인 양동은 손소가 자리 잡은 후 청백리 손중돈과 동방 5현의 한 분인 이언적이 태어나고 이후 계속해서 양 문중이 수많은 인재를 배출함으로 안동의 하회나, 성주의 한개 마을처럼 영남지방을 대표하는 양반마을로 자리 잡게 된 곳이다.

원래는 타성바지들이 살았으나 손소가 풍덕 유씨 유복화의 사위로 들어와 아들과 외손자를 잘 키워 입신시킴으로 월성 손(孫)·여주 이(李) 문중의 텃밭이 되었다. 손소는 조선 초기의 문신(文臣)이다. 1459년(세조 5)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좌랑, 등 여러 벼슬을 거쳐 사헌부 소속으로, 주로 감찰활동을 담당하는 지평(持平)이라는 직책을 수행할 때에는 아버지와 함께 근무해 다른 사람들의 부러움을 샀다고 한다. 이시애가 반란을 일으키자 종사관으로 출전하여 공을 세워서 적개공신 2등이 되고, 안동부사 등을 거쳐 진주목사를 마지막으로 이곳 양동마을로 낙향했다고 한다.

중요민속자료 제23호인 서백당은 월성 손 씨의 종가이기도 하지만 1456(세조 2) 그가 직접 지은 집이기도 하다. 사당 앞 공터의 높이 9, 둘레가 3미터로, 올 해 551년을 맞는 큰 향나무는 손소가 직접 심은 것이라고 한다.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수세가 왕성한 것처럼 후손도 번창했으나 특히 두드러진 인물은 손소의 아들로 상주목사 재직 시 선정으로 생사당(生祠堂)이 건립된 우재(愚齋) 손중돈(孫仲暾,1463~1529)과 동방 5현의 한분인 회재 이언적(李彦迪,1491~1553)을 들 수 있다.

우재는 김종직으로부터 성리학을 배워 1489(성종 20)년 문과에 급제하여 성·연·중종 3대에 이르기까지 승지를 3번, 대사헌을 4번, 공조, 이조판서 등 주요 요직을 거치면서 공직자로서 책임과 의무를 다했다. 한 때 상주였던 내 고향 의성군 단밀면에 그의 생사당이 지어졌다. 1506년(중종 1)상주일대에 가뭄이 겹치자 전심전력을 다해 백성들을 구휼했다. 임기를 마치고 떠나자 고을 사람들이 이례적(異例的)으로 살아 있는 그를 기리는 사당을 세운 것이다. 나중에 사당의 이름이 속수서원으로 바뀌고 한 때 훼철되었다가 최근 다시 지으면서 배향 인물도 늘어났지만 훌륭한 목민관이었던 우재의 생사당이 고향에 세워진 것은 자랑거리가 아닐 수 없다. 특히 청백리로 뽑힐 만큼 청렴했던 그는

1, 군주는 오로지 배움에 힘써야 백성을 잘 다스릴 수 있다.

2, 군주와 그 신하는 항상 백성을 사랑하고 아껴야 나라가 부강해진다.

3, 왕실과 고관대작은 물론 서민에 이르기까지 허례허식을 버리고 근검절약하는 풍습을 진작시켜야한다.

4, 국가가 사람을 쓸 때 어질고 총명한 사람을 기강이 바로 선다.

5, 국가의 직무를 담당하는 관료들이 풍류나 즐기고 무사안일에 빠지는 폐습은 경계해야 한다며

공직을 수행하는 사람들이 지켜야할 도리를 담은 오조소(五條疏)를 올려 백성들의 큰 관심을 샀다. 최근 정부출연 공기업의 감사들이 하는 일도 별로 없으면서 많은 급료를 받아 지탄 받는 것도 모자라 나랏돈으로 관광성 공무여행을 펼쳐 시민들의 분노가 들끓고 있는 것과 어질고 총명한 사람을 가려 뽑지 아니하고 코드에 맞는 사람만 뽑아 국정에 난맥상이 나타나는 것을 볼 때 우재는 이미 500여 년 전에 공무원이 지켜야할 덕목을 강조했었다.

외손 회재는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는 고사처럼 외할아버지나 외삼촌보다 더 뛰어난 인물로 평가되어 양동을 일러 외손들이 잘 되는 곳으로도 불린다. 그는 10살 되던 해 아버지를 여의는 불행을 맞게 된다. 이를 가엽게 여긴 외삼촌 우재는 그의 생활은 물론 학문까지도 가르치게 된다. 1514년(중종 9) 문과에 합격하여 고향 경주향교의 교관을 시작으로 여러 직책을 거치면서 마침내 사간(司諫)이 된다. 그러나 간신 김안로의 등용을 반대하다가 오히려 그 일당들에게 몰리게 되어 고향 자옥산으로 들어와 학문에 전념한다. 그 얼마 후 김안로가 몰락하면서 다시 관계로 진출해 이조, 예조, 병조판서와 경상도관찰사를 거쳐 좌찬성에 이르렀다. 1547년 (명종 2) 윤원형의 무고로 양재역벽서사건에 연루되어 강계로 유배 그 곳에서 저술활동을 하다가 죽었다. 그는 관료이면서도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후에 퇴계 이황에 의해 그의 학문이 전수되고 옥산서원과 향교에도 제향(祭享)되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나는 다른 것은 다 제쳐두고 서백당을 찾았다. 입구에 당도해 보니 출입문 양 쪽에 가이즈까향나무가 수문장처럼 지키고 있었다. 우리니라를 대표하는 전통 가옥에 일본이 원산지인 나무가 서 있다니 아쉽기 그지없었다. 안으로 들어서 왼쪽은 안채로 들어가는 좁은 길이고 오른 쪽 사당 앞 넓은 공간에 손소가 심은 향나무가 서 있었다. 반가움에 카메라를 들이대고 찍었다. 담장 주변을 아름답게 조성 붓꽃이 만개했으나 역시 외래종이라 건물과 어울리지 않았다. 고건축이나 조경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많이 다녀갔을 것이나 지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양 문중을 통 털어 문과 26, 무과 14명, 사마시 76명 등 무려 116명의 급제자를 배출하였다고 하니 향나무의 정령이 그들을 깨우쳤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한다.

출처 : 나무이야기,꽃이야기
글쓴이 : 이팝나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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