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다가

[화랑문화길]문노랑(호국선)길..4

박근닷컴 2010. 5. 16. 00:08

 

봄기운을 받고 제비꽃이 무리지어 피었다~

 

무장사지 이정표를 따라 오르면  무장사지 아미타불조상사적귀부이수와 삼층석탑을 만난다.

 

이 비석은...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발행한『경상북도의 석탑』에 1921년 3월에 조선총독부에서 세웟다고나옴.

현재 아미타불조상사적비 앞엔 근래에 세운 비석이 있다.

 

보물  제125호 무장사지 아미타불조상사적

 

무장사라는 이름은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이 병기(兵器)와 투구(鬪具)를 감추었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라고 『삼국유사, 三國遺事』에 전한다.
비는 없어지고 비를 받쳤던 거북 모양의 받침돌[龜趺] 위에 얹었던 용모양을 새긴 비머리[ 首]만이 남아 있다. 1915년이 주변에서 "무장사아미타조상사적비( 藏寺阿彌陀造像事蹟碑)"라는 비석의 조각을 발견하여 절 이름이 무장사였던 것을 알게 되었다.
무장사비 귀부의 머리는 용모양인데, 두 마리의 거북이 등에 비를 받치던 자리 둘레에는 12지신상(十二支神像)을 조각한 것이 특이하다. 비머리에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이라는 글자가 두 줄로 새겨져 있다.
비문은 마모가 심하여 내용을 파악하기는 어려우나, 신라 소성왕(昭聖王)의 왕비인 계화부인(桂花夫人)이 소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아미타불상을 만들어 무장사에 모신 내력을 새긴 것이다.


 

무장사 아미타불 조성기비 부기 탁본(鍪藏寺阿彌陀佛造成記碑 附記 拓本)

 

 

 

김정희 부기 씀

 

 

 

김정희는 북한산 순수비 조사에 이어 1817년 4월 29일 경주에서 무장사비 파편 2개를 찾아냈다. 무장사아미타불조성기비는 통일신라 소성왕의 왕비 계화왕후가 왕이 세상을 떠나자 명복을 빌기 위해 아미타불상을 만들고 조성기 비석을 세운 것이다.

 

영․정조대 문신이자 학자인 홍양호(洪良浩 1724~1802)가 사람을 시켜 탁본을 구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그는 이 비문을 김육진(金陸珍)이 왕희지체로 썼다고 판단했다. 김정희도 이 무장사비 탁본을 입수하여 옹방강에게 보냈고 옹방강은 김육진이 쓴 것이 아니라 왕희지의 「난정서(欄亭書)」 등을 집자한 가치 있는 비문이라고 감정했다. 이에 김정희는 직접 가서 파편 2개를 찾고 비석 측면에 발견 경위와 감회를 새겼는데, 특히 세상을 떠난 옹수곤과 이 금석문 글씨를 함께 즐기지 못해 아쉽다는 기록을 남겼다. 

비좌에 새겨진 십이지상

 

귀부의 발가락

 

 석등 屋蓋石

 

 

 

무장사지 삼층석탑

 


이 탑은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전형적인 신라석탑의 양식이다. 아래층 기단은 각 면마다 모서리기둥과 가운데기둥 2개를 새겼고, 윗층 기단은 동그란 안상(眼象)을 각 면에 2개씩 조각하였다.

탑의 중심부분인 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 있으며, 1층 몸돌은 조금 높은 편이다. 몸돌의 각 모서리에는 층마다 기둥 모양이 조각되었을 뿐 다른 장식은 없다. 각 층의 지붕돌은 크기의 줄어든 정도가 적당하고,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5단이며, 처마는 직선을 이루다가 양 끝에서 부드럽게 살짝 들려있다.

1층 몸돌이 조금 높지만 간략화가 심하지 않고, 기단부에 새겨둔 안상은 양식상 시대가 내려옴을 의미하므로 9세기 이후에 건립된 것으로 짐작된다. 원래 무너진 채 깨어져 있었던 것을 1963년 일부를 보충하여 다시 세웠다. (문화재청 자료)

 

 

연리목

 

 

개별꽃

 

 

 

둥글레

 

천남성

 

 

 

 

오늘은 여기서 마무리...

길은 언제나 열려 있으며  늘...나를 맞이하고 있다.

가며....오며...걷는동안

나를 느끼며 나를 알게한다.

걸으며 느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