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포항시 흥해읍 학성리에서 501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가장 오래된 신라시대 비석이 발견됐다.

문화재청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소장 지병목)는 “2009.5.11일 학성리 도로공사 현장에서 신라시대 비석이 발견돼 이를 보관하고 있다”고 15일 밝혔다. ‘포항 학성리비’(가칭)로 명명된 이 비석에는 왕의 교시를 의미하는 ‘교’(敎), 신라 6부 중 하나인 ‘사탁부’(沙喙部), 신라 17관등 중 6번째인 ‘아간지’(阿干支) 등의 글자가 확인됐다.
연구소 박종익 학예실장은 “비문 맨 앞에 보이는 ‘신사’(辛巳) 등으로 보아 6세기(신사년은 501년과 561년) 것으로 판단된다”면서 “561년 제작된 창녕 진흥왕척경비에 ‘아척간’(阿尺干) ‘사척간’(沙尺干) 등으로 표기된 관등명이 이 비에서는 ‘아간지’ ‘사간지’(沙干支) 등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501년일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 이럴 경우 학성리비는 현존 최고(最古) 신라비인 포항 영일 냉수리비(국보 제264호·504년)-신광면 면사무소內보다 3년 먼저 제작된 비석이 된다.
<김진우기자 jwkim@kyunghyang.com>
2009.5.16(토)

2009.5월11일 도로 공사 중 한 주민이 발견한 신라 최고(最古)의 명문비석인 ‘포항 중성리비’가 당초 추정 연대(501년)보다 60년 앞선 441년에 건립됐을 가능성이 크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당초 명문 첫머리에 새겨진 ‘신사(辛巳)’라는 간지 등을 검토한 뒤 비석의 연대가 501년일 가능성을 제기했다. 이것만으로도 파장이 컸다. 지금까지 확인된 가장 오래된 신라고비, 즉 영일 냉수리비(503년)보다 2년 이른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권인한 교수(성균관대)는 9월3일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주최로 열리는 ‘포항 중성리비’ 관련 학술대회에서 이 비석 건립 연대가 501년일 수도 있지만, 441년일 가능성이 좀더 크다고 주장할 예정이다. 비석 내용은 토지 혹은 재산분쟁 소송에 대한 판결문의 성격이다. 왕경의 지시를 받은 지방관이 중성리 부근에서 재판을 열어 판결한 뒤 그 판결문을 비석에 새겼을 것으로 추정된다(이우태 서울시립대 교수).
그런데 권 교수는 ‘중성리비의 어문학적 검토’라는 발표문을 통해 중성리비문의 한문 구사력이 냉수리·봉평비에 비해 떨어진다는 점에 주목했다. 즉 문장 끝에 나오는 ‘교(敎)’자의 경우 ‘~이(耳)’나 ‘~지(之)’같이 문장의 품격을 돋보이게 만드는 종결 어기사(語氣詞·말의 기운을 조절하는 품사)가 없는 게 특징이라는 것. 즉 냉수리비의 ‘~교이(敎耳)’와 봉평비의 ‘소교사(所敎祠)’ 같은 한문 구사력에 미치지 못하는 대목이라는 것이다.
또한 비문의 ‘구약(口若)’은 ‘약구(若口·만약 입으로 ~하면)’가 옳은 표현으로 어순이 바뀌었으며, ‘여중죄(與重罪)’, 즉 ‘중죄를 준다’는 동사 ‘여(與)’는 한문답지 못한 어색한 표현이라는 것.
권 교수는 “죄를 준다는 한문은 ‘여(與)’자가 아니라 봉평비의 ‘획죄어천(獲罪於天)’에서 보듯 ‘획(獲)’자 혹은 ‘득(得)’자를 쓰는 것이 세련된 표현”이라면서 “결국 중성비가 한문 구사력이 뛰어난 냉수리비나 봉평비보다 앞선 시기의 것임을 알려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 권 교수는 명문의 첫머리에 나오는 ‘○盧’를 신라 국호의 다른 표기인 ‘사로(斯盧)’로 읽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절로(折盧)’로 판독한 바 있다. ‘사로’는 신라(新羅)나 사라(斯羅) 등의 명칭보다 앞서는 국명.
중국 자료인 <삼국지·위서 한전> 등에 등장하는 기원후 3세기쯤에 쓰인 명칭이다. 금석문 자료에 따르면 ‘사로’는 사라(斯羅·영일 냉수리비·503년)→신라(新羅·울진 봉평비·524년)로 바뀐다. 권 교수는 따라서 이 중성비의 건립연대가 기원후 3세기~영일 냉수리비 연대(503년) 사이의 신사년(辛巳年) 가운데서도 441년일 가능성이 가장 짙다고 주장한다.
반면 501년설도 만만치 않다. 이우태 교수와 고광의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비문에 등장하는 ‘사탁(沙喙) 사○지(斯○智) 아간지(阿干支)’가 냉수리비(503년)에도 나오는 ‘사탁(沙喙) 사덕지(斯德智) 아간지(阿干支)’와 동일인물이라면 중성비 역시 501년에 세워졌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만약 441년에 건립됐다면 동일인물이 62년이 지난 503년에도 같은 관등을 유지했을 리가 없다는 것이다.
특히 이우태 교수는 비문 첫머리 글자를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의 판독처럼 ‘○절로○(○折盧○)’로 해독하면서 “<삼국유사>에서 지철로(智哲老)로 지칭된 신라 지증왕(재위 500~514년)과의 연관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2009.8.31

중성리비문의 해석
가) 辛巳?(年?) □□(月?)中? 折盧湜? 喙部習智阿干支沙喙斯德智阿干支敎沙喙了抽智奈麻喙部本智奈麻
나) 本牟子喙沙利夷斯利白爭人喙評伐斯彌沙喙夷須牟旦伐喙斯利壹伐皮末智本波喙柴干支弗乃壹伐
金評□干支祭智壹伐使人奈蘇毒只
다) 道使喙念牟智沙喙鄒須智世令于居伐壹斯利蘇豆古利村仇鄒列支干支沸竹休壹金知那音支村卜
岳?干支走斤壹金知塑伐壹
라) 昔云豆智沙干支宮日夫智宮奪了今更還牟旦伐喙作民沙干支使人卑西牟利白口若後世更人者與重
罪典書與牟豆故記沙喙心刀里□
가) 辛巳년 (某月)中에 折盧□, 喙部의 習智阿干支와 沙喙의 斯德智阿干支가 沙喙(部)의 了抽智奈麻, 喙
部의 本智奈麻에게 교시하였다.
나) 본래 牟子인 喙(部)의 沙利와 夷斯利가 아뢰기를(白) ‘爭人(소송 당사자)은 喙(部)의 評公과 斯彌, 沙
喙(部)의 夷須와 牟旦伐, 喙(部)의 斯利壹伐과 皮末智, 本彼(部)의 喙柴干支와 弗乃壹伐, 金評□ 干支
와 祭智壹伐, 使人인 奈蘇와 毒智입니다.’라고 하였다.
다) 道使인 喙(部)의 念牟智, 沙喙(部)의 鄒須智가 世間에 居伐의 壹斯利와 蘇豆, 古利村의 仇鄒列支干支와
沸竹休壹金知, 那音支村의 卜岳干支와 走斤壹金知와 塑伐壹에게 명령한다.
라) 옛날에 말하기를,‘ 豆智沙干支의 宮과 日夫智의 宮이 빼앗았다.’고 하였는데, 이제 다시 (그것을) 牟旦
伐에게 돌려주라. (이에) 喙(部)의 作民沙干支의 使人인 果西牟利가 알리기를‘만약 後世에 다시 말썽
을 일으키는 사람이 있으면 重罪를 준다.’라고 하였다. 典書인 與牟豆가 (이러한) 연고로 기록한다. 沙
喙心刀里가 □한다(새긴다)
이상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豆智沙干支의 宮과 日夫智의 宮이 牟旦伐의 것을 빼앗았는데, 이로 인해 말썽이 일어나 爭人들이 소송을 제
기하였다. 이에 喙部의 習智阿干支와 沙喙의 斯德智阿干支가 沙喙(部)의 了抽智奈麻, 喙部의 本智奈麻에게
진상을 조사하도록 명령하였다. 牟子2명이 爭人을 조사하고 道使는 분쟁과 관련된 지역의 지배층에게 지시
하여 조사하게 하였다. 즉 과거 豆智沙干支의 宮과 日夫智의 宮이 빼앗았던 사실을 밝혀내어 본래의 주인에
게 되돌려 주도록 하고 향후 이에 대한 소송이 제기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辛巳??中折盧?
Ⅱ 喙部習智阿干支沙喙斯德智阿干支
Ⅲ 敎沙喙了抽智奈麻喙部灌智奈麻灌牟子
Ⅳ 喙沙利夷斯利白爭人喙評公斯彌沙喙夷須牟旦
Ⅴ 伐喙斯利壹伐皮末智灌波喙柴干支弗乃壹伐金評
Ⅵ 沙干支祭智壹伐使人奈蘇毒只道使喙念牟智沙
Ⅶ 喙鄒須智世令于居伐壹斯利蘇豆古利村仇鄒列支
Ⅷ 干支沸竹休壹金知那音支村卜岳干支走斤壹金知
Ⅸ 塑伐壹昔云豆智沙干支宮日夫智宮奪了今更還
Ⅹ 牟旦伐喙作民沙干支使人果西牟利白口若後世更
ⅩⅠ 人者侮重罪典書侮牟豆故記
ⅩⅡ 沙喙心刀里?
1. 辛巳???折盧? 喙部習智阿干支沙喙斯德智阿干支敎沙喙了抽智奈麻喙部灌智奈麻
辛巳△△에 △折盧△와 喙部의 習智阿干支와 沙喙의 斯德智阿干支가 沙喙의 了抽智奈麻와 喙部의 本智奈麻에게 敎한다.
2. 灌牟子喙沙利夷斯利白爭人喙評公斯彌沙喙夷須牟旦伐喙斯利壹伐皮末智灌波喙柴干支弗乃壹伐 金評沙干支祭智壹伐
本牟子(원래 주인)는 喙의 沙利夷斯利(또는 沙利와 夷斯利)이고, 白爭한(다툼을 아뢴) 사람은 喙의 評伐
斯彌(또는 評伐과 斯彌)과 沙喙의 夷須와 牟旦伐, 喙의 斯利壹伐과 皮末智, 本波의 喙柴干支와 弗乃壹伐,
金評沙干支, 祭智壹伐이다.
3. 使人奈蘇毒只道使喙念牟智沙喙鄒須智世令于居伐壹斯利蘇豆古利村仇鄒列支干支沸竹休壹金知
那音支村卜岳干支走斤壹金知
使人인 奈蘇와 毒只(또는 奈蘇毒只), 道使인 喙의 念牟智와 沙喙의 鄒須智가 모든 사람 앞에서(世) 居伐
의 壹斯利와 蘇豆, 古利村의 仇鄒列支干支와 沸竹休壹金知, 那音支村의 卜岳干支와 走斤壹金知에게 명령
하나니
4. 塑伐壹昔云豆智沙干支宮日夫智宮奪了今更還牟旦伐
塑伐은 한 때에는 豆智沙干支의 宮이었고 日夫智의 宮이었다고 하나 빼앗아 이제는 다시 牟旦伐에게 돌
려주어라.
5. 喙作民沙干支使人果西牟利白口若後世更人者侮重罪
喙의 作民沙干支의 使人인 果西牟利가 말로 아뢰기를(白口) 만약 후세에 다시 이를 말하는 자가 있다면
무거운 죄를 줄 것이다.
6. 典書侮牟豆故記沙喙心刀里?
典書인 侮牟豆가 짐짓 기록하고, 沙喙의 心刀里가 ?한다(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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