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의 나이는 약 400년으로 전해오나, 약 600년 전인 고려 공민왕(재위 1351∼1374) 때 이 마을에 살던 김영동이란 젊은이가 이 마을에서 살고 있었다. 당시(當時) 북으로는 홍건적(紅巾賊)이 침입(侵入)하고 남으로는 왜적(倭賊)이 침입(侵入)하여 양민(良民)을 학살하고 노략질을 일삼는다는 소문이 돌았다. 19세가 된 그는 출전(出戰)할 결심(決心)을 하고 이 나무를 심은 다음 부모(父母)님께 하직인사를 하며 "소자(小子)가 돌아오지 못하더라도 이 나무를 자식으로 알고 잘 가꾸어 달라"고 하였다. 그는 왜구와 싸우다가 전사(戰死)하고 부모(父母)는 이 나무를 유언(遺言) 그대로 잘 가꾸었다. 따라서 나무의 수령(樹齡)은 이러한 전설(傳說)을 토대로 하게 되면 600년이 된다.
마을사람들은 매년 정월 대보름에 이 나무 앞에 모여 제사를 지내며 마을의 평화와 풍년을 기원한다고 한다. 안강읍 육통리의 회화나무는 오랜 세월동안 조상들의 관심과 보살핌 속에 살아 왔으며, 민속적·문화적 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앞에 놓인 넓은돌은 제를 지낼때 제상으로 쓰인단다.
육통마을의 회화나무는 높이 19.1m, 둘레 6.2m로 줄기와 하부 부분에 상한 흔적이 보인다.
일흔 넘으신 동네어르신.....
어릴적에 올라가서 놀기도했으며 나무의 큰가지가 다섯가지였던것이
태풍 '매미'로 인해 이제 세가지로 남아있다고...
안내문에 전해오는 이야기와 나무의 수령에대한 궁금증에 (400년과600년)
어르신은 '셈이 안맞지' 하시며 웃기만하셨다....
마을 이름이 특이하게도 '육통'이라고 붙여진 것은 이 마을이 원당(元堂), 능곡(陵谷), 거리동, 못밑
존당(存堂), 황새마을 등 인근 여섯 마을의 가운데에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마을은 주로 벼농사와 단감, 포도 등 과수와 한우, 젖소를 기르는 농사일에 종사하는 전형적인
농촌 마을입니다. 안강의 넓은 들을 끼고 있어 예로부터 살기 좋은 마을로 알려져 왔으며,
'고(물고)만 외워도 날이 샌다'라고 할 정도로 고가 많다고 한다. 그만큼 들이 넓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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