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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비, 묘갈, 묘지, 행장, 유사록의 정의

박근닷컴 2011. 3. 1. 09:07

신도-비, 묘갈, 묘지, 행장, 유사록의 정의
神道-碑
임금이나이품 이상의 벼슬아치의 무덤 남동쪽의 큰 길가에 세운 석비石碑. 
신도神道는 묘 앞에서 입구까지 낸 길을 말한다.  
중국의 경우 한대漢代부터 성행했는데, 처음에는 석주石柱를 세우거나  
간단한 제액題額을 써서 표시했을 뿐이고,  
묘비에 글자를 새기기 시작한 것은 진晉, 송宋대에 들어서였다.  
우리나라에도 삼국시대부터 묘비를 세우기 시작했다.  
특히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신도비를 세우는 것이 성행했는데,  
태조의 능인 건원릉建元陵, 세종의 능인 영릉英陵 등 왕릉 앞에 세워진 것이 있다.  
사대부의 경우에도 생전에 세운 공로나 인품을 기록하여 비석을 크게 세우는 사례가 많았다.  
귀부龜趺와 이수螭首를 갖춘 형식이나 귀부는 생략하고 이수만 갖추기도 했다
  碣 
무덤 앞에 세우는 돌비석 또는 한문학 문체의 이름.
묘갈墓碣과 묘비墓碑는 비석으로 불리기도 했다.  
구조는 대개 맨 아래에 반석盤石, 그 위에 비신碑身,  
맨 위에 지붕 모양의 가첨석(加檐石 : 개석蓋石)으로 되어 있는데, 가첨석이 없는 경우도 있다.  
죽은 이의 이름, 가족관계, 출생과 사망 연월일, 자손관계 기록, 살아 있을 때 했던 일 등을 기록했다.  
당나라 때는 관직이 5품 이상이어야 귀부이수龜趺螭首를, 5품 이하는 방부원수方趺圓首를 세웠다.  
〈후한서 後漢書〉 주注에는 네모진 것을 비碑, 둥근 것을 갈碣로 구분했고,  
〈문체명변 文體明辯〉에는 반니潘尼가 반황문潘黃門의 묘갈문을 지어 묘갈문을 만드는 것은  
진晉나라에서 비롯되었으며, 관직의 등급에 따라 갈과 비를 구분했으나  
실제로는 다를 것이 없었다고 했다.  
서법書法은 명名이 있고 없고에 관계없이 갈碑과 비碣는 같았다.  
묘갈은 죽은 이의 이름을 후세에 전하는 것이 목적이었으므로,  
대체로 죽은 이의 긍정적인 좋은 점만 쓰는 것이 특징이었다.  
그래서 내용의 자료적 가치는 적을 수밖에 없었다.  
묘갈에 써 있는 명문銘文을 묘갈명이라고 하는데, 운문韻文으로 되어 있고  
대개 4언이 중심이나 5언 · 7언의 장단구長短句도 있다.  
한국에는 고려시대 최충崔沖의 〈홍경사갈 弘慶寺碣〉이 처음이며,  
조선 중기에 와서 크게 성행했다.  
대표적인 인물인 송시열宋時烈은 많은 묘갈명을 남겨 후대 금석문 발전에 큰 역할을 했다
 
광지壙誌라고도 함. 
죽은 이의 행적이나 무덤이 있는 장소와 방향을 글로 새겨 무덤 앞에 묻은 돌이나  
도판 또는 거기에 새긴 글.
덕흥리벽화고분 / 덕흥리벽화고분의 묘지, '영락 18년' …
보통 정방형인데 세월이 흘러 무덤의 형태가 바뀌어도 어떤 이의 무덤인지 알 수 있도록  
무덤 속에 묻거나 묘실의 벽면에 써 넣었다. 지誌는 지志로도 쓰며 모두 기록한다는 뜻이다.  
한국에 남아 있는 묘지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1935년 만주 지안 현[輯安縣] 고구려고분에서 발견된 모두루묘지牟頭婁墓誌이다.  
이것은 광개토왕에서 장수왕에 걸친 5세기 전반기의 것으로 총 80여 행에 각 행 10자씩,  
회칠한 묘실 벽면에 먹으로 쓴 것으로  모두루의 가계를 비롯한 활동을 적었다.  
그밖의 유명한 것으로는 백제시대 공주 무령왕릉의 지석誌石이 있다.  
이것은 525년(성왕 3)에 만들어진 것으로 지신地神에게 묘터를 삿다는 토지매매계약서로  
중국에서는 매지권買地券이라고 한다.  
고려와 조선시대에 와서 묘지가 많이 나타나는데, 
고려시대에는 오석(烏石 : 흑요석)과 점판암으로 된 판석에  음각으로 글을 새긴 것이 대부분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오석, 점판암과 함께 자기로 만든 도판도 썼다.  
묘지는 묻힌 이의 집안 계통이나 신분 등 개인 신상은 물론  
그 당시 사회상을 짐작할 수 있어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그러나 묘지를 묻는 일은 일제강점기 이후 점차 없어졌다.
 
고려와 조선시대에 죽은 자의 이력과 행적을 기록한 글.
연보年譜라고도 한다.  
행장이 언제부터 작성되기 시작했는가는 불분명하다.  
오늘날 전하는 행장 중 가장 연대가 앞선 것은 1265년(원종 6)에 작성된 민적閔의 행장이다.
행장은 시호· 비명· 묘지명 작성의 토대가 되는 것이다.  
고려에서 시호를 내리는 일을 관장하던 전의시典儀寺가  
목종대에 그 기능과 직제가 정립된 것으로 보아,  
행장은 늦어도 목종대 이전부터 작성되었다고 추측된다.  
이후 행장은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까지 계승되었고,  
유학의 발전 및 유교문화의 융성과 함께 보편화되었다.  
행장의 내용은 작성시대와 작성자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다.  
그러나 현존하는 고려·조선 시대의 행장을 보면 대개 ① 행장인의 관직, ② 성명, ③ 본관·가계,  
④ 출생년  ⑤ 성장, 수학 과정 ⑥ 출사로出仕路, 역관歷官, 행적, 공적 ⑦ 졸년 ⑧ 장지  
⑨ 부인, 부인가계 ⑩ 성품  ⑪ 자손 ⑫ 행장 작성자의 순서로 구성되었다.  
행장은 위로는 왕, 대신, 재상으로부터  
아래로는 벼슬하지 않은 유학에 이르는 인물 모두가 작성의 대상이 되었다.  
행장의 작성자는 행장인의 기호·지위·학행·재행 등과 관련되어 다소 차이가 있었다.  
행장인 자신이 평소에 행장을 지어두었다가 자손에게 전하는가 하면,  
왕명에 따라 문장에 능한 관인이 작성하거나,  
행장인의 자손의 청탁에 따라 친구나 문인 또는 자손들이 작성하기도 했다.  
이중 조선 후기에 들어 종2품 이하 관인 및 유학에 있어서는 문집의 간행이 성행하고,  
그 문집에는 문집의 주인공과 그 후손의 연보나 행장을 수록하게 했는데  
대개 교우 또는 문인이 행장을 작성했다.  
행장은 한 가문의 행적을 기술한 가장家狀과 함께  
〈조선왕조실록〉의 졸기, 비명, 묘지, 묘갈명, 연보 등을 작성하는 데 기초가 되었고,  
증시의 대상이 되는 관인(정2품 이상), 공신(친공신)의 경우에는 시호 상정의 토대가 되었다.    
행장은 해당 인물에 관한 가계, 출사로, 역관, 치적, 공적, 교우관계 등이  
종합적으로 기록된 일대기이므로  해당 인물의 구체적인 행적을 연구하는 기초 자료가 된다.  
그런데 행장은 비명, 묘지, 묘갈명과 같이 그 작성자가 행장인과 친분이 깊은 인물이거나  
자손 등이 되기 때문에 공이 주가 되고 허물은 제외되기 쉬우므로  
이것의 이용과 해석에는 신중을 기해야 한다.  
행장은 각 개인의 문집의 말미, 족보의 초두에 부록으로 놓여 있는 경우가 많다.  
〈국조인물고〉·〈동문선〉 등의 문헌에도 여러 사람의 행장이 수록되어 있다.
遺 事 錄
죽은 사람이 남긴 사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