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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릉 [秦始皇陵]

박근닷컴 2011. 7. 27. 20:24

 

 

중국 산시성 시안. 세계적으로 개인을 위한 묘로서는 최대의 크기로 진시황제가 즉위한 때부터 39년에 걸쳐 만들어 졌다.

중국 산시성[陝西省] 린퉁현[臨潼縣] 여산(驪山) 남쪽 기슭에 위치한 시황제의 구릉형 묘.

  

동서 485m, 남북 515m, 높이 약 76m이다. 《사기》 <진시황본기()>에 의하면 시황제 즉위 초부터 착공되어 통일 이후에는 70여만 명이 동원되어 완성되었다고 한다. 내부에는 수은으로 강과 바다를 만드는 등 천상과 지상을 모방한 지하 궁전을 만들고 도굴자가 접근하면 화살이 자동발사하는 시설도 갖추었다고 하나 아직 발굴되지 않았다.

능은 장방형의 두 겹의 담장으로 싸인 능원의 남쪽에 있으며, 안쪽 담과 바깥 담의 사변 길이는 각각 2,525.4m, 6,294m로, 현재는 지상의 흔적이 없는 부분이 많다. 담벽 아래에서는 도수도(), 능원 내외에서 3곳의 건축유지와 수많은 배장묘와 순장묘가 발굴되어 전체적인 규모와 구조가 확인되었다. 특히 능원 동문 밖의 거대한 병마용갱은 세계적인 관심거리가 되었고, 능원 밖에서 발견된 100여 개의 형도묘는 건설 당시의 가혹한 강제노역의 실상을 짐작하게 한다. 198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사마천사기의 진시황본기 편에 따르면 시황제 즉위 초부터 여산(酈山)에 무덤을 착공하여 통일 후에 최대 70여만 명까지 동원하였다고 한다.

현재의 진시황릉은 병마용과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며 발굴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이곳이 정확한 위치인지는 알기 어렵다.

지금의 진시황릉은 다분히 황릉의 위치와 역사적 의미만을 알려주는 전시용이며, 입구에서부터 정상까지 가는 200m 정도의 계단을 설치하고 규모만 파악할 정도의 의미 밖에 주지 못한다. 지금도 넓은 산에 발굴이 계속 중이며, 언젠가는 발굴이 끝나 실체를 밝힐 것으로 예상할 뿐이다.

진시황의 사후 함양으로 들어온 항우가 30만의 병사들을 동원해서 도굴을 했다는 기록과 황소의 난 때 이곳을 도굴하여, 외부로 노출된 쇠붙이는 모두 도굴해 갔다는 기록이 있어 여러 번 외벽의 도굴이 이루어 졌음을 알 수 있다.

사마천의 《사기》에는 내와 강을 이뤄 바다가 형성될 정도로 엄청난 양의 수은을 이용하여, 지하궁전을 지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그 기록에 따르면 수은으로 인해 지하궁전은 완전한 도굴이 힘들었을 거라는 추측을 할 수 있다.

1987년, 이곳은 병마용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