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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경주 황성동 고분(사적 제476호)이 발견 6년만에 복원되고 주변이 정리되어 완전 공개

박근닷컴 2012. 1. 8. 23:56

 

황성동 고분(사적 제476호)이 발견 6년만에 복원되고 주변이 정리되어 완전 공개되었습니다

 

건물 시공 중 발견되어

2005.2월 '지중레이다(GPR) 탐사'와 '전기비저항탐사' 결과를 거쳐

오래동안 발굴 조사가 실시되었었습니다

 

*위치 : 황성동 현대아파트 202동과 주공 2차아파트 205동 사이(906-5번지)

          (계림중 북서서 쪽 200M,  계림고등 북서서 쪽 150M  도로 변)

*(내가 붙인) 애칭 : 작은 간묘

 

*관련 자료

 

1)<경주 황성동 고분>(사적 제476호)은 인근에 위치한 경주 용강동 고분(사적 제328호)과 함께 경주지역의 대표적인 평지 석실분으로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발굴조사 결과 봉분과 호석주변 시설 및 석실내부 시설 등 횡혈식 석실분 자료의 새로운 시설이 확인 되었으며, 또한, 석실내부에서 출토된 인화문토기와 중국제 해무리굽 청자편은 고분의 연대와 신라토기 편년연구에 새로운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석실은 널길(棺이 들어가는 길)이 왼쪽에 위치한 좌편연도식 석실로 천정부분은 올라가면서 점차 모죽임한 것으로 추정되나 붕괴되고 일부만 남아 있다. 석실의 평면형태는 남북으로 긴 장방형이며, 규모는 남북길이 2.4m, 동서너비 1.75m이다. 봉분의 축조는 사질토와 사질점토 및 잔자갈과 굵은 모래를 판축기법으로 쌓은 것으로 추정되며, 규모는 동서 14.1m, 남북 16.4m, 잔존높이 2.0m이며, 호석은 직경 약 9.8m, 높이 약 2.0m이다.

유적의 연대는 석실내부에서 출토된 인화문토기로 보아 7세기 중반에 축조되었으며, 마지막 추가장이 이루어진 시기는 묘도에서 출토된 중국제 해무리굽 청자편으로 보아 9세기 전반으로 추정된다.

이 고분은 신라 평지석실분 연구와 신라토기 편년연구에 새로운 자료를 제공하는 중요한 고분이며, 특히 인근에서 기 조사된 다른 고분유적들이 모두 없어진 상황에서 그 원형의 보존이 필요하다고 판단되어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하여 보존·관리키로 한 것이다(경주국립문화재연구소 자료)

 

2) 발굴 시작 당시 자료

지금까지 신라시대 마을과 철 생산 유적이 밀집해 출토된 경주 황성동에서 또 하나의 고분 발굴 작업에 들어갔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소장 윤근일)가 10일 개토제(開土祭)를 거행하고 공식 발굴 삽을 뜬 황성동 906-2ㆍ5번지에 자리한 고분이 그것으로, 발굴 시작 전부터 이곳 경주에서는 많은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날 개토제에서 1970년대 이후 경주 고고학 발굴조사의 주역 중 한 명인 윤근일(58) 소장은 "땅 속을 미리 아는 사람은 없다"면서도 "다만 이 고분은 발굴 전에 실시한 지중물리탐사 결과 석실(石室)로 판단되는 윤곽이 지하에 완연함을 확인한 상태여서 좋은 성과를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국내 발굴 현장에서 고분은 매우 흔한 조사 대상이지만, 이 황성동 고분은 조사가 시작되기도 전에 고고학계가 주목하는 보기 드문 경우에 해당한다.

고분 축조 시기, 입지 조건, 무덤 양식에서 1987년 국립경주박물관이 조사한 또 다른 황성동 석실분이나 그 전해인 1986년 경주고적박굴조사단(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전신)이 발굴한 경주 용강동 고분과 매우 흡사한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80년대에 조사된 이들 신라고분은 각각 축조시기가 7세기 말과 8세기 초로 추정되는 것들로 무엇보다 사람과 동물을 형상화한 토기인 토용(土俑)을 다수 출토했다는 점에서 비상한 관심을 모았으며, 그래서 지금도 한반도 고고학, 나아가 신라고고학 발굴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

고분 크기를 봉분(封墳) 기준으로 비교하면 황성동 석실분이 지름 14.1m이고, 용강동 고분이 14.7m로 나타나는데, 이번에 발굴이 시작된 또 다른 황성동 고분은 10-12m로 비슷한 규모다.

이 고분은 황성동 석식분에서 북쪽으로 약 150m 떨어진 지점에 밀집한 아파트 숲 한 가운데에 마치 섬처럼 자리하고 있다.

노태우 정권 시절 추진한 주택 200만호 건설이라는 국책사업 때문에 이 황성동 일대에서는 신석기 시대 이래 청동기시대 마을과 분묘, 신라시대 마을과 제철 관련 유적 외에 각종 고분군 등이 무수하게 확인됐음에도 현장은 보존되지 못하고 아파트 등이 들어서고 말았다.

요즘 같으면 당장 국가 사적으로 지정될 만큼 중요한 유적이었으나 개발에 무방비로 노출돼 파괴 일로를 걸었던 것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이 고분만큼은 기적처럼 살아 남았다.

현재 남아 있는 봉분은 높이가 약 1.7m에 이르러 이곳이 무덤임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물론 무덤이 아닐 가능성도 아주 없지는 않다.

어떻든 발굴 조사 돌입에 앞서 잡목 등이 제거되고 완연한 봉분을 드러낸 이 고분은 그 남쪽 편이 움푹 팬 흔적이 있고, 정상부에도 함몰된 원형 구덩이가 뚜렷했다.

윤근일 소장은 "남쪽 구덩이는 민묘(民墓)가 있다가 이장되면서 생긴 것"이라면서 "정상부 함몰 부분은 도굴을 위한 갱이 아닐까 생각되지만 그것이 생긴 자세한 원인은 조사가 이뤄지면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조사단이 이 고분에서 80년대 중반 고고학계를 흥분케 한 각종 토용과 같은 유물이 출토되기를 기대하면서도 한편에서는 그런 기대를 공공연하게 말할 수 없는 까닭이 무엇보다 도굴 당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황성동 고분 복원 및 주변 정리 공개

 

 

 

 

 

 

 

발굴 당시 모습 -2005.3월~5월

 

발굴 당시 모습

-제단 노출상태(현재 유리돔으로 원형 공개 중)

 

 

발굴 당시 모습

-석실 내부(안에서 밖 쪽)

 

 

발굴 당시 모습

-석실 내부(밖에서 안쪽으로)

 

 

발굴 당시 모습

-묘실 내부의 중국제 청자편

 

 

경주 간묘(계림중학교 뒷편) 도 주차장 신설 및 약간 정비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주변이 처량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