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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왕릉 명칭에 대한 새 논문의 의미

박근닷컴 2012. 3. 8. 14:54

신라왕릉 명칭에 대한 새 논문의 의미

최근 한 대학교 교수의 유고(遺稿)인 ‘신라왕릉 연구’란 이름의 논문 내용 중 “현재 이름이 붙여진 신라왕릉 중 7기 이외 나머지는 모두 주인공을 잃어버렸거나 잘못 알려진 것이다. 김유신 묘는 신라 제35대 경덕왕릉이며 무열왕릉 앞 김인문 묘가 실제 김유신 묘다”라는 논문 이 발표됐다.

경주학연구원이 최근 ‘경주학연구총서 2호’로 발간한 ‘신라왕릉 연구’란 제목의 논문집에서 지난해 6월17일 출근길에 불의의 교통사고로 타계한 경주대학교 문화재학과 이근직 교수는 “현재 명칭이 붙여진 신라왕릉 가운데 문화재지정명칭과 문헌기록상의 위치, 시대의 변화에 따라 변천하는 무덤의 양식 등 세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시키는 진짜 왕릉은 제27대 선덕여왕릉과 제29대 태종무열왕릉, 제30대 문무왕릉 등 7기 뿐이며 나머지는 잘못 알려진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이 교수는 이 유고에서 생전에 경주지역에 위치한 여러 곳의 신라 왕릉들을 직접 탐사하면서 시대별로 상대와 중대, 하대로 나누고, 기존 문헌기록과 무덤의 입지조건, 규모와 양식의 변천과정은 물론 미술사와 정치, 사회, 지리, 사상, 예술적 측면까지 다뤄가며 면밀하게 조사한 자료를 토대로 이같은 내용을 정리해 객관적 신뢰성을 높이기도 했다.

이 교수는 또 “무열왕릉 뒤편 서악동 고분군은 중고기 왕릉으로, 이곳의 4호분이 법흥왕릉, 3호분은 법흥왕비 보도부인릉, 2호분은 진흥왕릉, 1호분은 진지왕릉으로 각각 비정 한다”는 등 역대 신라왕릉의 위치를 꼼꼼하게 재해석 했다.

저자는 그동안에도 학술강연회 등에서 이 같은 주장을 폈다가 신라왕성의 후손 문중들로부터 호된 질책도 받았으나 지난 20여년 동안 각종 문헌을 뒤지고 직접 현장을 밟으면서 조사한 결과를 놓고 학자적인 자부심으로 원고를 정리했기에 그 의미를 더한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물론 현재 불리는 신라왕릉의 명칭에 대해서는 기존에도 몇 몇 학자들로부터 여러 차례의 크고 작은 이견발표와 논란이 일어난 바 있었다.

가장 반향이 컸던 사례로는 300여년 전 향토 내남 출신의 학자인 화계(花溪) 유의건(柳宜健.1687~1760)의 문집인 화계집(花溪集)이다. 화계는 이 문집의 신라왕릉진안설(羅陵眞顔說)이란 글에서 “조선 영조 6년(1730년)이던 경술년에 경주부윤으로 있던 김시형이 박씨 문중과 타협해 소전(所傳)을 잃어버린 왕릉들을 찾는 작업을 행했다”고 기록했다. 당시 기록엔 ‘어떤 방법으로 했다’는 구체적인 내용도 있었으며 그 뒤에는 이에 따른 신원(伸寃)사건도 뒤 따랐을 정도였다.

결국 경술년을 전후해 이름을 몰랐던 17기의 무덤들이 추가로 왕릉으로 명명된 셈인데 이같은 내용은 해당 문중들과는 워낙 예민한 관계라 이후로는 이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 자체가 기피돼 온 것도 사실이다.

한편 현재 경주권에 위치한 신라왕릉은 모두 36기이며 진성여왕릉이 경남 양산에, 경순왕릉은 경기도 연천에 위치하는 등 이름이 붙여진 신라왕릉 수는 모두 38기로, 신라왕이 56왕이라서 이들의 왕릉을 숫자로 치면 아직도 18기가 확인되지 않고 있는 셈이다.

특히 1945년 광복 이후부터는 고증보다는 법적보호를 더 강조해 온 정부의 입장이 우세해지면서 개별 신라왕릉의 주인공에 대한 규명은 요원해졌다는게 학계의 중론인 가운데 이번 이 교수의 논문으로 이에 관한 연구의 새로운 계기가 마련될 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