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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보 원덕희(사진 작가 ) 사진에세이 오래된 풍경, 아름다운 만남 경주 남산

박근닷컴 2012. 4. 19. 21:05

부처가 바위고 바위가 부처 되는 화엄의 세계
  • 봄 햇살이 메마른 실개천처럼 흘러들고, 여린 가지들은 꽃잎을 부풀리는 계절이다. 지난겨울을 담았던 카메라는 자꾸만 나른한 봄을 향해 초첨을 맞춘다. 그때마다 나는 자꾸 겨울을 지우고 다시 가까운 봄을 향해 렌즈를 들이대지만 내 눈은 먼 추억 속으로 가고 있다. 1970년대 초, 청기와집이 많던 경주. 고등학교 수학여행 때 처음 본 경주는 너무 낯설게 다가왔다. 그때는 불국사, 토함산이 전부인 줄 알았다. 누구나 경주라는 말을 꺼내면 여행추억 하나쯤은 꺼내 놓기 마련이다. 그러나 나에게 아침 해는 오랫동안 뜨지 않고 한동안 씨앗처럼 자고 있었다. 어떤 추억은 꺼내기 불편하고 어떤 추억은 치기어린 것도 있었다. 그때의 기억은 자연과 더불어 존재하는 유물은 본 적도 없고 입장료를 내야만 보는 게 유적이고 유물인 줄 알았다. 경주 남산은 임금이 숨었던 망국의 터전 포석정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좋은 추억들은 떠올리는 것만으로 기다림을 견디게 한다. 나는 창신동 낙산 밑에서 성벽을 보며 어린 시절을 보냈고, 다시 안암동 고대 뒷산 산동네로 이사를 갔다. 가난하고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친구들과 매일 산을 오르내리며 십대 후반까지 보냈다. 산은 우리에게 삶의 터전이고 고향의 뒷산이었다. 그래서 산밑에 마을을 형성하였고 집도 산을 닮게 지었다. 초가지붕은 다 뒷산을 닮았다. 나무 보고 산이라 하고 바위 보고 산이라 했던가. 그 후로 그곳을 떠나 오랫동안 산을 잊고 지냈다. 아니 산이 있는지도 모르게 바삐 살았다.

    얼굴은 감추고 잎만 내민 나무는 봄이면 꽃다발 받쳐 들고 언덕을 오른다.

     

    깨질 듯 새파란 유리창같이 하늘 맑은 날, 누군가의 어깨에 가만히 손 얹는 아침이면 그림자를 데리고 나는 또 길을 떠나 숲으로 가고 있다. 이제 봄은 최대한 몸을 열었고, 경주 남산으로 가는 길은 바람도 가볍게 등을 떠민다. 길 옆엔 밭이 갈려 있어 땅에 엎드려 봄 내음도 맡아 본다. 흙 냄새가 내 가슴의 묵은 마음을 갈무리해 줄 것 같다. 아침 숲에 안개가 내려온다. 산길을 걸으면 신발도 마음도 촉촉히 젖어야 한다. 젖은 신발이 젖은 발을 데려간다. 젖지 않게 봄을 건너려는 마음은 사는 일도 자꾸 사소해지고 작아지기만 한다.

    햇빛이 내리는 삼릉 숲 사이로 난 구멍마다 비가 새듯 빛이 쏟아진다. 비늘 가득한 지느러미를 치며 오래된 노송들은 하늘 위로 부드럽게 유영을 한다. 소나무의 갈라터진 흑갈색 줄기는 굽이굽이 선들이 아름답고 평화롭다. 천 년의 숲이다.

    오랜 세월을 묵묵히 산을 지켜온 나무들의 존재는 참으로 위대하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참 분주하다. 공허함과 쓸쓸함을 숨기기 위해…. 지난가을 떨구었던 나뭇잎들을 나무들은 기억하지 못한다. 지난가을 내가 잊어버린 기억을 나도 더 이상 아쉬워하지 않는다. 이 봄 그 빈자리에 새로운 잎들과 풀들이 채우고 있다. 많이 추웠던 지난겨울을 지나온 억새는 허리가 많이도 굽었다. 그 옛날 경주는 신라인들이 궁궐과 집을 짓고 땔감을 위해 많은 나무들을 사용했기에 오늘날 굽은 소나무만 남았다고 한다.

    사랑에 마음 상한 날은 천년바위에게라도 기대고 싶어진다.
    천 년의 시간과 많은 사연이 담겨 있는 이곳 남산의 두루뭉술한 바위는 부처 되어 흐르던 시간도 소리 없이 멎어 신라로 간다. 석공의 돌 쪼는 소리와 그 속에서 피어난 부처의 미소가 과거의 시간을 간직한 채 천년 만년 의연하게 제자리를 지키고 있고, 숲은 세파에 지친 몸을 내어주고 흙으로 돌아가니 윤회로의 귀환이 아닐까? 천년 부처는 그렇게 앉아 있고 바위 속 마애불도 그렇게 서 있다. 부처가 바위고, 바위가 부처 되는 남산에 오르면 바라보는 사람까지 부처가 된다. 구름은 구름대로, 바위는 바위대로 천년 그대로 흘러간다. 무덤은 언덕으로, 불상은 바위로 변해가고 있다.

    바람이 나무와 나무, 계곡과 계곡 사이를 오가며 남쪽에서 올라오는 봄소식 전하기에 바쁘다. 새소리, 물소리, 깊은 사이로 난 길은 천년 숲으로 가는 길이다. 산에는 생강나무가 노란 꽃망울을 터뜨리고 각시 같은 진달래는 바람에 날린 듯 여기저기 피어난다. 갈증을 달래려 고로쇠 수액을 마시니 내 몸 어딘가에 금방이라도 연한 새순이 돋아날 것 같다. 나무가 길어 올린 한 컵의 생명을 내가 냉큼 먹어 버렸다. 제 봄을 도둑 맞았을 나무에게 잠시 미안하다.

    산에서 불어오는 가벼운 봄바람이 지나니 햇빛이 분다. 바람도 없는 숲 한가운데로 그림자를 발 앞에 두니 그림자는 점점 일어서고, 오르막길을 오르니 그림자가 먼저 오른다. 햇빛은 양지만 골라 딛으며 어느새 계곡을 건너고, 걸음을 멈추자 나무들은 솜털 같은 햇빛을 털어내지 않고 보듬고 있다. 큰 바위를 넘어 가려던 햇살은 털썩 바위에 걸터앉아 잠시 쉬어 가란다.

    계곡의 흐르는 물을 두 손 가득 담으니 햇살도 두 손 안에서 출렁거린다. 미처 담지 못한 시간들을 더 많이 쏟아 버린다. 살아가는 일도, 사랑하는 일도 두 손 가득 담으려 마음을 냈지만 흘려보낸 것이 더 많았으리라. 들이켠 차가운 물이 몸으로 덥혀질 때까지 살아가는 일도, 사랑하는 일도 잠시 출렁거려도 좋겠다.

    이른 새벽 숲은 삶이 버거운 누군가에겐 서광이 비칠 때까지 머물다 가기를 허락한다.
    우리는 인생을 질주하기를 바라질 않는다. 그 질주의 끝에서 누구나 저무는 황혼을 만나야 한다면 천천히 걸어가도 괜찮을 것이다. 지금 천천히 떠날 수 있다는 것은 행복이 아니라 행운이다. 그리고 다시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은 행복이다. 다시 산길을 오른다.

    과거와 현재가 혼재되어 삶과 죽음이 함께 숨을 쉬는 곳, 경주는 소설가 김동리, 시인 박목월, 두 거목을 천 년의 넉넉함으로 품었다. 경주가 고향인 두 사람의 작품 속엔 고향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김동리와 박목월은 대구 계성중학교 동창이다. 학창시절 동리는 기차 안에서 한 소녀를 보고 반했다. 그녀는 알고 보니 경주에 사는 소문난 부잣집 딸이었다. 가난했던 동리는 혼자 애태우며 끙끙 앓았다. 이걸 본 목월이 나섰다. 그러나 그녀에게서 아무런 답장이 없었다. 동리는 상심하여 사랑을 접고 말았다. 50년 뒤 경주에서 열린 백일장 심사에 참여했던 김동리는 깜짝 놀랐다. 장원에 당선된 사람이 바로 그녀였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된 그녀에게 동리가 물었다. “그때 왜 답장을 주지 않으셨나요?” 오랫동안 하고 싶었던 질문이었다. 그러자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남자가 왜 그리 적극적이지 못했습니까. 나는 기다렸는데…” 김동리는 1976년에 이 에피소드를 선도산이란 단편으로 발표했다.

    경주는 산, 물, 들, 수풀 어디서나 시와 소설, 음악, 그림이 샘솟는 곳이라고 김동리는 말했다. 이 두 거목들도 이 산길을 자주 올랐을 것이다.

    햇살들이 만지고 가는 천년 숲은 순한 물결로 흘러가고 나도 걸음을 편하게 내려놓는다. 산은 겨울을 걷어내고 빨리 봄을 꺼내고 싶었으리라. 나는 아직 이른 봄인데 내 그림자는 어느새 꽃이 피었다. 이 숲에서 이제는 찾을 수 없는 오래된 추억들을 꺼내고 지나간 내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오르는 산길은 지난가을 떨어진 솔잎이 푹신하여 좋다. 발길이 그리 많지 않아 호젓한 오르막길이다. 그런데 이 길들은 신라 사람들이 서라벌에 모여 나라를 세우려 했을 때부터 난 길이라고 한다. 지금은 나그네의 발길이 천년 숲길을 밟으며 내는 서걱거리는 소리뿐이다. 산 언덕에 오르면 시간도 넓어지고 추억도 오르막이다. 남산에서 멀리 보이는 동산 같은 무덤들과 기와집들의 풍경이 가슴 따끔따끔하게 다가온다. 마치 이곳에 처음 온 사람처럼 낯선 시선으로 바라본 풍경은 참 아름답다.

    천 년이 지났다는 사실도 잊어버린 하늘, 그대로 골은 깊고 수많은 불상과 석탑들이 화엄세계를 이루었다. 신라인들은 바위에 부처를 새긴 것이 아니라 정을 들고 바위 속에 숨어 있는 부처님을 찾아낸 것이다. 삼릉으로 오르는 산길은 굽이굽이 불상들이 많다. 좌우를 두리번거리면 모르는 길엔 저 멀리 아련한 미소가 어른거린다. 보살의 미소, 관세음보살의 길이 있다. 조각 불상도 있지만 선각 불상들도 있다. 선으로만 되어 있으니 조각이 아니고 그림이다. 유려한 선과 조화로운 구도는 바위 그림이다. 슬며시 손을 짚은 것 같으면서도 정성 들여 다듬은 바위들이 많다.

    남산은 신라인들의 이상세계이기도 하고 수미산이기도 하였으리라. 그들에게는 영원한 곳이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아직도 그곳에서 변하지 않는 시간의 흔적들을 발굴한다. 문화는 물처럼 흘러가지만 문명의 흔적들은 남아서 선인들의 꿈과 애환을 보여 준다. 어느 시대든 사람은 꿈과 시간을 쫓는 외로운 사냥꾼이다.

    경주는 지나간 역사와 현실이 한 공간 안에 조화롭게 어울려 있다. 낮은 기와지붕 너머로 보이는 뒷산 같은 능들이 자아내는 풍경은 한 폭의 초현실적인 풍경이다. 그 능들은 우리 할아버지들 무덤처럼 따뜻하고 푸근해서 마음이 편하다. 순하고 부드러운 곡선이 하늘을 날아갈 것만 같다.

    경주 사람들은 누구나 다 역사 속을 사는 사람들이다. 오늘을 살아도 어제를 사는 사람들. 무덤들 사이로 지나 다니는 사람들의 모습은 그림처럼 현실 같지가 않다. 산만큼이나 큰 능들이 우뚝 솟아 있고 남산, 선도산, 토함산 산자락마다 유물과 유적들이 늘어서 있다. 노천박물관이다.

    돌아오는 길에 봄동 푸른 밭 언저리에서 가만히 발을 멈추고 서라벌을 본다. 저 숲으로 들어간 햇볕은 나올 줄 모르고 기다리는 사람은 없는데 저녁이 먼저 와서 반긴다. 그렇게 뒷산 같은 능 너머로 날이 저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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