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 전시·관람

국립경주박물관 ‘고운 최치원’ 그는 이 땅에서 ‘조기 유학’, ‘글로벌 인재’의 시초였다

박근닷컴 2012. 9. 24. 17:41

지난 17일 개막한 국립경주박물관의 ‘고운 최치원’ 전시장에서 관객들이 최치원의 옛 초상 영정들을 보고 있다.

국립경주박물관 ‘고운 최치원’
대학자의 실체 이야기하지만
박제화된 인식 크게 못 벗어나

그는 이 땅에서 ‘조기 유학’, ‘글로벌 인재’의 시초였다. 통일신라 말의 대학자 고운 최치원(857~?)은 12살에 당나라로 유학가 18살에 현지 과거에 장원급제하고, 당과 신라의 관리를 지낸 엘리트 지식인이었다. 그러나 그의 인생은 허무한 잠적으로 끝난다. 6두품의 신분 한계와 국정혼란, 후삼국 분열에 좌절한 고운은 가야산 해인사로 들어가 말년 스스로 존재를 감춘다.

국립경주박물관이 원효에 이어 마련한 신라역사인물 특별전2 ‘고운 최치원’(11월18일까지·054-740-7500)은 사료와 유물의 벽에 가로막혀 희미해진 통일신라 석학의 실체를 이야기하려 한다. 지난 17일 태풍이 휘몰아치는 가운데 열린 개막행사 뒤 살펴본 전시장은 시종 적막하고 단조로운 분위기였다. 일대기 행적에 따라 분류된 유물들은 대부분 고운의 일생과 지식 편력을 담은 <삼국사기>, <삼국유사>, <동문선>, <조선도교사> 같은 조선시대·구한말 문헌류들이 압도적이다. 눈에 와닿는 시각 이미지들은 그가 지은 경주 숭복사터 비석의 쌍거북이 귀부와 쌍계사와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옛 초상들, 봉암사지증대사탑비 등 네가지 불교비석명문(사산비명)의 탁본 정도가 눈에 띄었다.

우리가 명백한 사실로써 고운에 대해 알 수 있는 건 얼마 되지 않는다. 문장이 뛰어났고 유불도에 통달했으며 통일신라시대 하대의 역사상을 담은 ‘사산비명’의 문구와 고승들의 전기를 왕명 등에 따라 지었다고 하지만, 사상적 실체는 안개에 싸여 있다. 고려·조선의 후대 유학자들은 유교적 잣대로 재단해 그를 조선 유학의 뿌리로서 사당에 배향하고 받들어왔다. 근대기엔 학문적 역량과 국제감각을 발휘해 당에서 난을 일으킨 황소를 질타하는 격문을 써서 통일신라를 빛냈다는 민족주의적 헌사로 칭송되기도 했다. 이런 맥락에서 전시는 그를 후대의 관념으로 재단해온 ‘장님 코끼리 만지기’ 식의 역사 인식을 고려~구한말 옛 책들과 지금의 교과서·어린이책·기념품 따위를 통해 보여준다.

전시장에 나온 세 폭의 초상화는 후대인들이 재단한 최치원의 이미지를 드러내는 단적인 사례다. 1793년 그려진 ‘문창후 최공 진영’(경주 최씨 문중 소장)을 엑스선 촬영한 도판을 보면 원래 신선사상에 근거해 동자상이 초상 양쪽에 있었지만, 후대 모두 지워지고 문방구와 책장이 그려졌음을 알 수 있다. 역시 조선후기에 그려져 처음 공개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진영도 이를 본떠 그린 근대기 화가 채용신의 초상그림이 의자 받침 등에서 근대 원근법을 사용했다는 점과 대비되면서, 그를 바라보는 전근대·근대 관점의 차이를 보여준다. 사료들을 최대한 그러모아 최치원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의 근거를 제공하려 했다고 박물관 쪽은 설명하지만, 건조한 전시장은 ‘갓, 신 벗어두고 훌쩍 떠나 신선이 됐다’는 그와 지금 우리 사이의 멀고 먼 거리를 더욱 부각시키는 것처럼 보인다. 전시벽 한켠에 쓰여진 고운의 한시 ‘비 내리는 가을밤’이 눈에 들어왔다. “가을 바람에 애써 읊조리건만/ 세상에 알아주는 이 드물구나/ 깊은 밤 창 밖에 비는 내리는데/ 등불 앞 마음은 머나먼 고향으로.”

경주/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