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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국사 석가탑(삼층석탑)

박근닷컴 2013. 4. 2. 11:08

 

 

 

 

<불국사 석가탑, 그 영광과 수난의 1300년> 경덕왕 원년 건립, 지진·도굴 피해..국보 쏟 아내

 

(경주=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불국사 대 웅전 앞마당에 다보탑과 나란히 버틴 석가 탑(삼층석탑)은 올해로 정확한 나이가 1천 273세다.

 

그것을 세운 정확한 연대는 최근에야 밝혀 졌다. 1966년 석가탑을 해체수리할 때 발 견된 고려시대 초기의 석탑 수리 문서를 통 해 신라 경덕왕 원년(740)이라는 사실이 드러난것이다.

 

석가탑은 문화재보호법상 정확한 이름이 '경주 불국사 삼층석탑'이며, 현재 국보 제 21호다.

 

불교미술사학계에서는 이 석탑을 신라시 대 삼층석탑의 정형을 보여주는 탑으로 평 가한다.

 

2중 기단 위에 3층 탑신(塔身)을 세웠다. 기 단이나 탑신에는 이렇다 할 조각이 없어 각 종 화려한 장식을 한 인근 다보탑과는 달리 간결하고 장중한 느낌을 준다.

 

학계는 이 석탑이 전탑(벽돌탑)과 유사한 신라 초기 석탑 형식에서 발전한 것으로 평 가한다.

 

부재를 분할하지 않고 통돌을 사용한 가장 이른 예로 후대 신라 삼층석탑의 정형을 확 립한 뿌리로 평가되기도 한다. 쉽게 말해 그 이후 한반도에 태어난 삼층석탑은 모두 석가탑을 롤 모델(role model)로 삼는다 해도 과언이 아닌 기념비적인 탑이다.

 

◇ 석가탑 수난사

 

석가탑은 한동안 처음 건축 이래 단 한 번 도 큰 보수는 없었다고 알려졌다. 하지만 1966년 해체 수리 때 사리공에서 발견한 석탑 중수기(수리내역서)가 최근 판독되면 서 사정이 일변했다.

 

이를 통해 먼저 고려 현종 15년(1024) 해체 수리를 한 것으로 드러났다. 원인은 지진으 로 보인다. 이어 12년 뒤인 정종 2년(1036) 에도 지진으로 피해 보수를 했으며, 다시 2 년 뒤인 정종 4년(1038)에도 다시 지진으 로 피해를 보아 고쳐 쌓았다.

 

조선 선조 20년(1586)에는 낙뢰로 탑 꼭대 기 뾰족한 부분인 상륜부가 손상돼 떨어져 나갔다. 이때 손상한 상륜부는 1972년에야 복원하게 된다. 하지만 원래 모습을 알 수 가 없어 석가탑과 비슷한 통일신라시대 에 쌓은 실상사 삼층석탑 의 그것을 본떠 붙였 다.

 

조선 후기에는 불교에 대한 각종 압박이 심 해져 불국사가 쇠락하면서 석탑 또한 훼손 이 가속했다. 조선이 식민지로 전락할 무렵 에 촬영한 사진들을 보면 훼손이 극심하다. 그러다가 1925년 무렵에 팔방금강좌대와 주변을 정비했다.

 

석가탑은 1966년 사리공에서 사리장엄구 를 훔치려던 도굴꾼들에게 탑재 일부가 훼 손됐다. 이렇게 해서 당시 해체 수리가 결 정됐다. 하지만 이마저도 2층 옥개석을 분 리하는 과정에서 그것을 떨어뜨리는 어이 없는 사고가 발생해 사리장엄구를 수습하 는 것으로 해체수리는 끝났다.

 

그러다가 2010년 12월1일, 국립문화재연 구소가 석탑을 정기 안전 점검하던 중 기단 갑석에서 길이 1천320㎜, 간격 5㎜ 정도의 균열이 확인됐다.

 

그 원인을 분석한 결과 기단 내부를 채운 흙과 돌덩이인 적심(積心)이 유실되고, 상 부 하중의 지지점이 상실됨에 따라 일어났 다는 결과가 제출됐다.

 

이에 석탑은 2010년 12월16일 문화재위원 회에서 해체수리를 결정했으며, 지난해 9 월27일 해체수리에 착수했다.

 

◇ 1966년 해체 보수

 

현대에 들어와 석가탑의 대대적인 보수는 1966년 도굴 시도 실패에 따른 후속 조치 로 진행됐다.

 

당시 해체 보수는 10월부터 11월까지 진행 됐다. 애초 계획한 해체의 범위가 정확히 어느 정도였는지, 전면 해체였는지 확실치 는 않지만, 탑신 2층 옥개석까지 해체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옥개석을 분리해서 땅에 내려놓는 과정에 서 그만 돌이 굴러 떨어진 대형 사고가 발 생한 여파였다.

 

이런 우여곡절에서도 조사단은 2층 탑신 석에서 사리공을 찾아내고 거기에서 사리 48과와 사리장엄구를 수습했다. 세계 최고 의 목판인쇄물로 기록된 무구정광대다라 니경은 바로 이 사리공에서 발견됐다. 다라 니경과 사리장엄 관련 유물들은 국보로 지 정됐다.

 

사리공은 가로·세로 각각 41㎝에 깊이는 19㎝였다. 이곳에서는 금동제 사리외함과 공양품 등 총 40건에 달하는 유물이 발견 됐다.

 

사리를 담는 그릇인 사리기는 모두 3종이 확인됐다. 하나는 유리제 사리병으로 사리 46과를 봉안했다. 이 사리병은 은제 사리 내호, 은제 사리 외호, 금동제 사리 외함으 로 덮여 있었다.

 

두 번째는 목제 사리병으로 사리 1과를 봉 안했다. 금동제 방형 사리합으로 감쌌는데 사리공 동북쪽 모서리에서 발견됐다. 세 번 째는 은제 사리 소호로서 사리 1과를 봉안 했다. 은제 사리합으로 감싼 이 사리소호는 사리공 서북쪽 모서리에 발견됐다.

 

불교미술사학계에서는 각각 다른 양식이 라는 점에서 2차례 정도 석탑을 중수하면 서 새로 넣은 사리기로 본다.

 

해체 보수 때 발견된 묵서지편(墨書紙篇) 이라는 종이류 뭉치는 뒤늦게 그 내용이 판 독되면서 불국사와 석가탑 역사를 뒤흔들 게 된다. 2005년 무렵 당시 이를 보관 중이 던 국립중앙박물관 이 이 종이 뭉치를 하나 하나 해체한 결과 고려 초기 때 석가탑을 수리한 내용을 기록한 중수기 문서로 드러 났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석가탑의 정확한 창건 연대가 드 러나고, 석가탑은 단 한 번도 수리 보수가 없었다는 신화가 붕괴됐다.

 

이런 역사를 지닌 석가탑이 해체 수리 근 반세기 만에 다시 전면 해체 수리가 진행 중이다. 이번에는 석탑 기단까지 전부 들어 냈다가 다시 세우는 전면 해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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