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문성 [關門城]신라 성 [城]
사적 제48호. 722년(성덕왕 21) 10월 일본의 침입을 막기 위해 축성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각간(角干) 원진(元眞)의 감독 아래 3만 9,262명의 인부를 동원하여 축성했는데 둘레가 6,792보(12㎞)였다. 이 성은 산과 산을 연결하여 길게 뻗어 있으며 우박천(牛朴川)을 사이에 두고 양쪽 높은 산에 동해를 향해서 쌓았는데, 이것은 동해쪽에서 침입해오는 일본군을 감시하기 위한 것으로 여겨진다. 울산만에 상륙하는 일본군들을 이곳 관문성에서 저지하면 월성까지 쳐들어오지 못하므로 경주평야의 동북쪽, 즉 영일만 방면에서 상륙하는 일본군에 대비한 북형산성(北兄山城)과 함께 일본군 방어에 전초적인 구실을 담당했던 것이다. 성벽은 가로 40~50㎝, 세로 20~30㎝의 잘 다듬은 돌과 자연석을 이용해 정연하게 쌓아 매우 발달된 축성술을 보여준다. 반월성(半月城)의 둘레가 1,023보인 데 비해 관문성은 그 규모가 매우 커서 〈동경잡기 東京雜記〉에 따르면 후세 사람들이 만리성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지금은 성문터로 보이는 석축과 창고터, 병사지(兵舍址) 등이 남아 있을 뿐이다.
관문성지 들어가는곳
아래 내천(우박천) 기차 철도가 지나는 길 아래에서 왼편 산아래 있다
일부구간 복원
일제강점기 성을 끊고 철도를 놓아, 단절된 성터 앞에서
왜적의 침입으로부터 경주를 보호하기 위해 신라 성덕왕 21년(722)에 쌓은 산성이다.
원래 이름은 모벌군성·모벌관문이었는데, 조선시대에 관문성으로 부르게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우박천이라는 냇물을 사이에 두고 동해를 향하여 쌓았으며, 673년에 쌓은 북형산성과 함께 경주의 동쪽을 지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관문성은 경주의 다른 산성들과 다르게 산과 산을 연결하며 길게 쌓은 특수한 방식의 산성으로, 그 규모가 12㎞에 달해
신라의 만리장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현재 일부 복원되있다.
복원되지않은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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