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은사의 창건 연대에 대해서는『三國遺事』권제2 기이 제2 만파식적조(萬波息笛條)에 의하면, ‘제31대 신문왕(神文王)이 아버지 문무왕(文武王)을 위하여 동해변(東海邊)에 감은사(感恩寺)를 창건하였다.고 하였다.
아울러 분주에서는 사중기(寺中記)의 기록을 인용하였는데, ‘문무왕이 왜병을 진압하려고 사찰을 짓다가
마치지 못하고 붕어(崩御)하여 해룡(海龍)이 되었는데 그 아들 신문왕이 즉위하여 개요(開耀) 2년(682)에 공사를 마쳤다. 대개 왕이 내린 유조(遺詔)로써 뼈를 묻은 곳을 대왕암(大王岩)이라 하였고, 절의 이름을 감은사라 하였다. 뒤에 용의 현형을 본 곳을 이견대(利見臺)라고 이름 지었다’고 하였다.
신라석탑은 삼국통일과 함께 백제와 고신라(古新?)의 각각 다른 두 양식을 통합하여 새로운 양식으로 출범하게 된다.
이처럼 새로운 양식으로 집약, 정돈된 신라석탑의 시원적인 양식의 표본이 감은사지삼층석탑과 고선사지삼층석탑이다.
특히, 감은사지삼층석탑은 신라와 백제의 삼국시대 말기 석탑 양식이 하나로 집약된 새로운 양식으로 신라석탑의 규범을 이루는 시원적인 석탑이다.
건립 연대가 확실하고 고졸한 자태를 간직한 거대한 규모의 석탑으로 시대에 따라 부분적으로 다소의 변화는 있지만, 이러한 형식은 오랫동안 유지되어 신라석탑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고, 나아가서는 우리나라 석탑의 대표적인 형식으로 자리잡게 된다.
많은 부재로 구성된 가구 수법은 백제석탑과 공통되지만, 백제석탑이 목조 탑파를 충실히 모방하고 있는데 비해서 감은사지삼층석탑은 기하학적으로 계산된 비율에 의하여 짜여진 새로운 조형미를 보여주고 있다. 지붕 모양의 옥개석과 공포를 약화하여 표현한 옥개받침 그리고 기둥을 그대로 표현한 별석(別石)의 우주(隅柱), 다층(多層) 등은 목조탑파를 모방(模倣)한 흔적을 곳곳에서 볼 수 있어서 목탑에서 번안(飜案)을 알 수 있다.
동서삼층탑은 건립 연대가 확실하고 고졸한 자태를 간직한 거대한 규모의 석탑으로 시대에 따라 부분적으로 다소의 변화는 있지만, 이러한 형식은 신라석탑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고, 나아가서는 우리나라 석탑의 대표적인 형식으로 자리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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