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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상주지역

박근닷컴 2015. 6. 2. 16:05

1)    退齊 권찰도 및 파조 검교대장군(檢校大將軍) 권척(權倜) 墓

 

               위치  :  상주시 공검면 율곡2리(능골))

본관 안동(安東), 호 퇴제(退齊) 안동권씨 10세손 검교대장군(檢校大將軍) 권척(權倜)을 파조로 하는 검교공파, 조선 연산군때 대사헌을 지냄.

 

퇴제선생묘는 잉어명당으로 유명한데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무학이라는 지관이 현재의  잉어명당 자리를 가리키며 무덤을 두자이상 파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그러나 퇴제의 자손들은 지관의 당부를 무시하고 깊이 파내려갔는데, 석자쯤 팟을 때 갑자기 큰 잉어한마리가 부쑥 튀어나와서 앞에 있는 연못에 들어가 버렸다.

놀란 자손들이 지관의 말을 듣지않은 것을 후회하고 이미 잉어가 튀어나갔기 때문에 명당으로서의 가치가 상실된줄 알았지만 퇴제의 아들은 후에 호조판서까지 지냈고 손자는 이조 판서의 벼슬에 올랐으며 손녀는 중종의 며느리가 되었고 그후 8대손까지 줄곧 높은 관직에 올랐다고 한다.


2)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선생墓

 

                       위치   :  상주시 공검면 부곡리 ( 묘소와 신도비)

정경세(1563~1633) 는  본관 진주(晉州). 자 경임(景任). 호 우복(愚伏)·일묵(一默)·하거(荷渠). 초시(初諡) 문숙(文肅). 개시(改諡) 문장(文莊). 경상북도 상주(尙州)에서 출생하였다.

 

유성룡(柳成龍)의 문인이다. 1582년(선조 15) 진사를 거쳐 1586년 알성(謁聖)문과에 급제, 승문원 부정자(副正字)로 등용된 뒤 검열·봉교(奉敎)를 거쳐 1589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워 수찬(修撰)이 되고 정언·교리·정랑·사간(司諫)에 이어 1598년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 광해군 때 정인홍(鄭仁弘)과 반목 끝에 삭직(削職)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부제학에 발탁되고, 전라도관찰사·대사헌을 거쳐 1629년 이조판서 겸 대제학에 이르렀다. 이듬해 겸 춘추관지사로서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편찬을 담당하였다. 성리학에 밝았고 이기설(理氣說)에서 이황(李混)의 학설에 반대, 이이(李珥)에 동조하였으며 특히 예론(禮論)에 밝아서 김장생(金長生) 등과 함께 예학파(禮學派)로 불렸다.

 

시문(詩文)과 서예에도 뛰어났다. 찬성(贊成)에 추증되고 상주의 도남서원(道南書院), 대구의 연경서원(硏經書院), 강릉의 퇴곡서원(退谷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우복집(愚伏集)》《상례참고(喪體參考)》《주문작해(朱文酌解)》 등이 있다.

 

3)   정기룡(鄭起龍) 將軍 墓

 

              위치  :  상주 사벌면 금흔리

정기룡(鄭起龍)  (1562∼1622)은 조선 명종에서 광해군 때의 무신이며 곤양 정씨의 시조이다.

본래 이름은 무수였으나 1586년 무과에 급제한 뒤 왕명에 따라 '기룡'으로 이름을 고쳤다. 1590년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신립의 휘하에 들어갔다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별장으로 승진하여 경상우도 방어사 조경의 휘하에서 종군하였다.

 

거창싸움에서 왜군 500여명을 격파하고 錦山싸움에서 포로로 된 조경을 구출한 뒤 곤양 수성장이 되어 왜군의 호남 진출을 막았다. 상주목사 김해(金?)의 요청으로 상주판관이 되어 왜군과 대치, 격전 끝에 상주성을 탈환하였다. 1593년 전쟁의 공으로 회령부사에 승진되고 이듬해 상주목사가 되어 통정대부에 올랐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토왜대장(討倭大將)이 되어 고령에서 왜군을 대파하고 적장을 생포하는 한편 파죽지세로 진격, 성주, 합천, 초계, 의령 등을 탈환하고 절충장군으로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에 승진하여 경주, 울산을 수복하였다.

 

1598년 명나라 군대의 총병(총兵)직을 대행하여 경상도 방면에 있던 왜적의 잔적을 소탕하고 용양위 부호군이 되고 이듬해 다시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재임되었다.

 

1601년 임진왜란이 끝난 뒤 다시 경상도 방어사가 되어 다시 침입하여 올지 모르는 왜군에 대치하였고, 다음해 김해부사, 밀양부사, 중도(中道)방어사를 역임하였다. 그 뒤 용양위 부호군 겸 오위도 총부총관,경상좌도 병마절도사 겸 울산부사가 되었다.

1610년(광해군2) 상호군에 승진하고 그 뒤 보국숭록대부로서 삼도수군통제사 겸 경상우도 수군절도사의 직을 맡다가 1922년 통영 진중에서 순직하였다. 상주 충렬사에 제향되었고 시호는 충의(忠毅)이다.

 

4)    사벌국 왕릉(沙伐國 王陵)

 

             위치  :  상주 사벌면 금흔리

 

5)    개암 김우굉(開巖 金宇宏) 묘

 

                 위치  :  상주시 중동면 회상리 매골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인 金宇宏(1524~1590)의 본관은  의성이다.  자는 敬夫, 호는 開岩이다. 경상북도 星州 출신이다. 아버지는 府使 希參이며, 어머니는  郭氏이다.

 

李滉의 문인으로 19세때인 1542년(중종37) 鄕試에 수석으로 합격하고,  1552년 (명종7) 進士試에도 수석으로 합격하였다. 1565년 경상도 유생을 대표하여  여덟차례에  걸쳐 普雨의 주살을 상소하였다. 年譜에도 이에 관한 자세한 내용이 실려있다. 

 

이듬해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이  되었다.  注書·待敎·奉敎·典籍  예조와  병조좌랑·정랑, 知製敎·正言·獻納 등 여러 관직을 두루 지내다가 1573년(선조6)  부수찬, 1578년 司僕寺正을 거쳐 동부승지·대사간·대사성 등을 지내고  이듬해  병조참의·승지에 이르렀으나 李銖의 옥사로 파직되었다.

 

1582년 충청도  관찰사가  되었다가 형조참의·장례원판결사·홍문관 부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유생 朴濟로부터  음흉하다는 탄핵을 받아 외직으로 물러나 靑松府使·光州牧使 등을 지냈다.

 

 1589년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인 星州로 돌아갔다. 그 해에 동생 宇 이 정여립의  옥사에  연좌되어 안동의 임지에서 회령으로 귀양가게 되었는데, 그는 영천으로 달려가 동생을  만나  갓과 옷을 벗어주고 시 한수를 지어주며 이별하였다 한다.

대사간으로 있을 때  사사로이 獄訟을 결정한 형조판서를 당당히 탄핵하여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1644년(인조22) 李埈이 撰한 碣石을 세웠으며, 1730년(영조6)에 상주 速水書院에 배향되었다. 

                                                                                                            

출처 : 상주지역
글쓴이 : 공 덕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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