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금관총 재발굴서 목조구조물 확인
기능은 미상, 황남대총 이어 두 번째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경주 금관총을 재발굴한 결과 무덤을 축조하는 과정에서 나무를 엮어 만든 구조물인 목가구 흔적이 확인됐다.
고신라시대 왕족을 비롯한 최고 지배층 무덤인 적석목곽분(돌무지덧널무덤)에서 이런 목가구가 출현하기는 인근 대릉원 지역 황남대총에 이어 두 번째다.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경주박물관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박물관 자료 공개 사업 중 하나로 지난 2월23일 이래 금관총을 발굴조사한 결과 이 무덤은 5세기 말~6세기 초에 만들어졌으며 왕을 비롯한 당시 신라 최고위급 인물이 묻힌 거대 봉분 갖춤 지상식 돌무지 나무덧널 무덤(적석목곽묘·積石木槨墓)임을 확인했다고 23일 밝혔다.
1921년 조선총독부에 의한 조사 당시 이미 봉분 상당 부분이 없어진 금관총은 이번 조사 결과 경주분지 일대 다른 적석목곽분과 마찬가지로 망자와 부장품을 지하에 묻지 않고, 지상에 나무덧널(木槨)을 만들어 놓고 그 주변으로 망자와 부장품을 넣는 장례를 치른 다음에 나무덧널 위와 사방 주위를 큰 강돌로 두껍게 쌓은 것으로 드러났다.
이런 구조로 드러난 신라시대 지상식 돌무지 나무덧널 무덤으로는 서봉총, 황남대총, 천마총 등이 있다.
이번 조사에서 박물관은 돌무지 구조가 공중에서 내려다본 평면 기준으로 모서리 각을 죽인, 한 변 20m 안팎의 방형임을 확인했다.
나아가 돌무지를 쌓기 전에 나무를 이용해 기둥을 세우고 가로로 다시 나무를 연결해 마치 바둑판 모양 목조가구를 설치한 흔적도 발견했다.
목가구 흔적은 봉토 서쪽 적석부 사면에서 드러났다. 이곳에서는 세로로 세운 나무기둥 구멍이 분명히 확인됐으며 경사면을 따라 버팀목 흔적과 나무기둥과 나무기둥을 가로로 연결한 횡가목 흔적이 아울러 발견됐다.
현재까지 적석부 사면에서 나무기둥은 3열이 확인됐다. 기둥 간격은 1.2m 정도였다.
조사단은 이 목가구 흔적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갈수록 높이가 낮아지며, 적석부 최하단에서는 나무기둥은 확인되지 않고 일부 구간에서 버팀목 기둥 구멍만 확인됐다"면서 "또 적석부 북쪽 바깥을 따라 버팀목 기둥 구멍이 확인되고 적석부 사면에도 버팀목 기둥 홈이 발견됐다"고 전했다.
무덤에서 이런 목조가구 시설은 황남대총에서 확인된 바 있지만 목조가구를 짜고 그 안에 돌무지를 축조해 가는 과정을 차례로 복원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한 발짝 진전된 조사 결과를 도출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고 조사단은 자평했다.
이런 목가구는 무덤 축조를 하는 과정에서 설치한 비계 정도로 이해하곤 했지만, 차순철 동국문화재연구원 조사실장이 매장 전까지 시신을 안치하는 임시시설인 빈전의 흔적이라는 파격적인 주장을 제기한 이래 그 기능을 둘러싸고 초미의 관심이 되고 있다.
목가구의 정확한 기능은 추후 다른 곳의 발굴성과 등을 기다려야 할 것으로 전망된다.
또한 이번 조사에서는 돌무지 단면 형태가 50도 정도 경사의 사다리꼴 형태임을 밝혀냈다.
더불어 망자와 부장품이 있던 나무덧널에 대한 새로운 해석 발판도 마련했다고 조사단은 덧붙였다.
1921년 9월, 이곳을 조사한 일본학자들은 덧널이 하나인 단곽식이며, 크기는 길이 4.8m, 너비 2.1m 정도라고 했다.
하지만 이번 발굴에서 나무덧널 아래 깔린 자갈층 범위가 길이 5.7m, 너비 3.0m 정도로 드러나 나무덧널은 이보다 더 큰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덧널 숫자도 과거 보고서 내용 재검토와 발굴 성과를 고려한 결과 2개, 즉 이중곽일 수도 있음을 추정할 수 있었다고 조사단은 덧붙였다.
이번 조사에서는 일제강점기에 이미 유물을 대부분 수습한 까닭에 이렇다 할 유물은 거의 발견하지 못했다.
다만 나무덧널 주변 흙을 물 체질한 결과 유리그릇, 은제 허리띠 장식, 유리구슬, 금실, 달개 장식이 달린 금실과 같은 부장품 파편을 찾았다.
이 중에서도 고대사회에서는 황금에 버금가는 귀중한 재료로 평가된 유리그릇 파편이 주목을 끈다. 이는 코발트색 유리그릇 조각으로 일제시대 보고서에 없는 제품으로 드러났다.
이런 유리그릇 파편은 김해 대성동 고분군에서도 출토된 적이 있다.
나아가 은제 허리띠 장식도 일부 발견됐다.
한편 금관총은 이미 봉분 파괴가 극심해 그 크기를 짐작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봉분 주변 두름돌인 호석(護石) 흔적이 거의 없어져 정확한 크기를 가늠하기는 힘들었다고 조사단은 전했다.
그런 가운데 돌무지 경계인 적석부 남쪽 끝과 북쪽 끝은 최대 길이는 20.7m로 측정됐다.
조사단 김대환 학예연구사는 "봉분은 아마도 40m가 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고 말했다.
봉본 기준으로 천마총이 지름 47m여서 금관총은 규모가 거의 천마총에 맞먹는 것으로 보인다.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taeshik@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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