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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신라가 배척하고 경주도 외면한 ‘고운 최치원’ - 박임관 - 경주신문

박근닷컴 2015. 6. 27. 00:18
신라가 배척하고 경주도 외면한 ‘고운 최치원’
경주신문 기자 / gjnews21@hanmail.net1192호입력 : 2015년 05월 21일(목)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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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임관 원장 경주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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掛席浮滄海(괘석부창해) 돛달아 바다에 배 띄우니/ 長風萬里通(장풍만리통) 긴 바람 만리에 나아가네/ 乘槎思漢使(승사사한사) 뗏목 탔던 한나라 사신 생각나고/ 採藥憶秦童(채약억진동) 불사약 찾던 진나라 아이들도 생각나네/ 日月無何外(일월무하외) 해와 달은 허공 밖에 있고/ 乾坤太極中(건곤태극중) 하늘과 땅은 태극 중에 있네/ 蓬萊看咫尺(봉래간지척) 봉래산이 지척에 보이니/ 吾且訪仙翁(오차방선옹) 나 또 신선을 찾겠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2013년 6월에 열린 한중 정상회담 환영사에서 인용한 고운 최치원 선생의 ‘범해(泛海)’라는 시이다. 시주석은 1년 뒤 서울대학 강연에서 또 최치원 선생을 언급하였고, 금년 1월 ‘2015 중국방문의 해’ 개막식 축하메시지에 다시 고운 선생의 시 ‘호중별천(壺中別天)’을 인용하며 한국과 중국 교류의 상징인물로 부각시켰다. 문창후(文昌侯)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선생은 누구인가? 

최치원 선생은 경주 황룡사 남쪽에 있는 미탄사 남에 생가가 있었다고 삼국유사에 전한다. 선생은 857년에 태어나 12세(868. 경문왕 8) 때 당나라로 조기 유학을 떠났다. 초등학교 5학년 격인 어린 아이가 배를 타고 서해를 건너 걷고 걸어서 말도 통하지 않는 당나라 장안(중국 시안)까지 공부하러 갔다는 것은 지금도 감히 상상할 수 없는 모험이었다. 

이 때 선생의 아버지는 “10년 안에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면 돌아오지 마라”는 말을 남겼다. 유학간지 6년만인 18세에 빈공진사에 급제하고 24세(881. 헌강왕 7)에 ‘격황소서(檄黃巢書, 토황소격문)’를 지어 일약 스타가 되었다. 황소가 이 격문을 읽다가 놀라서 침상에서 굴러 떨어 졌다는 일화가 보여 주듯 명문장이었다. 

“천하의 사람들이 모두 너를 죽이려고 할 뿐만 아니라 땅 속의 귀신까지도 너를 죽이려고 은밀히 의논하였다” 이 격문을 계기로 당 희종(僖宗) 황제로부터 정오품이상에게 하사하는 ‘자금어대’를 받고 양주 목사에 임명되었다. 

당나라 관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28세에 신라로 귀국하여 외교문서를 담당하는 한림학사라는 중앙 관료에 발탁되었으나 잠시 뿐이었다. 당시 최고의 지성인이요 국제통이며 민족사상가이자 철학자인 선생의 큰 그릇을 감당하기에는 신라는 역부족이었다. 

국정문란으로 쇠약해져 가는 국운과 골품제의 한계라는 벽, 그리고 국내파 집권세력의 배척과 외면에 의해 귀양 가다시피 지방 태수로 내몰리게 되었다. 894년에 진성여왕에게 개혁의 돌파구를 담은 ‘시무10조’를 올려 왕은 가납하였으나 골품제와 왕권 약화로 결국 뜻을 펴지 못했다. 

신라의 주도세력으로부터 시기와 질투를 받고 철저하게 외면당한 최치원 선생은 40대에 관직을 내 놓고 전국을 떠돌며 유랑의 길, 풍류의 생활을 하다가 가야산 해인사에서 여생을 마치니 돌아가신 때를 알지 못한다. 그 후 고려 현종에 의해 문창후(文昌侯)에 봉해졌다. 

9~10세기 최고의 지성인이었던 최치원 선생은 신라가 그랬듯이 고향 경주마저 지금까지 외면하다시피 했다. 전국 각지에 망라된 선생과 관련된 유적지만 보아도 그러하다. 경주에는 있는 둥 마는 둥 남산 북쪽 자락의 상서장과 낭산 서쪽 자락의 독서당은 찾는 이 없이 초라하기만 하다. 

경주에서 고운 선생의 흔적을 더 찾아보려고 하여도 숭복사 터의 비문과 서악서원 위패, 소벌도리공기적비 정도가 고작이다. 이에 반하여 전국에는 무려 80개여 소의 관련 유적과 전설지가 있으며, 영정을 봉안한 곳도 12개소가 넘는다. 우리 역사상 이렇게 많은 곳에서 족적을 기리고 영정을 모셔온 인물이 과연 있었던가?. 

경주가 이러고 있는 사이에 중국은 발 빠르게 이방인이었던 최치원 선생을 기리고 나섰다. 강소성 양조우시(揚州市)에서는 한중 수교 15주년이던 2007년 당성(唐城) 유적지에 최치원 기념관을 세우고 심지어 10월 15일을 ‘최치원의 날’로 정하여 매년 기념하고 있다.

이곳은 중국에서 가장 완전하게 보존된 당나라 시대의 유적으로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에 지정되어 사실상 건축물을 지을 수 없다. 그럼에도 그들은 파격을 보여 성벽 안에 거대한 기념관을 건립하여 동상(흉상)을 안치하고 영정이며 관련 자료를 전시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은 최지원 선생이 도통순관이라는 직책으로 4년간 근무했던 이곳을 기리기 위해 중국 외교부가 비준하여 최초의 외국인 명인기념관을 건립한 것이다. 최치원 선생이 당시에 거닐던 길은 ‘최치원경행처’라 이름 붙여 기념하고 있다. 

양조우에서 대운하를 따라 뱃길로 2시간 거리에 있는 리수이현은 고운 선생이 관리로서 처음으로 부임한 곳이며 여기에도 동산을 건립하여 기리고 있다. 이 해에 중국 전인민대회장에서는 바다를 건너 온 신라 학자에 대한 우호적 아름다운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동국유종 최치원’을 상영하기도 했다. 

유불선을 넘나든 고운 선생의 영향과 흠모는 전국에 뿌리내린 유적과 전설에서도 알 수 있겠지만 각 지역마다 최치원 선생의 이름을 딴 기념사업회, 역사공원, 유적지 정비, 도서관 운영, 현창 행사, 문화축제, 학술대회, 음악회, 휘호대회 등을 앞다투어 진행하고 있다. 지난해 서울 예술의 전당 서예박물관에서는 ‘최치원-풍류탄생’ 특별전까지 열었다. 

뒤늦게나마 경주시에서도 ‘2015년 지역특화 문화콘텐츠 개발사업’(한국콘텐츠진흥원)에 ‘최치원과 신라오기(新羅五技)’를 신청하여 선정되었다니 무척 반길 일이다. 또 국내외 최치원 선생 관련 유적도 조사한다니 이제야 선생의 이름 앞에 면목이 서는 경주가 되는 듯하다. 

한걸음 더 나아가 선생의 고향답게 생가도 복원하고 학술적인 뒷받침을 하는 세미나도 필요할 것이다. 선생이 책을 읽던 독서당에는 주차장도 만들고 주변 공원을 만들어 생가와 이어지게 하고 임금께 시무10조를 올렸던 상서장까지 연계되도록 문화 콘텐츠화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울러 앞으로는 실크로드에 가려져 미처 살피지 못했던 신라-당나라 간의 왕래 길도 찾았으면 한다. 또 신라 승려들이 사막을 건너 머나먼 천축국(인도)까지 구법을 찾아 떠났던 불교의 길, 배를 타고 해양으로 드나들었던 바닷길까지 차근차근 챙겨 나간다면 신라 천년 왕국의 찬란했던 빛은 오늘날 경주에서 큰 결실을 이루리라 믿는다.

출처 : 경주학연구원 慶州學硏究院
글쓴이 : 마립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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