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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名筆 집안

박근닷컴 2015. 9. 29. 00:23

[조용헌 살롱]  名筆 집안

신언서판(身言書判) 가운데 왜 서(書)를 보는 것인가? 서예는 수십년간 연마해야 한다. 오랜 시간의 끈기와 집중력을 요구한다. 벼루를 4~5개씩 구멍 뚫어야 한다. 글씨를 쓰다 보면 성현들이 남긴 경전과 석학들의 저술들을 공부할 수밖에 없다. 명필이 되려면 자기만의 독창성과 창의성이 있어야 한다. 글씨에는 이처럼 한 인간이 투입한 적공(積功), 학문적 깊이와 인품, 창의력이 모두 들어가 있으므로, 한자 문화권에서 명필가(名筆家)를 존중하는 전통이 내려오는 것이다.

경주 안강의 명필 집안이 정사부(鄭師傅) 집안이다. 정사부는 쌍봉(雙峯) 정극후(鄭克後·1577~1658)를 가리킨다. 그는 효종이 대군 시절일 때 사부를 지내 주변에서 이 집안을 정사부 집안이라고 일컫게 되었다. 정사부는 학덕과 인품이 뛰어났지만 글씨도 명필이었다. 그 후손들 가운데 계속 명필이 배출됐다. 정극후의 손자인 사하당(四何堂) 정연(鄭沇), 정연의 아들 매헌(梅軒) 정욱(鄭煜), 정욱의 아들 노우(魯宇) 정충필(鄭忠弼), 정충필의 아우 남와(南窩) 정동필(鄭東弼)이다. 정충필의 남아 있는 글씨는 양동마을 '旌忠閣(정충각)'과 골짜기 바위에 새긴 '光影臺(광영대)'이고, 정동필의 글씨는 여강이씨 서당인 '良佐書堂(양좌서당)' 현판 글씨다(조철제 '또 다른 경주를 만나다').

정사부 집안 후손이 정종섭(58) 행정자치부 장관이다. 몇 달 전 범어사 주지인 수불(修弗) 선사를 만나러 갔다가 우연히 그 자리에서 정 장관이 직접 쓴 '祖師殿(조사전)' 현판 글씨와 주련 글씨들을 처음 보게 됐다. 조선 선비의 빳빳함이 있으면서도 어눌한 소박함도 담겨 있고, 은근한 풍류도 느껴지는 글씨였다. 알고 보니 정종섭은 대구 비슬산 대견사의 현판인 '大見寶宮(대견보궁)', 동화사의 '靑虛堂(청허당)', 강화도 전등사의 '無說殿(무설전)'도 썼다. 5세 때부터 '정몽유어(正蒙類語)'를 보면서 글씨를 익혔다고 한다. 명산대찰의 현판 글씨는 아무나 쓰는 게 아니다. 그는 동양 삼교에 해박하다. 장자(莊子)의 좌망(坐忘), 선불교 임제, 조주 선사의 어록, 논어의 '학이편'을 좋아한다. 정 장관의 글씨를 보면서 한국의 선비집안 전통이 다 끊어진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선일보 / 조용헌

출처 : 경주학연구원 慶州學硏究院
글쓴이 : 菊英堂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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