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강재
파평 윤씨 시조인 태사공 윤신달(893∼973)의 묘를 관리하기 위해 세운 재실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학문과 무예에 뛰어났고 장성한 뒤에는 고려 왕건을 도와 고려를 건국하고
나라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이 건물은 영조 28년(1752) 그의 28대손인 윤광소가 안동부사로 재임할 때 세운 것으로,
10년 뒤인 영조 38년(1762) 26대손인 윤동도가 경상감사로 있으면서 보수하고 안동부사였던
유성대가 땅을 넓히고 고쳐 지었다.
앞면 6칸·옆면 4칸 규모의 건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전체적으로 ㄱ자형 평면구조로 나무를 다듬고 짜 맞춘 기법이 우수하며 조선 중기의 건축 양식이 잘 나타나 있다.
태사공분암 편액
봉루암
봉강재
1. 봉강재
봉강재는 경북 포항시 기계면 봉계리 운주산 구봉하에 있는 시조
태사공 할아버지의 묘소와 별묘를 모신 영역을 통칭하여 말한다.
2. 봉강재의 연혁
시조공의 묘소는 이 지방의 토호 이하지가 석물들을 없애고 투장하여 일시 실전 되었습니다. 후손들은 옛날부터 전해오는 문헌과 그 지방 노인들의 입으로 전해지는 윤능골 이라는 이야기를 근거로 묘소의 위치를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24세손 이공이 경주부윤 재임시 백방으로 수소문하며 찾기를 힘썼으나 단서를 잡지 못하고 , 영조 13년에 25세손 봉정공이 경주 영장으로 부임하여 묘소 부근을 파헤쳐 "대 부 윤"이라 크게 새긴 부서진 비석 조각을 발견하여 모든 종인들에게 알리니 시조 할아버지의 묘소를 찾을수 있는 희망이 생겼다며 모두 기뻐하였습니다. 그 후 2년이 지나 1793년에 이공의 아드님이신 양래공이 경상감사로 부임한 후 7일간에 걸쳐 주위를 파헤쳐 "선지", "금강"이라 새긴 비석 조각을 발견 하였는데 "선지"는 태사공 할아버지의 아드님 휘자며, "금강"은 태사공 할아버지 손자의 휘자 이므로 태사공 할아버지의 묘소가 틀림 없음을 확인하고 지방의 토호인 이하지가 투장하였던 6기의 묘소를 전부 파서 이장 시켰습니다.
그 다음 해에 판서 혜교공, 감사 양래공, 부사 동설공, 승지 휘정공, 현령 사도공, 참판 용공등 여러 후손이 상의하여 널리 종문에 통고하고 태사공의 묘소를 개축하고 묘비등 기타 석물을 두루 갖추고 제사답을 마련하여 매년 음력 10월10일에 제사를 봉행 하기로 결정 하였다 합니다.
그러나 현재는 1982년 1월12일 대종회 결의에 따라 매년 음력 10월1일에 추향제를 봉행하고 있습니다.
서기 1752년 27세손 지돈령이신 광소공이 안동 부사로 부임하셔서 영정을 모시고 분향 할 수 있는 분암(봉서암)과 제실을 창건하고 제기 일체와 위토를 많이 확보하여 승려로 하여금 묘역을 지키게 하였습니다. 서기 1833년 재실 뒤에 봉강서원을 창건하여 태사공의 위패를 모시고 봄과 가을에 제사를 드렸으나 35년후인 186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하여 철폐되고 그 자리에 유허비를 세웠으며 재실뒤에 별묘를 새로 짖고 태사공의 위패를 옮겨 모시고 현재까지 봄, 가을로 제사를 모시고 있습니다.
봉서암은 봉강서원 창건당시 폐사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자세한 기록은 없습니다.
1935년 재실이 심히 퇴락되어 당시 봉강재 도유사인 31세손 석훈씨의 노력으로 대구 경보씨(남선직물 사장), 청송 용구씨(전 민의원), 부산 소득씨, 영해 경목씨 등 후손들의 거액의 성금과 기타 전국 각 종문의 성금으로 크게 보수 및 개축,증축을하였습니다. 근래에는 1973년 봉강재 종회장에 취임하신 두상씨(부산문화관광사장)의 주관으로 봉강재 입구의 차도 확장과 재실 일부를 보수 하였고, 32세 귀보씨 성금으로 태사공 할아버지 묘소 아래 신도비를 건립 했습니다.
1996년 봉강재 종회장 태균씨가 입구 주차장에 대형 신도비를 건립 하였습니다.
3. 태사공 할아버지께서는 경기도 파주군 용연에서 탄강 하셨는데, 장지가 고향이 아닌 현재의 포항시 기계면 봉계리 입니다. 풍수적인 문제인지, 그때 당시의 정치적인 문제인지, 일신상의 문제인지는 현재로서는 밝혀진 자료가 전혀 없습니다.
파평 윤문의 시조 할아버지는 후 삼국을 통일한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고려 개국2등 공신인 벽상삼한익찬공신이 되셨고, 삼공의 하나인 삼중대광태사란 벼슬을 하셨습니다.
고려 태조 왕건이 죽고, 고려 2대왕 혜종이 즉위하여 고려 왕권의 가장 큰 위협의 하나로 남아있던 통일 신라의 도읍지인 동경(경주) 대도독으로 52세에 부임 하시어 81세로 서거 하실 때 까지 재임 하셨습니다.
왕족들이 다스리는 도독부의 대도독으로 재임하시는 동안 사기에는 단 한건의 민란이 없었다는 것과, 재임 기간이 30년이나 되었던 것으로 봐서는 고려 왕실의 할아버지에 대한 신임도와 그 뛰어난 목민관으로서의 통치술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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