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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양동의 역사

박근닷컴 2011. 10. 15. 22:32

※ 양동마을

우리나라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전통마을이다.

하회마을, 낙안읍성, 제주성읍, 산청남사마을, 달성 남평문씨 세거지, 밀양교동마을, 송악 외암마을, 고성왕곡마을등 언뜻 떠오르는

전통마을이 많지만 관광지로 또는 세트화되거나 역사가 얕아서 등등 양동마을에 비할바가 못된다.

양동은 과거의 기본을 잃지 않은채 꾸준히 시간을 중첩시켜온 소중한 전통마을인 것이다.

 


1.양동의 역사

류복하는 려말선초의 부호로 무남독녀를 청송에 살던 손소에게 시집보내어 손소가 양동마을로 들어오면서 본격적인 역사가 시작된다.

( 조선초에는 장남이 처가에가서 생활하고, 재산을 딸에게도 균등하게 분배하는 습관이 있었음)

손소는 과게에 급제하고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공로로 2등공신에 오른다. 손소는 5남 1녀를 두었는데 첫째는 장가를 가서 처가로 가버렸고

둘째가 상속자가 되는데 이가 ‘우재 손중돈’이다.  우재는 김종직의 제자로 영남 성리학계의 태두로 추앙받아며

최고벼슬을 역임하며 조선 18현에 배향되는 분이다. 손소의 외동딸에게는 ‘이번’이 장가들어 역시 처가 살이를

하게되는데 이번은 세 아들을 두고 일찍 사망하여 아들들은 양동의 외가에서 성장하게 된다. 그 둘째가 바로 ‘회재 이언적’이다.

이때부터 월성손씨와 여강 이씨의 야성씨족마을을 형성하였다.

 

2. 양동의 특성

- 양성씨족 마을인 양동은 두 가문이 때로는 협력하고, 때로는 경쟁을 하면서 훌륭한 인물을 많이 배출하였으며, 건축물 또한 30년주기(1세대)로

서로 경쟁하며 지어진다.

종가도 두 개, 공용정자도 두 개, 서당도 두 개, 서원도 두 개. 종가는 앞서의 서백당(書百堂)과 무첨당(無添堂). 정자는 손씨가의 수운정(水雲亭)과

이씨의 심수정(心水亭), 서당까지도 두 가문은 같은 곳을 쓰지 않았다.

손씨가의 아이들은 안락정(安樂亭)에서 배웠고, 이씨 아이들은 강학당(講學堂)에서 배웠다. 심지어는 서원까지 다르다.

이씨가에서 옥산서원을 세워 이언적을 모신 것에 자극 받은 손씨가는 따로 동강서원(東江書院)을 세워서 손중돈을 배향했다. 

정자, 서당, 서원등 모든 건축물이 마을내에 2개씩 쌍으로 존재한다.

 

- 산 구릉위에 양반가옥이 위치하고, 산밑 골짜기에는 초가집이 위치하며 상하계층의 위계가 지리적 위아래로도 나타난다.

이 초가집들은 대부분 외거노비의 거처인 가랍집이다.

- 마을 전체가 말물(勿)자 형태의 명당터에 형성되었는데, 특히 월성손씨 대종가인 서백당터는 “삼현선지지”라하여 3명의 위인이 나오는 길지이다.

손중돈과 이언적이 나왔고 현재 1명이 더 남았는데 외손대에서 나오자, 딸이 시집가서 출산하러오면 돌려보낸다고 한다.

 

- 보물3점을 포함하여 중요민속자료 12점, 지방자치단체 지정 12점을 포함 규모나 수준에

있어서 최고의 전통주거 문화유산이다.

 

≪서백당(書百堂)≫ 

  위치 : 경북 월성군 강동면 양동리

  건립연대 : 1458년 건립

  문화재 지정 : 중요민속자료 23호

 

월성 손씨의 대종가로 사랑채에 걸려 있는 집이름(堂號)은 '서백당'과 '송첨'이다. 송첨은 '소나무 처마'라는 뜻으로

사랑 앞마당의 크고 멋진 노향나무에서 유래한 이름이다.일명 ‘손동만씨 가옥’이라 한다. 

손중돈이 관가정으로 분가하면서 400여 년간 대종가의 지위는 관가정으로 옮겨갔다가,

20세기 전반부 다시 이 집으로 종손이 이주하면서 대종가의 지위를 찾았다.

 '서백당'이라는 현판은 원래 관가정 사랑채에 걸려 있던 것으로, 참을 '인(忍)'자를 백 번이나 써서 종손으로 인내를 기르라는 가르침을 의미한다.

 우리나라에서 아산의 최영장군 생가인 ‘맹씨행단’ 다음으로 강릉의 오죽헌과 함께 최고 오래된 주택이다.


㈎ 입지

  마을 '안골' 깊숙한 곳, 높은 산등성이에 성주봉을 안산으로 잡았다.

서백당의 터는 '3명의 큰 인물이 태어날 곳(三賢先生之地)'이라는 풍수적 설화가 전한다. 손

㈏ 배치 및 평면

 ㅁ자형 살림집과 그 앞의 긴 행랑채, 사당채의 3영역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대종가답지 않게 매우 소박한 느낌이다.

ㅡ자형 행랑채는 대문채를 겸하며 솟을대문이 아닌 평대문으로 되어 있어 조선초기 양식임을 알수 있다.

대문앞 변소와 안채 서쪽의 방아실채는 원래부터 있었던 것이다. 사랑대청은 묘하게도 ㅁ자형 살림채의 남서쪽 모퉁이에 두었는데

마을의 안산인 성주봉이 집의 남서쪽에 있기 때문에 남서 모퉁이를 개방한 것이다.

본채의 영역에 사랑영역이 소재해 있는 모습은 내․외가 분리되기 전인 조선초기를 보여준다.

지붕은 홑처마이고, 도리가 3개인 3량식에 모양또한 굴도리(둥근)가 아닌 납도리(장방형)로 전체적으로 소박하고 단아한 느낌을 준다.


 

㈐ 사당의 강조

서백당 대문을 들어서면 안채가 아닌 사당영역으로 공간의 흡입력을 지닌다.

몇 개로 접혀들어간 입체적 마당의 기단들로 사당의 위엄을 표시하며,

사랑영역과 안채의 영역은 작은 ‘내외담’을 두어 시각적으로 차단하며 공간을 분활한다. 잘 생긴 향나무가 줄기를 틀고

그 위 계단식 정원 위로 사당문이 보이는 아름다운 마당을 통해 사당은 직접적으로 보이지 않지만, 암시와 유도만으로도 이 집의 중심이

그 안에 있으리라는 것을 느끼게 한다. 보이지 않는 핵심, 의식하지 못할 교묘한 유도법, 고도로 절제된 공간요소들 한차원 높은 수법으로

사당의 격을 높이고 있다.

 

<< 무첨당(無 堂) >> 

  위치 : 경북 월성군 강동면 양동리

  건립연대 : 1500년대 건립

  문화재 지정 : 보물 411호

 

 무첨당은 동쪽에 살림채, 서쪽에 별당인 무첨당, 그리고 그 사이 높은 곳의 사당영역으로 이루어졌다.

이언적의 아버지 이번이 양동에 장가들어 어느 정도 기반을 잡은 후인 1508년에 살림채를 건립했고

이언적이 경상감사 시절인 1540년경에 별당을 건립했다. 말하자면 이언적의 본가가 되며

 여강이씨 무첨당파의 파종가로서, 또 여러 분파들의 맏집인 대종가로서 역할을 해왔다.


 ㈎ 입지와 배치

성주산을 안대로하여 사당을 높은 축대 위에 조성하였다. 무첨당의 의도는 매우 직설적이다.

서백당가는 대조를 이룬다. 대지의 중앙, 가장 높은 곳에 사당영역을 마련하고, 살림채와 큰사랑채 사이에 직선의 가파른 계단을 설치해

사당이 이 집의 중심임을 강조한다. 후에 일족의 서당인 강학당(講學堂)과 가문 정자인 심수정(心水亭)은 무첨당 사당을 안대로 삼아 건립되었다.




㈏ 평면

 건물들 사이에 적절한 외부공간이 만들어지지 못하여 어색한 관계를 형성한다.

단지 살림채의 사랑부분이 큰사랑채쪽의 마당을 향하고 있어서 대종가의 의례적인 공간만을 형성한다.

그러나 큰사랑채의 형태와 공간은 아주 강렬하다. ㄱ자 건물로 누마루가 돌출하여 마을을 조망하기 좋다.

 누마루쪽 지붕은 팔짝(합각)인데 반해 마루방이 있는 오른쪽은 박공면에 부섭지붕을 덧붙혀 마감하였다 .

‘더럽힘이 없는 집’ 이란 무첨당의 당호에 걸맞게 위엄있고 당당한 건물이다. 

 


《관가정(觀稼亭) - 우재 선생 고택》


  위치 : 경북 월성군 강동면 양동리

  건립연대 : 1480년대 건립

  문화재 지정 : 보물 442호

 

  손중돈(孫仲暾 : 1464-1529년)은 원래의 종가인 서백당에서 태어나 장성한 후, 분가하여 관가정을 창건했다.

따라서 관가정은 서백당이 세워진 1458년보다 한 세대 뒤인 1480년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손중돈은 차남이었지만 맏형이 장가들어 마을을 떠남으로써 손씨가문의 장손이 되었기 때문에, 분가 직후 관가정이 대종가로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그후 4세기가 훨씬 지난 후인 20세기초에 원래의 서백당으로 대종가가 옮겨오게 되었다. 

그때부터 관가정은 손씨일가의 별장으로 쓰였다가 현재는 빈 채로 관리되고 있다.


㈎ 입지와 배치

  관가정은 양동마을 초입의 물봉 가장 높은 곳에 자리잡아 멀리 오뚝한 호명산을 바라보고 있다.

경사지를 넓게 깎아 단을 만들고 건물을 깊숙이 앉힌 까닭에, 관가정의 모습은 크게 두드러지지 않는다.

관가정은 살림집인 동시에 경관을 감상하기 위한 '정자'다. 이 집은 물봉과 앞의 호명산을 잇는 자연축을 중심으로 삼아 건축되었다.

따라서 안마당에서 중문을 열면 앞의 잘생긴 산의 전체 모습이 정확히 중문의 프레임 안으로 들어온다.

그러나 지금은 새로 세운 대문채에 가려서 산의 모습이 해체된다. 

  이 집 이름은 '농사짓는 풍경을 보는 정자'란 뜻이다. 관가정 사랑채에 오르면 이름에 걸맞는 경관이 펼쳐진다.

안채에서는 중문을 통해 앞산만이 선택된 경관으로 들어오지만, 사랑채에서는 앞산은 경관의 한 요소일 뿐

아래로 전개된 들과 강의 풍경이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안채나 사랑채나 좌향은 같지만 경관을 끌어들이는 방법을 달리한 것이다.

 


㈏ 평면(날개집)

  명문집안의 대종가치고는 소규모이며 단순하게 구성되어 있다.  ㅁ자형 몸체에 전면 좌우로 날개를 뻗어 사랑채와 행랑채로 삼았다.

그 동쪽 뒤에 독립된 사당을 둔 것이 전부다. 다른 상류주택과 같이 담장도 없고, 명확히 구획된 외부공간도 나타나지 않는다.

- 지금 있는 담장과 대문은 1980년대 후반에 관리를 위해 덧붙인 것이다.

-  평면도만 본다면, 한국집으로는 드물게 좌우가 거의 대칭인 형상이며, 마루면이 차지하는 비율이 연면적의 반을 차지할 정도로 비기능적이다.

평면구성만 보아도 이 집은 논리적인 규범을 따라 계획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규칙적인 격자체계를 따라 기둥을 세웠고, 좌우 두 칸씩 날개를 달았다.

이것은 완성된 하나의 몸체에 필요에 따라서 독립된 격자가 더 부가된 구성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관가정은 외형적으로는 확장의 가능성을 가지나, 내부적으로는 완결된 형식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 안마당의 여백

  관가정의 안마당은 전체 면적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능상으로는 동선 및 자연적인 조건만을 충족시키고 있을 뿐이다.

 '채워짐'에 대한 '비어있음'으로서의 관념성을 더 우위에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ㅁ'자 몸체는 전면 날개부와 뒤의 안채부가 만나는 부분의 한 칸씩을 각각 부엌과 마루로 비워서

비록 구조체는 한몸이지만 공간적으로는 ㄷ자 안채와 一자 날개채로 구분하고 있다. 안마당에 면한 몸채는 모퉁이 부분만 온돌방을 놓고

마당의 3변 방향에는 모두 마루를 깔았다. 북쪽 마루는 넓게 개방하여 안대청으로, 동쪽마루는 안방에 딸린 작은 대청으로

서쪽마루는 판벽을 막아 광으로 사용했다.

네모난 마당의 모서리를 비우는 방법으로 안마당의 공간감이 건물의 내부로 확장되어 '비어있음'의 공간감이 극치를 이룬다.  


㈑ 축과 시각적 연결

  관가정은 중문 - 안마당 - 대청을 연결하는 축을 가지며, 진입방향과 축의 방향이 일치한다. 

대문을 열고 안마당의 중심에 서면 주거 전체가 동시에 지각되며, 대청의 개구부를 통해 뒤의 언덕과 시각적으로 연결된다.

  안마당에서 대청으로 바라보면 마루로 난 사람이 통과할 수 없는 크기의 작은 문으로 연결되어 시각적, 공간적 연속성을 볼 수 있다.

사랑대청의 생활적인 요구에서 생겨난 것이라 할 수 있다.  

㈒ 살림집 + 정자의 복합건물

  안마당의 규범적 공간과는 대조적으로 관가정의 바깥 형태는 다양한 모습을 보인다.

두 간 방과 두 간 사랑대청의 바닥면은 동일하지만, 대청 아래 기단을 안으로 접어 넣어서 대청 아래로 기둥이 내려온다.

또한 사랑채 전면에 계자난간을 두름으로써, 또 단지 두 개의 기둥을 노출시켰음에도 불구하고, 루각의 형태를 얻는데 성공했다.

  사랑채의 형태가 유희적이고 변화무쌍하다면, 바로 옆의 행랑채는 극히 기능적이고 획일적이다.

부엌을 중심으로 3개의 온돌방이 구성된 4간이지만, 각 간에 두짝 살창을 달아 그 입면은 모두 동일하다.

부엌까지도 방같이 보인다. 평면적으로는 대칭이되, 형태적으로는 전혀 다른 두 채의 건물을 붙여놓은 듯하다.

  행랑부분의 동쪽을 돌아서면 담장을 둘러 독립된 사당영역을 접한다.

몸채와 날개채 사이로 형성된 마당이 형성되어 많은 인원이 제례를 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했다.

대종가로서는 물론 일반 사대부집의 규모에도 못 미치는 몇 칸 안되는 단순한 구성이지만, 모든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경제성으로 관가정 전체를 구성하고 있다.

 

<< 향단(香壇) >>


  위치 : 경북 월성군 강동면 양동리

  건립연대 : 1540년대 건립

  규모 : 1동 37간(건평 70평)

  문화재 지정 : 보물 412호

 

 향단은 회재 이언적(1491-1533)이 경상 감사로 부임하였을 때 지은 건물이라 한다.

이언적은 자신의 본거지인 이씨 종가에는 무첨당이라는 아름다운 별당을 지어 주었고, 노모를 위한 살림집으로 향단을 지었다고 한다.



 ㈎ 입지와 배치

 향단은 그 터잡기, 좌향 정하기, 규모와 건축적 개념의 설정에 이르기까지 관가정과 대립적이다.

물봉 서쪽의 관가정에 반해 산등성이 동쪽을 차지했으며, 관가정의 안대와는 135°를 틀어서 다른 안대를 택했고

규모는 관가정의 두 배를 넘는다. 향단이 서기 이전,

적어도 50년 전부터 있었던 '손씨 대종가' 관가정에 대응하여, 이씨 종가를 이처럼 돌출적으로 부각시킨 것은

이언적이 특별한 의도를 가지고 건축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손씨들이 주도하는 고향 마을에 자신과 가문의 입지를 세우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선택한 건축적 과시였을 것이다.

  

㈏ 과시적 외관

  향단의 외관은 대단하다. 위치도 위치지만, 일체의 장애물 없이 건물 외관 전체를 노출시킴으로써 마을에서 가장 눈에 잘 띄는 건물이 되었다.

특히 전면 지붕위로 노출된 세 개의 삼각형 박공면은 사대부가로는 유례없이 표현적인 형태다. 거의 보이지 않는 관가정의 박공면과는 대조적이다.

  사랑채의 형태도 같은 의도로 파악된다. 一자형 몸채지만, 지붕을 工자형으로 만들어서 사랑채 정면의 지붕에 두 개의 박공면이 강하게 노출된다.

의도가 없었다면 필요 없는 형태요소다.

관가정 사랑채가 피로티라는 공간요소를 도입해 구성됐다면, 향단 사랑채는 박공이라는 형태조작을 통해 만들어졌다.

  무표정한 형태의 행랑채 위로 긴 몸채의 지붕면과 그 위 3개의 박공면들이 더욱 부각된다.

세부적인 구조기법들을 보면 이 집의 표현적 의도가 절정에 달한다. 집의 기둥은 행랑채까지 모두 원기둥을 사용했다.

관가정은 사랑 누마루에 사용된 4개의 원기둥 빼고는 모두 사각기둥을 썼다.

기둥 위에는 섬세하게 조작된 익공을 달았고, 대들보 위에는 공공건물에나 어울릴 화려한 복화반과 포대공을 올렸다.

사랑채의 지붕도 부연을 단 겹처마다.

모두 민간 살림집에는 금기시됐던 최고의 장식들이다. 관가정에서 보았던 절제와 규범 대신 자기 과시와 개성이 번득이는 형태들이다.


㈐ 레벨(level)차이

  향단은 경사지를 두 개의 단으로 나누어 터를 닦았다. 윗단에 주요한 몸채를 배치하고 아랫단에는 긴 행랑채를 배열했다.

두 건물 사이에는 거의 한 층에 가깝게 높이차가 난다. 또한 몸채와 행랑채 사이를 바짝 좁혀 세웠기 때문에 몸채의 입면은 노출되지 않는다.


㈑ '용(用)'자형 평면

 

  향단의 구성은 매우 복잡하지만, 모든 건물은 하나로 연결돼 있다.

몸채는 日자형이고 그 앞에 긴 행랑을 연결함으로써 전체적으로 巴자형의 평면을 이룬다.

몸채는 두 개의 중정이 있다. 하나는 안채에 딸린 안마당이고, 서쪽의 것은 안행랑부에 딸린 노천부엌용 중정이다.

 

이 역시 일반적인 살림집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 희귀한 예다. 두 개의 중정은 자연스럽게 이 집의 기능영역을 구획한다.

안마당은 사랑채와 안채를, 부엌마당은 안채와 안행랑은 구획한다. 두 중정 사이, 이 집의 중심에는 시어머니가 사용하는 안방이 자리잡아 모든 부분의 움직임을 감시할 수 있다.

  복합적인 평면구조보다 동선체계는 더욱 복잡하고 단절적이다. 행랑에 난 대문을 열면 안채의 높은 축대에 맞닥뜨린다.

안마당으로 향하는 중문이 바로 앞에 있지만, 한 층이나 높아서 도저히 접근할 수 없다.

중문으로 들어가려면 동쪽의 사랑마당으로 올라가서 사랑방 옆의 좁고 위태로운 샛길을 따라가야만 한다.

반면 부엌마당으로 향하는 하인들의 통로는 훨씬 수월하다. 행랑채와 축대 사이의 서쪽 길을 따라가면 지면을 경사진 램프로 처리하고

다락 밑의 피로티로 연결되는 부분이 바로 부엌마당이다. 안주인의 출입동선은 지극히 불편하고, 하인들의 출입은 매우 편안하다.

평면으로만 보아도 복잡한 동선들은 입체적인 레벨차이와 부엌부의 2층 다락 출입으로 더욱 복잡한 미로를 형성한다.

관가정은 외부적으로는 폐쇄적이고 소박하지만, 내적으로는 개방적이면서 대단한 경관을 끌어들인다.

반대로 향단은 외적으로는 화려하고 웅장하지만 내적으로는 갑갑하고 폐쇄적이다.



종가의 내재적 범위

내재적인 범위는 1차적인 영역으로 종가의 생활공간과 사당을 포함한 의례공간이 그 중심이 된다. 

사당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연결하는 외면적인 장소로서의 의미뿐만 아니라 조상과 나, 앞으로 태어날 후손들

즉,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함축하는 시공을 초월하는 영원한 공간적 성격의 매개체적인 역할로서 내면적인 의미가 매우 크다.


  2차적인 영역으로는 입향조의 묘소와 재실이 있는 선산에까지 그 범위가 확대되어 불천위 묘사일 때는 입향조의 묘소에 각지의 후손들이

재실에서 제수의 장만 등 제실에서 숙식을 하면서 묘사 행사를 준비를 하며, 또한 가문의 화수회가 조직되어 있어

일년에 한두 번 정기적으로 후손들이 재실에 모이는 등 가문 결속의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사당을 포함한 주생활 공간인 종가가 가문의 1차적인 중심 영역이 되며 2차적인 가문 결속의 영역 확대는 묘소와 재실이 된다. 

 이와같이 1, 2차 영역은 입향조와 직접적인 연관을 가진 장소 및 공간으로 한 가문의 외면적이나 정신적으로 중심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3차적인 영역은 아동기 및 청소년기 자손들을 교육시키는 교육 공간인 서당으로 가문의 법도와 예의 범적을 체험하면서

자연스럽게 생활화되거나 절도 있는 교육으로 조상의 덕목과 가문의 자긍심에 대해 직간접적인 체험의 공간이 된다.


   또한 가문의 결속 공간으로 亭子에까지 그 영역이 확대되며, 대개 정자는 입향조 및 그 가문에서 학덕(學德)이 뛰어난 선조를 기리는

추념(追念) 공간으로 여흥의 여가 선용의 공간적 성격보다 學의 공간적인 성격이 강하다. 

정자의 입지는 대부분 선조와 연고가 있는 조망 및 주변의 경치가 수려한 지역으로 별서(別墅)의 성격이 많다. 

이것은 한 가문의 상징공간으로서 뿐만 아니라 그들 가문의 결속공간으로서 역할을 하였다. 

집안이 경제적으로 어려워 퇴락 하여 멸실은 되더라도 매매는 하지 않는다. 

이것은 정자가 한 개인의 소유라기보다 지손들의 공유 공간적 성격으로 조상을 기리는 추념의 성격이 강하여

매매될 경우 조상을 파는 것과 같이 여기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3차적인 영역은 한 가문의 상징 공간으로서 뿐만 아니라 그들 가문의 결속 공간으로서 역할을 하였다.


    이처럼 종가의 내재적인 범위는 종가를 중심으로 한 1차적인 영역과 입향조 묘소가 있는 선산을 중심으로 한 2차적인 영역

그리고 가문의 교육 공간과 정자등의 3차적인 영역으로 나눌 수 있다.


그리고 4차적인 영역으로는 한 가문 결속의 직접적인 요인은 아니라 서원이 된다.  불천위로 제수되었으며 서원에 배향되었거나

혹은 그 가문의 선조로서 배향되어 있는 서원으로까지 종가의 영역으로 보며, 4차적인 영역은 의미론적인 영역이 된다.


이와같이 종가의 영역은 4차의 영역으로 나눌 수 있으며, 직접 혹은 간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내재적인 영역으로 확대되고

 시공을 초월한 무한성을 내포하고 있다.

 


 종가의 배치

 종가의 배치는 접근하면서 행랑채, 사랑채, 안채와 좌우 부속채 등으로 이루어진

주생활 공간과 입향조 및 조상들의 위패를 모신 사당 공간으로 나누어진다.

사당의 위치는 제례공간의 오른쪽에 위치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며 일반적으로는 정침의 안대청에서

제례 행사를 하므로 정침을 기준으로 배치하는 경우가 많다.


  구릉지 배치형식인 월성손씨의 종가는 대지의 한계 때문에 지형에 순응하는 배치로 좌향이 조금씩 다르게 배치되어 정침의 뒤편의

우측 높은 곳에 부조묘를 위치시켰고, 구릉지 배치이지만 양동이씨의 종가에서처럼 제청이 있을 경우

정침 위치와의 상관관계보다 제례행사 공간과의 상관성을 고려하여 제청의 오른편에 부조묘가 위치하고 있다.


   주생활 공간은 안채 중심의 여성공간, 사랑채를 중심으로 한 남성공간으로 엄격히 남녀의 공간으로 구분되고

정침은 주생활의 중심으로 특히 안방은 생산공간으로서의 의미가 매우 크며, 사랑채보다도 위계가 높다.


  또한 일가친족을 제외한 외간남자의 출입은 원칙적으로 차단되는 등 매우 폐쇄된 공간이나

안마당을 중심으로 각실의 연계성이 강하며 개방된 공간을 하고 있다. 

이와같이 안채는 외부에서의 폐쇄성과 내부에서의 개방성을 동시에 포용하는 이중 성격의 공간 특성을 하고 있다.

   

  남자들의 생활공간인 사랑채는 전면의 행랑채 등 부속채로 구성되며, 사랑마당을 중심으로 각 공간이 연계되어 있다. 

터와 집의 규모에 따라서 양동이씨 종가처럼 불천위의 기제사(忌祭祀)를 모시는 제청(祭廳)이 사랑채와는 별도로 건축하기도 한다.

안채와의 연계는 사랑방에서 안채로 향한 문이 되거나 구자(口字)로 결구된 평면의 경우 사랑방에서 안채와의 접속부에 부속공간

즉, 보통 마루공간으로 되어 있으며, 사랑채와 안채의 매개공간의 기능으로 준비 및 대기공간의 역할을 하는 실을 두어 연계시킨다.


   사랑채와 안채의 연계는 내부적으로는 원활하나 사랑채에서 안채 쪽으로 시선이 차단되도록 의도적으로 시선 축의 변화를 주거나

외부에서 바로 안채 쪽으로 접속이 되면 시선 차단 시설을 하여 안채의 매개공간의 기능으로 준비 및 대기공간의 역할을 하는 실을 두어 연계시킨다.

   사랑채와 안채의 연계는 내부적으로는 원활하나 사랑채에서 안채 쪽으로 시선이 차단되도록 의도적으로 시선 축의 변화를 주거나

 외부에서 바로 안채 쪽으로 접속이 되면 시선 차단 시설을 하여 안채의 직접 노출을 최대한 억제하였다.

  

주생활 공간의 특징

주공간

  종가의 공간구성은 생활공간과 의식공간이 분명한 영역으로 공존하면서 전체를 이루게 되지만 의식의 행사가 있을 시는

이러한 공간 성격은 생활공간으로까지 확대되어 종가의 전체가 의식공간화 된다.

평상시 생활은 크게 남녀의 공간적 성격이 종문을 경계로 일상적인 남녀의 공간이 명확하게 구분이 되고 있다.

대개 사랑채를 중심으로 한 남자의 생활공간은 사랑방과 사랑대청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안방과 안대청을 중심으로는 여자들의 주생활 공간이 한정되며, 외부공간은 안마당을 중심으로 일반 가사(家事)공간이 된다.

이와같이 종가의 주생활은 남녀의 공간으로 엄격히 구분되며, 사랑채와 안채와의 연계는 낮에는 주로 중문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정침은 안 대청을 중심으로 안방과 건넌방으로 구성되고, 골방과 방으로 이루어진 부속채가 안마당을 중심으로 배치되어 있다.

취사 및 가사 작업과 출산, 보육등 宗家에서 일상생활의 가장 중심이 되는 공간이다.

   

  평상시 남자들은 안채로의 출입은 제한적이며, 안채와 사랑채로의 의사 전달은 과거에는 대개 下人(몸종)을 통하여 전달이 되었다.

종부(宗婦)의 거처는 안방이 되나 연로하면 공방열쇄 등을 며느리에게 넘겨주고 자신은 건넌방(머리방)이나 별채의 한적한 방으로 처소를 옮기게 된다.

   

  과거에는 일상생활의 허드렛일을 상당 부분은 하인들이 담당하고 종부(宗婦) 등 아녀자들은 보육 및 가사 및 집안의 전반적인

이를 총괄하게 되며, 종부는 권위와 품격이 있었으며 한 가문을 대표한다.

   

  사랑채는 남자들의 주생활 공간의 중심이 되며 사랑방을 중심으로 사랑대청으로 접속되며

대개 사랑방과 사랑대청은 4분합 들어 열 개 문으로 되어 있어 필요시 한 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는 가변적인 공간이다.

이곳에서는 취침, 식사, 접대, 교육 등의 일상생활이 이루어진다.

    월성손씨 종가와 같이 행랑채에 연로하여 은퇴한 바깥주인과 수발할 수 있는 자손 혹은 하인이 같이 거주하도록 2칸 규모의 사랑방을 두기도 한다.

양동이씨 종가는 작은 부속채(아래사랑의 성격)가 별도로 있어 대가족의 생활에 대응한 공간구성을 하고 있다.

  

접객 및 준비공간

종가는 일반사가(私家)와는 달리 가문을 대표하며, 절대적인 권위와 품격이 있다. 

따라서 일상생활에서 접객이 차지하는 비중은 크며, 대부분 사랑방 손님으로 당일로 가는 손님이나 드물게는 며칠씩 유하고 가는 경우도 있다.

타 가문에서 내방하는 손님은 각별히 대접하며 접객 음식으로도 가문의 법식을 가늠할 수 있을 정도이다. 접객은 크게 일가친척과 타가문의 손님으로 대별되고, 종가 일상생활의 부분으로 평소에 여기에 대응할 준비는 되어 있으며, 사랑방이 외부 접객의 중심 공간이 된다.

  

   준비공간은 평상시 부엌과 고방을 중심으로 일상생활 공간과 같으나 불천위 제사나 추석과 설 등을 종가 전체가 행사의 준비 공간이 된다.

사랑채를 중심으로 한 공간은 의식에 관한 제반 준비가 되며, 안채는 행사에 필요한 음식의 장만 등 가사 작업이 주로 이루어지게 된다.

필요에 따라 부엌 공간은 좌우 부속마당으로 확장되며, 자손들은 종가에 와서 행사의 준비릉ㄹ 같이 하게 된다.

  

 의미론적 공간

  가문에서 종가에 대한 의식은 상하와 주종 및 평등의 의미가 함께 내포하고 있으며, 종가는 불천위의 사당이 있어

조상들이 함께 거주하는 의미론적 공간으로 항상 엄숙하고 정적인 공간적 의미를 함양하고 있다.

   

  종가는 외적으로는 한 가문을 대표하며, 가문의 내적으로는 집안 중심적인 역할과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와같이 주생활 공간과 의식공간이 공존하는 공간적 특성은 종가에서 큰 행사가 있을 때 지손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합심하여 준비하는 등 한 가문의 결속을 다지는 원동력이 되기도 하며 지손들 각자의 내재적 공존의 공간이 되기도 한다.

또한 집안 대소사(大小事)에 대한 의논 및 화합의 공간으로서 장소적인 의미도 있으며

종손은 실질적인 가문의 수장으로서 모든 일에 대한 결정권자라기보다 고문적인 성격과 조정자의 역할 및 제안자와

행사 주례자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상과 같이 종가는 한 가문에 있어서 내적 질서의 표상이 되는 것이다.

  

 부조묘와 의식공간

 일반 사당은 3대 혹은 4대 조상의 위패를 모시지만 부조묘는 불천지위 사당으로 자손 대대로 불천위로 제수된 조상의 위패와 기제사를 모시게 되며

 집안의 대소사(大小事)와 절기마다 사당에서 의례 행사를 하게 된다.


 부조묘의 건립은 주택지 선정에서부터 세심하게 고려되어 주거의 공간구성에서 풍수지리 및 음양오행 사상에 입각하여

택지중에서 가장 좋은 위치에 설정하게 된다. 부조묘는 종가내에 위치하나 주생활공간과는 별도의 공간으로 구획되며

조상들의 공간으로 보통 이곳을 한정짓는 담을 두르고 출입문을 일각문 혹은 삼문의 살당 출입 대문을 설치하여 독립된 공간적 성격을 분명히 하고 있다.


 민가에서 사당은 단청 등으로 치장할 수 있었으며, 정원도 사철 푸른 나무와 계절의 변화를 잘 느낄 수 있는 나무 등으로 조경을 하여 생동감있는 공간으로

품격을 유지하였다.  그리고 이곳은 생과 사 즉, 과거, 현재, 미래의 매개공간으로 영원성을 내포하는 승화공간으로서의 의미가 매우 크다.


 공간의 품격은 정면으로 접근하면서 볼 때 생시에는 왼쪽(左側)보다는 오른쪽(右側)이 상석이 되며

 바깥쪽보다 안쪽이, 낮은 쪽보다 높은 쪽이 사의 위치가 된다. 사후에는 오히려 동일 공간에서는 왼쪽이 오른쪽보다 상의 위치가 된다.

사당은 일반적으로 정침(청사)의 오른쪽에 위치 시키며, 같은 향을 하게 된다.


 부조묘의 규모는 정면 3간과 측면 1간과 툇간으로 되며, 내부는 단일 공간으로 전면의 중앙간은  2짝의 골판문, 좌우 측간은 외짝 골판문으로 되고

전면을 제외한 3면이 화담장으로 마감되어 있다. 내부공간과 퇴간의 바닥은 전돌로 마감되었고

기단 전면의 좌우로 두군데 계단이 있고 주로 오른쪽 계단을 이용한다.


 부조묘의 출입문 3간의 삼문으로 되어 있다. 중앙문은 신문으로 제례 행사시 열어 두며, 사당을 참배하거나 일반인의 출입은 오른쪽 문을 사용한다.

중앙문은 제례행사시 사당에서 위패를 모시고 나오면(出主), 제례 행사후 위패를 모시고 들어가는 문으로 평상시는 닫아 둔다.

사당에서의 의례 행사시 제수를 들고 들어가며 나올 때는 좌측문으로 나온다.(가문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음)

   

  위패의 배열은 열향(列享) 배열과 좌소우목(左昭右穆) 배역이 있으나 양동의 두가문 부조묘내의 위패 배열 형식은 사당의 전면에서 볼 때

왼쪽에서부터 오른쪽으로 불천위 위패, 고조고(高祖考), 증조고(曾祖考), 선고(先考)의 위패를 열향으로 배열하고 있다.


 불천위 제사를 위해 대개 문중의 위토답이 있으며, 제례를 총괄하는 1년 임기의 유사를 정초에 문회(門會)에서 선임되나

대개 종손이 위임하는 경우가 많으며, 그해의 불천위 제례 행사를 주관하게 된다.

불천위의 기제사때 제례공간은 준비공간과 행사공간으로의 구분이 되나 특정한 공간에 국한되지 않고 직간접적으로

부조묘를 포함한 종가 전체가 제례공간이 된다.


 제례의 준비공간은 사랑채와 안채로 나누어지며, 사랑채는 의례에 필요한 준비를 안채에서는 주로 필요한 음식을 준비하고 사랑채에서는

실제적인 행사 준비를 하게된다. 직접적인 제레공간은 제례행사의 위치에 따라서 부조묘에서 정침의 대청으로 확대되거나

월성손씨 종가처럼 부조묘에서 사랑대청(일반적으로 기제사는 정침의 대청에서 행사하나

이때 사랑 대청은 불천위 제사 제청의 기능을 함)으로 확대된다. 양동이씨 종가와 같이 별도의 제청이 있을 경우에는 부조묘에서

 제청공간으로 확대된다. 불천위의 기제사는 씨족 마을에서 자손들의 큰 행사가 되며, 때로는 나라에서 파견된 관리가 참례하는 경우도 있다.


 

참고문헌


1. 정인국, 한국건축양식론, 1995.

2. 경상북도, 양동마을조사보고서, 1979.

3. 김봉열, 한국의 건축-전통건축편, 공간사, 1985.

4. 전봉희, 조선시대 씨족 마을의 내재적 질서와 건축적 특성에 관한 연구, 서울대 박사, 1992.

5. 송인호, □자형 전통주거건축에 관한 연구, 서울대 석사, 1982.

6. 손기원, 양동 관가정과 손동만가옥의 주거사적 연구, 연세대 석사, 1991.

7. 김복태, 양동마을 전통주택의 안채와 사랑채의 구성관계에 관한 연구, 서울시립대 석사, 1997.

8. 서진원, 관가정과 향단 건축구법의 상이한 보편적 특성에 관한 연구, 성대 석사.

9. 유승렴, 향단의 안마당 공간의 구성방법연구, 서울대 석사, 1995. 12.

10. 김봉열, 「사회구조의 건축적 대응-양동마을과 주택들Ⅰ」, 이상건축, 1997. 3.

11. 장기인, 양동마을 민가들, 건축문화, 198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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