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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대장경종류

박근닷컴 2010. 12. 6. 16:04

 

 

 

중국에서 시작된 대장경판의 제작은 우리 나라를 비롯한 각국의 대장경 제작으로 이어졌으나 일본만은 독자적인 대장경을 근세까지도 만들지 못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80여 회에 걸쳐 우리의 팔만대장경을 분양해 달라고 끈질긴 요구를 하여 왔고 뜻을 이루지 못하자 뒤늦게 우리의 대장경을 비롯한 지금까지의 간행된 대장경을 바탕으로 1881~1885년 사이에 만든 축쇄대장경(縮刷大藏經)과 1924~1934년의 10여 년에 걸쳐 만든 신수대장경(新修大藏經)에 만족해야 하였다.
팔만대장경과 관련이 있는 몇 가지 주요한 대장경의 종류를 알아보자.
 

송나라 태조의 어명으로 태조 4년(972)에 시작하여 태종 8년(983)에 이르는 11년에 걸쳐 완성된 대장경이다.
이 대장경판은 불교의 발원지인 인도는 물론 중국과 우리 나라를 통틀어 최초로 조성된 목판대장경판으로 나무를 켜서 판자를 만들고 그 위에다 부처님 말씀을 새겨 넣은 것이다.  이후 우리 나라와 거란 등에서 만들어지는 목판대장경판의 효시가 된 경판이다.
북송칙판대장경은 일명 개보칙판대장경(開寶勅版大藏經), 촉판대장경(蜀版大藏經), 관판대장경(官版大藏經)이라고도 하며 앞에 말한 지승의 개원석교록를 근거로 하였다.  총 1,076부 5,048권의 불경을 자그마치 13만 때나 되는 목판에 새겨, 천자문 차례로 이름을 붙인 480개의 함에 차례로 보관하였다.
이 대장경의 제작은 인도를 제외한 한문 문화권에서는 최초로 이루어진 엄청난 규모의 불경 정리 작업이었고 동시에 최초의 불경간행 사업이었다.  따라서 중국에 전파된 불교가 비로소 체계적인 경전을 갖는 계기가 되었고 당시 사람들이 불교 중심의 종교생활을 하며 정신적 지주를 삼았으므로 역사상 매우 중대한 의미를 가진다.
이 경판은 송나라의 휘종 때까지만 해도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금나라 침입 이후의 사회적 혼란기에 대부분 없어져 버리고 최근에 와서 10여권이 발견된바 있다.
 

송나라의 칙판대장경이 만들어지자 중국과 왕래가 빈번했던 고려에서는 성종 10년(991) 송나라 사신으로 가있던 한언공(韓彦恭)이 귀국하면서 북송치판대장경 481함 2500권을 가지고 돌아와 비로소 내용이 알려졌다.  이어서 현종 13년(1022)에는 한조(韓祚)가 역시 송나라로부터 보완된 칙판대장경 500여권을 가져오기도 하였다.
현종이 즉위한 후 고려는 거란족, 여진족, 몽골족 등 북방오랑캐들의 침략을 퇴치하기 위하여 군비를 확충함과 더불어 부처님의 가피력를 얻고자 우선 현화사라는 절을 창건하였다.
이어서 우리 나라에서는 처음으로 대장경판을 새겨 부처님의 힘으로 외적을 물리쳐보자는 정말 안타까운 시도를 한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드는 온 국민의 정성으로 오로지 이 대장경을 조성하여 나라와 백성을 외적으로부터 지키겠다는 거룩한 뜻에서였다.  그런데 경판을 새기기 시작하자 거란군이 물러가게 됨으로써 더욱 부처님의 가피력을 믿게 되었다.
그러나 초조대장경을 새기게 된 동기에 대하여 문경헌은 “초조대장경 조성의 동기는 불력(佛力)을 빌어 거란군을 물리치려는 목적으로 외적 격퇴를 위하여 조성했다는 종래의 견해를 탈피하여, 거란과의 전쟁이 종식되고 요나라와 사대교류를 하기 시작한 친선 평화시대에 조성되었다고 보았다.  그 동기는 현종이 부모를 추선(追善) 하기 위하여 현화사를 창건하고 그 사업의 일환으로 이를 조성했다.  첫째 부모의 추선과 현종 왕가의 미약한 전통성과 권위의 제고를 위하여, 둘째 대장경을 조성하고 싶은 불교왕국 고려의 문화적 욕구와 민족적 자긍심과 신앙심이었다. ”라고 하여 다른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동기가 무엇이었든 현종은 수입한 칙판대장경을 바탕으로 일종의 대장경을 간행하는 관서라고 할 수 있는 반야경보(般若輕寶)를 설치하고 대반야경, 화엄경을 비롯한 불경을 새기기 시작하였다.  처음 시작한 연대는 명확하지 않으나 현종 2년(1011)경부터 꾸준히 계속되어 현종 22년(1031)에 일단 끝이 났다.  문종(1046~1083)초기에 다시 경판을 새기기 시작하여 선종 4년(1087)에 이르러
초조대장경은 비로소 완성되었다.
제작기간에 대해서는 현종 때 완료됐다는 설과 선종 때 최종 완성됐다는 등 학자들 간에 주장이 맞서고 있다.  이는 현종 때 초조대장경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5천 여권의 경판을 완성했고 문종 때 1천 여권의 경판을 추가로 새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국이상국집의 대장각판신기고문(大藏刻版君臣祈告文)에 나타나 있는 대로 현종 2년(1011)에 시작하여 선종 4년(1087)까지 76년간에 걸쳐 판각 하였다는 설이 일반적이다.
초조대장경을 새기는 작업을 실제로 맡아서 총괄한 사람은 누구 였을까?
현종 때의 대장경 판각사업은 당시 별감이었던 최사성(崔士成)의 책임하에 추진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최사성은 목종을 섬기는 동안 관직을 여러 번 옮겼는데 현종 초에 통군사(統軍士)가 되었다가 그 후 현화사의 창건과 초조대장경 조성의 총책임을 맡았다 한다.
이 경판을 우리는
초조고려대장경(初雕高麗大藏經) 혹은 초조대장경이라 부른다.  초조대장경은 570개 함 6천여 권에 이른다.  대반야바라밀다경(大盤若波羅蜜多經)을 시작으로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 대열반경(大涅槃經) 등 경.율.논 3장이 모두 집약돼 있다.  송의 칙판대장경을 바탕으로 이를 수정, 보완해 만들었기 때문에 당시로서는 가장 정확하고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경판을 넣은 함은 다른 대장경들과 마찬가지로 천(天)함에서 시작해 초(楚)함데 이르기까지 천자문으로 순서가 매겨졌다.
이 초조고려대장경은 대체로 송의 관판대장경을 그대로 복각(復刻)한 것도 포함되어 있은 내용과 체재를 토대로 대부분 새로이 제작한 것으로 보고 있으며 남아있는 초조대장경 인쇄본을 보면 고려인들이 보완과 수정을 가하여 원본보다 더 훌륭한 대장경을 만들고자 얼마나 피나는 노력을 하였는지 그 편모를 알아 볼 수 있다.  완성된 초조대장경판은 대구의 팔공산 부인사에 고이고이 보관하여 오다가 아깝게도 고종 19년(1232)에 살리타이(撒禮塔)가 이끄는 몽골 2차 침입 때 의천(義天)의 고려속장경과 함께 불타버리고 만다.
그러나 초조대장경의 인쇄본은 일본의 남선사(南禪寺)에 1500여권, 국내에는 200여 권이 남아 있으며 아직도 가끔 발견되고 있다.  호암박물관이 100여 권으로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으며 나머지는 성암 고서박물관 등 여러 곳에 분산돼 있다.  그나마 초조대장경의 일부 내용을 엿볼 수 있는 것만도 험난한 우리 역사를 되돌아본다면 천만다행한 일이다.
초조대장경은 우리 나라에서 가정 먼저 만들어졌다 해서 초조라는 이름이 붙여졌고 983년 북송 떄 만들어진 칙판대장경에 이어 세계에서 2번째로 만들어진 한자번역 대장경으로서 문화사적 의의가 큰 대장경이다.
 

거란은 송나라의 북송칙판대장경의 영향을 받아 우리의 초조대장경보다는 약간 늦게 거란의 흥종(1031~1054)때에 대장경을 만들기 시작한다.  완성된 정확한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거란의 도종(道宗)이 고려 문종 17년(1063)에 거란대장경 전질을 고려에 보내온 것으로 보아 이보다 앞서서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479함으로 구성된 거란대장경은 개원석교목록과는 함호(函號)배열이 다르고 일부 없어져 버린 불경이 수록되어 있는 등 칙판대장경이나 우리의 초조대장경 및 의천의 속대장경과는 또 다른 문화사적인 의미가 있는 귀중한 대장격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대장경은 내용이 우수하여 현재의 해인사 팔만대장경 판각을 주관하였던 수기(守其)대사에 의하여 광범위하게 참조 이용되었다.
 

현종과 선종 대에 걸쳐 초조대장경을 완성한 후 이에 만족하지 않고 문종 때 조종에서는 대각국사 의천(義天, 1055~1101)에게 명하겨 새로운 형식의 대장경을 간행하였다.  이 대장경을 고려속장경, 의천의 속장경 혹은 속장경 등으로 부른다.
초조대장경은 북송칙판대장경을 원본으로 하여 경.율.논 삼장(三藏)을 주로 모아서 기록한 것에 비하여, 이의 주석서나 연구서라고 할수 있는 장(章), 소(疏)들을 모아 간행한 것이 고려속장경의 특징이다.  삼장(三藏)은 이미 정리가 이루어지고 판각까지 되었으나 장.소(章.疏)는 아직 정리하여 간행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차츰 흩어져 없어질 위기에 처해 있다고 의천은 판단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의천은 문종 27년(1073)에서 선종 7년(1090)까지 25여 년간에 걸쳐 국내는 물론 일본, 중국의 송나라와 요나라까지 광범위하게 장(章), 소(疏)를 수집하였다. 특히 선종 2년(1085)에는 직접 송나라에 들어가서 화엄대불사의론(華嚴大佛思議論) 등 3천여 권을 수집하기도 하였다.  실제의 작업은 흥왕사에 교장도감(敎藏都監)을 두어 수집한 자료를 하나하나 간행하기 시작하였다.
고려속장경을 새기기 시작한 시기는 초조대장경이 거의 완성되어가던 때였으며 경 · 율 · 논의 정장과는 다른 일종의 속장(續藏)인 장(章) · 소(疏)를 간행한 것으로써 고려가 또 다른 대장경판을 새겼다는 귀중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이 속장경은 독실한 불자들이었던 고려인들에 의하여 널리 읽혀지고 수많은 간행이 있었을 것이나 이후 이어지는 몽골의 침입을 비롯한 잇단 외환으로 말미암아 전질의 경판은 물론 인쇄본마저 거의 전해지지 못하고 있다. 다만 일부 인쇄본과 조선 초에 중수, 간행된 불서목록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이 순천 송광사에, 다른 인쇄본 일부는 일본 나라(奈良)의 동대사(東大寺)에 전하고 있다.
 

앞의 여러 대장경들이 모두 없어져 전해지지 않으나 해인사에는 팔만대장경, 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 재조고려대장경(再彫高麗大藏經)등으로 불리워지는 81,258장의 대장경판이 1962년 12월 20일 국보 32호로 지정 받아 고스란히 보관되어 있다.  왜 팔만여 장의 경판을 새겼을까? 우연히 만들다 보니 이렇게 된 것인가?
불가에서 팔만 혹은 팔만 사천이란 숫자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즉 많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데, 부처님의 많은 가르침을 일컬을 때 팔만사천 법문(法門)이라 하고 사바세계의 수많은 번뇌도 팔만 사천 번뇌라고 부른다.  팔만대장경의 팔만이라는 숫자에는 부처님의 법문을 새겨서 인간의 번뇌를 씻어낸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우선 이 대장경판의 내력을 간단히 알아보자.
수 십 년에 걸쳐 완성된 초조대장경과 의천의 속장경은 고종 19년(1232)몽골군에 의하여 무참히 모두 불타버리고 말았다.  무력한 고려 조정은 몽골과의 항쟁을 위하여 서울마저 개경에서 강화도로 옮기게 된다.  이에 고려는 다시 한번 부처님의 힘을 빌어 외침에 대처하고 민심을 수습코자 대장경을 새길 계획을 세운다.  대장도감을 새로이 설치하고, 고종 23년(1236)부터 38년(1251)년까지 장장16년간에 걸쳐 다시 대장경을 조성했다.
경판은 처음 강화도성(江華都城) 서문 밖의 대장경 판당(板堂)에 보관하고 있었는데 후에 같은 강화도의 선원사로 옮겨졌고, 그 후 조선 초기에 서울 근처의 지천사로 옮겼다가 다시 해인사로 옮겨져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는 것으로 지금까지 알려져 왔다.  그러나 아직은 이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다.

팔만대장경판은 상당 부분 초조대장경 인쇄본을 그대로 나무에 붙여 복각했다는 일부 일본인 학자들 중심의 주장도 있으나 항상 우리의 역사를 부정적으로만 보는 그들의 못된 시각일 따름이다.  초조대장경을 바탕으로 하고 송 · 거란본과도 비교하여 잘못된 것은 바로잡아 고쳤고 빠진 것을 찾아 넣었으며 초조대장경에는 없었던 경서도 참고하여 본문을 다양하게 보완하였다.  이런 노력 끝에 이루어진 팔만대장경은 북송의 칙판대장경을 효시로 20여종에 이르는 각종 대장경이 잇달아 나왔다고 하나 다른 어느 대장경보다 본문이 충실하여 오자와 탈자가 거의 없는 완벽한 대장경이다.
초조대장경에서 속장경, 팔만대장겨으로 이어지는 경판의 제작은 현종 2년(1011)에서 고종 38년(1251)에 걸쳐 고려가 가장 어려웠던 국가적 위기에 시기에 장장 240년이라는 긴 세월을 통해 이룩한 거국적 대사업이었다.  대장경의 완벽한 제작은 문화국으로서 고려의 위신을 드높였을 뿐 아니라 인쇄술과 출판술의 발전에도 크게 공헌하여 그 문화사적인 면에서도 우리 민족의 영원한 자랑거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