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유적답사

♡ 월성유적

박근닷컴 2011. 3. 12. 21:51

 

 

 

 - 경주월성

 

계림에서 월성 가는길....

 

 

 

 

월성내

 

토석성 흔적이 ...

 

 

 

 

 

월성 해자유적 복원지

 

- 우측에 발굴중

 

안압지로 가는길....

 

 

 

월성 ... 토석성이 남아있다.

 

 

 

 

 

 

▲ 월성전경(항공사진)

월성 학술심포지엄 경주역사문화도시조성을 위한 선도사업의 일환으로 지난해 9월부터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 진행한 ‘월성 종합조사ㆍ정비를 위한 기초학술연구’의 대미를 이루는 것으로 학술심포지엄에서 논의된 여러 사항들은 향후 월성의 조사와 정비사업에 적극 반영될 예정인 것으로 보인다.

월성 학술심포지엄에서 (아래내용) 전덕재 경주대 교수님의 발표내용이다. 

 

 

 

 

전덕재 경주대 교수 “신라의 王京과 王宮”

 

금석문이나 문헌기록을 통하여 통일기에 신라인들은 왕경을 금성이라고도 불렀고, 또 그것은 6부로 이루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으며, 6세기 전반에 기존의 원사로국지역을 왕경으로 재편하였다.

중대 왕도의 범위(길이 3,075보, 너비 3,108보)는 6부로 이루어진 원사로국의 영역에 비하여 훨씬 좁은 면적에 해당하는데, 이것은 통일기에 왕경(왕도)의 범위를 경주분지를 영역으로 하는 범위로 축소 조정하였음을 반영한다. 하대에 이르러 왕경의 인구가 급증하면서 그 영역이 확장되었다.

이러한 신라 왕경의 핵심인 월성에 위치한 왕궁을 대궁이라고 불렀고, 이밖에 중고기에 창림사터에 위치한 궁궐을 사량궁, 금성의 옛 궁궐을 양궁이라고 불러 중시하였다.

문무왕 19년(679) 안압지에 왕궁의 부속 궁궐로서 동궁을 짓고, 이어 왕족이 늘어나 왕궁이 비좁게 되자, 국립경주박물관 부지에 남궁을, 월성 북쪽의 첨성대와 안압지 사이에 북궁을 새로 건립하여 왕궁의 범위를 확장하였다.

월성 바깥의 동궁과 남궁, 북궁, 그리고 계림에서 첨성대 사이에 위치한 관아건물들을 망라한 범위를 토장성벽(土墻城壁)을 둘러 민가와 구분하였는데, 신라인들은 월성과 그 바깥의 확장된 영역을 아우르는 토장성벽을 연결하여 만월성이라고 불렀다.

이 글에서는 문헌상 단편적으로 확인되는 신라의 왕궁과 관련된 시설(전각, 문, 창고 등)들을 망라하고, 현재까지 이루어진 월성 주변 유적의 발굴성과를 면밀히 추정하여 왕궁으로서의 월성에 대한 복원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월성 내부에 대한 발굴이 진행되지 않은 상황에서 논지 전개상의 한계는 존재하며, 이는 월성 내부의 발굴이 진행되면서 보완될 것으로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