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 충청도

영월-청령포 (단종유배지)

박근닷컴 2011. 1. 27. 11:42

 

 

 

 

배를타고 들어간다...

 

 

 

 

단종유배지로...

배를 타고 청령포에 이르니 2000년 단종이 살았다는 집이 복원돼 있다.

 

청령포 소나무숲

 

2000년 복원한 단종어소

 

 

 

   **   어제시(御製詩) 단종 임금이 지은 시. **

                                               

                                                    천추의 원한을 가슴깊이 품은채

                                                   

                                                    적막한 영월 땅 황량한 산속에서

                                               

                                                    만고의 외로운 혼이 홀로 헤매는데

                                                    

                                                    푸른솔은 옛동산에 우거졌구나

                                               

                                                   고개위의 소나무는 삼계에 늙었고

                                               

                                                   냇물은 돌에 부딪쳐 소란도 하다

                                               

                                                     산이깊어 맹수도 득실거리니

                                               

                                                    저물기 전에 사립문을 닫노라

 

 

 

당시의 단종의 어소 위치에...비각이

 

 

 

단묘재본부시유지 비

 

 

月白夜蜀魂추  달밝은 밤 두견새 울제

            含愁情依樓頭  시름 못잊어 누 머리에 기대어라.

            爾啼悲我聞苦  네 울음 슬프니 내 듣기 괴롭구나

               無爾聲無我愁  네 소리 없었던들 내 시름 없을것을

             寄語世苦榮人  세상근심 많은 이 들에게 이르노니

        愼莫登子規樓  부디 자규루에는 오르지 마오.

 

- 단종의 《子規詞 자규사) -

 

행랑채 (단종을 따라온 궁녀의 처소)

 

단종의처소로 단종을 향하여 절하듯이 담장을 넘은 소나무

 

 

 

 

 

 

 

 

 

 

관음송

이곳에는 상왕의 애처로운 모습을 보고(觀) 들었다(音)해서

이름 지은 관음송이 600년 세월을 버텨 아직도 건강하다.

 

망향탑

단종대왕께서 유배되시어 이곳에 머무시는 동안 왕비 송씨를 생각하면서

돌을 주워 쌓아올린 탑으로 단종이 남긴 유일한 유적이다

 

 전망대에서 본 경치

 

남면 광천리에 있는 청령포는 강원도 기념물 제5호로 서강 변에 있다.

3∼5m의 깊은 물길이 삼면을 에워싸고 육지와 통해 있는 뒤쪽은

가파른 층암절벽이어서 아무나 오를 수 없다.

절묘하게도 천연요새를 유배지로 골라 어린 임금을 압박하고 자결하도록 ....

 

왕방연 시조비 (청령포 건너기전 주차장에서 약60m 거리에 있다)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서 울어 밤길 예놋다

 

금부도사 왕방연이 단종께 사약을 진어하고

한양으로 돌아가는 길에 비통한 심정으로

 청룡포를 바라보며 읊은 시조이다.

 

- 이하 벽계풍수학회 (옮긴글)-

 의금부도사 왕방연은 기가 막혔다. 어린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봉시켜 영월 청령포로 유배 가는 길을 호송하라더니, 사육신의 단종 복위운동이 김질의 고자질로 발각돼 단종에게 사약 내리러 가는 길에도 자기 더러 동행하라는 것이다. 자칫 거역의 기미라도 보였다간 계유정란(1453)으로 정권을 탈취한 수양대군 실세들이 가만 놔둘 리 없을 테고-. 병들어 자연사하는 것도 원통할진대 비명횡사 자청할 자 그 누구이겠는가.

왕방연은 각혈할 것 같은 참담한 심경을 한 편의 시로 담아냈다. 어쨌든 자신이 전한 사약을 마시고 단종(재위 1452∼1455)이 17세 나이로 승하한 것 아닌가. 그는 서울에 도착한 직후 관직을 내던진 뒤 봉화산 아래 중랑천 변에 배나무를 심고 묵객으로 생을 마쳤다.

왕방연이 배나무를 심은 뜻은 처연하기만 하다. 한여름 땡볕 유배 길에 목이 탄 상왕이 물 한 모금 마실 것을 청했으나 세조 어명으로 끝내 올릴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단종이 승하한 날이면 자신이 농사지은 배를 바구니에 가득 담아 영월을 향해 놓고 고두배(叩頭拜)했다. 배 맛이 유난히 단 데다 물이 많고 시원했다. 이후 이 일대 구리 태릉 지역에서 생산되는 배를 ‘먹골배’라 부르게 되었다.

세조는 단종을 죽여 동강 물에 던져 버리게 하고 시신을 묻는 자는 삼족을 멸해 버리겠다고 했다. 천지간에 아무도 나설 사람이 없었다. 이때 하늘이 내린 의인 하나가 있었으니 바로 영월 호장(戶長·지방 관아의 우두머리 벼슬) 엄흥도다. 그는 ‘옳은 일을 하다가 화를 입는 것은 달게 받겠다’고 분연히 나서 강물에 둥둥 떠다니는 상왕 시신을 몰래 수습해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 동을지산에 암장해 놓았다. 눈 덮인 겨울날 노루가 앉아 있다 떠난 자리만 녹아 있어 그 자리를 파고 묻었다.

 

역사는 세조 편으로 흘러 60년이 지난 중종 11년(1516). 영월군수로 부임한 박충원의 꿈에 단종이 나타나 자신이 묻힌 곳을 말해 주고 홀연히 사라졌다. 식은땀을 흘리며 깬 박충원이 엄흥도 후손과 함께 암장 묘를 찾고 봉분을 수축하여 봉제를 올리니 오늘의 장릉(莊陵)이다. 서울과 경기권을 벗어난 유일한 조선 왕릉이다. 장릉에는 배식단사(配食壇祠)와 엄흥도 정려각(旌閭閣)이 있어 참배객들을 숙연하게 한다. 안평대군과 금성대군을 위시해 조사(朝士) 환관 군노 등 단종을 복위시키려다 극형을 당한 264인 위패를 모셔놓고 매년 한식 때 제사를 지낸다.

만고충신 엄흥도가 목숨 걸고 매장한 단종릉은 어떤 자리일까... 엉겁결에 황급히 쓴 무덤이어서 몹쓸 혈처는 아닐까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벽계 조수창 교수(동국대 사회교육원)와 그가 회장으로 있는 벽계풍수학회 회원들과 확인해 보니 이기(理氣)와 형기(形氣)를 고루 갖춘 손색없는 명당 왕릉이었다.

 

단종은 승하 후 태백산 신령이 되어 고단한 백성들에게 복을 주고 있다 한다. 능 입구 안내문에는 직장인에겐 영전 기회를 주고 정치인은 당선의 영험을 얻는다 하여 참배객이 끊이지 않는다고 쓰여 있다. 특히 장릉제향 때 진설된 제물은 아들 못 낳는 사람들에게 효험이 크다고 널리 소문나 있다. 필자는 2005년 10월 3일 단종 능제향 때 대축관(大祝官)으로 봉무한 적이 있다. 제향이 끝난 후 순식간에 제물이 사라졌던 기억을 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