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영월읍 영흥산리 산 1087번지에 위치하고 있는
조선 제6대 왕인 단종(端宗:1441~1457) 능침(陵寢)으로
1970년 5월 26일 사적 196호로 지정되었다.
단종(端宗)은 12세에 왕위에 올랐으나
작은 아버지 수양대군(首陽大君)에게 왕의 자리를 빼앗기고
왕비인 정순왕후(定順王后)와도 헤여져 홀로 청령원에 유배되었다가
1457년(세조 3) 금성대군(錦城大君) 유(瑜)가 중심이 된
단종복위계획이 탄로되어 17세에 사약을 받고 영월(寧越)에서 사사(賜死)되자,
모든 사람이 후환이 두려워 시신을 거두지 못한 채 강물에 떠다녔는데
영월호장 엄흥도(嚴興道)가 을지산 현재 위치인 자신의 선산에 몰래 암장했다.
1681년(숙종 7)에 대군(大君)으로 추봉했고
1698년 추복하여 묘호를 단종(端宗)이라 하여
종묘에 부묘(附廟)하고 능을 장릉(莊陵)이라 했다.
역사상 가장 슬프고도 애환이 많은 단종대왕 능은 다른능에 비해 많이 다르다.
한양 백리 안에 모시는 것이 관례였지만
지방에 모셔진 유일한 왕릉이며 낮은 구릉에 모셔진 다른 왕릉에 비해
높은 곳에 모셔져 있으며 대부분의 왕릉이 봉분, 정자각, 참도, 홍살문이
일직선 상에 조영되지만 단종릉(端宗陵)의 봉분은
신좌을향(辛坐乙向)(남서(南西)에서 북동향(北東向))으로 모셔졌고
정자각은 북쪽을 향하고 있어 능의 옆꾸리를 향해 절을 할 수 밖에 없다.
능은 후릉석물(厚陵石物)의 양식으로 봉분 앞에
혼유석(魂遊石)과 4각옥형(四角屋形)의 장명등(長明燈)이 있다.
다른 능과 달리 단종(端宗)에게 충절을 한 여러 신하들을
장릉(莊陵)에 배향하기 위해 장릉 밑에 충신단을 설치하였다.
지금의 장릉은 울창한 노송과 자연공원 같이 잘 가꾸어져 있어
많은 관광객이 찾는다.
조선 단종릉
배위청- 제향시 제를올리는곳
참도
홍살문을 지나서 능으로 들어가는 길은 박석(薄石)이라는 납작한 돌로 길게 놓여져 있습니다.
이 길을 참도(參道)라고 합니다. 참도는 왼쪽이 오른쪽 보다 넓고 높이가 한 단(5cm 정도) 더 높습니다.
한 단 높은 왼쪽 길은 신들만이 다닌다는 신도(神道)이며, 오른쪽 길은 임금이 다니는 길이라 해서 어도(御道)라고 합니다.
신도는 신로(神路), 어도는 인로(人路)라고도 합니다.
부득이 참도 위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또는 그 반대로 건너가게 될 때는 가볍게 목례를 하고 건너야 한다고 합니다.
앞으로 왕릉을 참배하실 기회가 있으면 신도로 걷거나 함부로 참도를 건너지는 않으시겠지요...
위패 모셔놓은곳
정조때 박팽년의 후손인 영월 부사 박기정이 수축한 우물로
단종제를 올리는 한식때 제정(祭井)으로 사용했다.
일설에 의하면 보통때는 조금씩 샘이 솟았으나
매년 한식날 제사 지낼 때에는 물이 많이 솟아 올랐다는 말이 전해오고 있다.
영천
정려각(旌閭閣) 정려각은 1726년(영조 2년)에 어명으로 세운 비각으로
엄흥도의 충절을 기리는 정여문이다.
비석은 1833년(순조 33년)에 가필하여 같은 해에 또 다시 증축하였으며
1876년 (고종 13년)에 고종이 증시하기를 '충의'라 하여
1879년 (고종 16년) 비석에 있는 것을 다시 고쳤다.
단종 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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