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정
경주 고속도로 톨게이트에서 포항, 울산방면으로 게속 내려오다가 남산쪽으로 방향을 틀어 직진으로 약 5분 정도 가다가 좌회전하면 ...
나정은 말 그대로 우물입니다. 안내판에 기록된 내용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사적 제245호이며 면적은 0.59ha이다.
오릉(五陵) 남동쪽 소나무숲 가운데 조그만 비각이 있다. 그 옆의 우물을 나정이라 하는데,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나정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전한 지절원년 임자(前漢地節元年壬子:BC 69) 3월 1일, 신라 건국의 주역인 6촌(村)의 촌장들이 모여, 군주를 선출하고 도읍을 정하자고 결정한 뒤 일행이 높은 곳에 올랐다.
그런데 양산(陽山) 아래 나정이라는 우물 근처에 이상한 기운이 돌며 백마 1마리가 무릎을 꿇고 있어, 가보니 백마는 하늘로 올라갔고 붉은색의 커다란 알만 남았는데, 이 알을 쪼개자 어린 사내아이가 나왔다.
이상히 여겨 동천(東川)에서 목욕시키자 몸에서 광채가 났고 새 ·짐승들이 춤추듯 노니니, 천지가 진동하며 해 ·달이 청명해졌다. 사람들은 이 아이가 세상을 밝게 한다 하여 혁거세라 이름하고, 알이 박같이 생겼다 하여 성을 박(朴)이라 하였다.”
설화라서 다소 생소하게 들리겠지만 이 곳은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가 태어나신, 말 그대로 하자면 신라의 건국시조가 탄생하신 성지라는 뜻입니다.
몇 해전 발굴팀에서 발굴을 완료하고 석재들만 주변에 있고 우물은 안보인다.
약 3년간에 걸쳐 발굴을 하였고 이제는 종료되어 학술적 가치성이 떨어지는 것들을 매몰한 장소라고기록.
경주 남산기슭의 나정 (참고자료스크랩) | |
박혁거세 탄생신화 무대…실재 입증 유물들 속속 발견 신라 기원 얽힌 수수께끼 풀릴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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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진한 땅에 6촌이 있었다. 어느 날 고허촌장 소벌공이 양산 밑 나정 우물가 숲을 바라보니 하늘로부터 드리워진 빛 속에 흰 말 1마리가 무릎을 꿇고 울고 있었다. 다가가니 말은 간 데 없고 거대한 알 하나가 있었다. 이상히 여겨 알을 깨니 어린 사내아이가 나왔다. 이를 데려다 길렀더니, 나이 열 셋에 벌써 숙성해 왕으로 추대되었다. 그 알 모양이 표주박 같다 하여 성을 박(朴)이라 하고, 빛으로 세상을 다스린다는 뜻에서 이름을 혁거세(赫居世)라 했다…전한 효선제 오봉 원년 갑자 4월 병진에 왕위에 오르니 왕호는 거서간이다’
기원전 27년 시작되었다는 천년왕조 신라의 시조인 박혁거세의 신비스런 탄생 신화를 <삼국사기>신라본기는 이렇게 기록해놓았다. 새삼 이 삼국사기 기록을 언급하는 것은 이 신화의 무대로 나오는 나정(사적 245호)이 최근 국내 역사·고고학계에서 신라사의 기원에 얽힌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열쇠가 되는 쟁점 유적으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경주 시가 외곽의 오릉을 지나 남산쪽 기슭의 소나무 숲 속에 자리잡은 나정은 2002~2005년 중앙문화재연구원의 재정비 발굴조사 과정에서 놀라운 유적들을 세상에 드러냈다. 2003년 뜻밖에도 비각 주위에서 5~6세기 통일신라기 개축된 팔각형 기단 건물터가 나왔다. 추가 발굴에서 그보다 더 오래된 기원 전후한 초기 철기시대의 작은 원형 건물터가 그 안에 또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게다가 그동안 흔적조차 없었던 신라 때 우물터가 두 건물터의 중앙부에서 따로 따로 발견되었다. 이는 곧 이곳에 나정의 우물이 실재했다는 점 뿐 아니라 신라인들이 신성한 곳으로 여겨 건물을 짓고 정성껏 의식을 올렸다는 직접적 증거로 추정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나정에 비석이 세워진 것은 한참 후대인 1803년. 어떤 지리지 기록에도 시설 변천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따라서 나정을 신화적 허구의 공간으로만 인식했던 역사학계는 큰 충격을 받았다. 일제 식민사학자 쓰다 소키치가 <삼국사기> <삼국유사>의 신라 개조 기록의 허구·조작설을 제시한 이래 학계는 중국 사서의 기록에 의거해 건국신화의 실재성을 사실상 인정하지 않았던 터였다.
<삼국사기>‘신라본기’에 잇따르는 다음과 같은 시조묘 관련 기록들은 새 유적의 역사성을 실증하는 근거처럼 비친다. ‘2대 남해 차차웅 3년(서기 6년)정월에 시조의 묘를 세웠다’ ‘21대 소지 마립간 9년(489년)2월에 나을에 신궁을 지으니 나을은 시조가 처음 탄생한 곳이다’ 이런 기록들은 초기 철기시대에 해당하는 신라 2대 남해왕 때(4~23년)부터 이미 시조묘에 제사를 지냈고, 훨씬 후대 한차례 대규모 중창공사를 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발굴에서 드러난 철기시대 원형 건물터가 시조묘에 처음 설치되었던 사당이며, 5~6세기 팔각형 기단 건물터는 이후 사서에서 중창했다고 언급한 신궁으로도 볼 수가 있다는 말이다.
발굴팀은 실제로 원형 건물터에서 기원 전후에 쓰인 제례용 토기인 두형 토기라는 것을 발굴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곳은 박혁거세의 탄강지이자 확실한 신궁터라고 공인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서는 논란이 분분하다. 고고학계는 특히 새로 발굴된 두 건물터가 신성시되었다는 것은 분명하나 기원전후 원형 건물터가 후대 팔각형 기단 건물터로 개축되는 과정은 여전히 안개 속에 싸여있다는 점에서 단언을 꺼린다. 시조가 태어난 탄강지 제사 시설을 개축하더라도 굳이 우물 위치까지 바꿔가며 새 신전을 개축할 필요가 있느냐는 지적부터, 당대 정변 혹은 권력 다툼으로 제사시설이 이동하지 않았느냐는 분석까지 다양하다.
<화랑세기>를 발굴한 소장사학자 이종욱씨는 “나정의 건물들은 건국 신화를 실증하는 현장임에 분명하나 사서에 언급된 시조묘와는 별개의 관계이며 신궁과 나정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추정을 편다. 또 사서에 양산부에 있다고 언급된 나정의 위치는 지금 나정과는 관련이 없는 경주 북쪽 북천 인근의 산이어서 나정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나정의 탄강설화를 허구로 지목하는 전통은 일제 식민사학자들 뿐만 아니라 조선 선비들에게도 있었다. 조선후기 실학자 이규경은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박혁거세를 비롯해 알 탄생이 많은 우리 고대 왕조의 신화를 “우매한 풍속이 귀신에 대한 설(說)을 얘기하기 좋아하여, 알 속에서 나온 임금이 이토록 많은 숫자를 열거하기에 이르렀다”며 “어리석은 백성들을 속이는 것”이라고 개탄했다.
안정복 또한 <동사강목>에서 유형원의 입을 빌어 “삼국의 개국이 한나라 이후라, 중국 고대와 동떨어지니, 어찌 그런 기이한 변동이 있겠는가”라면서 “무지(無知)한 자가 거짓말을 지은 것을 역사에 기록하여 전하는 것은 죄”라고 비난했다. 최근 고고 발굴로 어느정도 본 모습이 드러난 덕분에 나정은 이런 억울한 누명을 벗게 되었지만 이 유적에 얽힌 역사적 비밀이 풀리기에는 아직 숱한 세월을 기다려야할 듯하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