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유적답사

♥ 황룡사지

박근닷컴 2010. 8. 7. 02:09

 

 

 

 

 

 

 

 

 

 

 

 

 

 

 

 

 

 

 

 

 

 

 

 

 

 

 

 

 

 

 

 

 

 

 

 

 

 

황룡사(皇龍寺) 장육(丈六)

 

신라 제24대 진흥왕(眞興王)이 즉위한 14년 계유(癸酉; 553) 2월에 장차 용궁(龍宮) 남쪽에 대궐을 지으려 하니, 황룡(黃龍)이 그곳에 나타났으므로 이것을 고쳐서 절을 삼고 이름을 황룡사(皇龍寺)라 하고, 기축년(己丑; 569)에 이르러 담을 쌓아 17년만에 완성했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바다 남쪽에 큰 배 한 척이 나타나서 하곡현(河曲縣) 사포(絲浦; 지금의 울주蔚州 곡포谷浦)에 닿았다.  이 배를 검사해 보니 공문(公文)이 있는데 쓰기를, "서축(西竺) 아육왕(阿育王)이 누른 쇠 5만 7,000근과 황금 3만 푼을 모아(별전別傳에는 쇠가 40만 7,000근, 금金이 1,000냥이라고 했으나 잘못인 듯싶다.  혹은 3만 7,000근이라고도 한다) 장차 석가(釋迦)의 존상(尊像) 셋을 부어 만들려고 하다가 이루지 못해서 배에 실어 바다에 띄우면서 빌기를, 부디 인연있는 국토(國土)로 가서 장육존상(丈六尊像)을 이루어 주기 바란다"했고, 부처 하나와 보살상(菩薩像) 둘의 모형(模型)도 함께 실려 있었다.  현(縣)의 관리가 문서를 갖추어서 보고하자 왕은 사자를 시켜 그 고을 성 동쪽의 높고 깨끗한 땅을 골라서 동축사(東竺寺)를 세우고 세 불상(佛像)을 편안히 모시게 했다.  그리고 그 금(金)과 쇠는 서울로 보내서 태건(太建) 6년 갑오(甲午; 574) 3월(<사중기寺中記>엔 계미癸未년 10월 17일이라고 했다)에 장륙존상(丈六尊像)을 부어 만들었는데 공사는 금시에 이루어졌으며, 그 무게는 3만 5,007근으로 황금(黃金) 198푼이 들었고 두 보살상(菩薩像)은 쇠 1만 2,000근과 황금 1만 136푼이 들었다.  이 장륙존상을 황룡사에 모셨더니 그 이듬해 불상에서 눈물이 발꿈치까지 흘러내려 땅이 한 자나 젖었으니, 이것은 대왕(大王)이 승하할 조짐이었다.  혹은 불상이 진평왕(眞平王) 때에 이루어졌다고 하나 이것은 그릇된 말이다.

별본(別本)에는 이렇게 말했다.  아육왕은 서축 대향화국(大香華國)에서 부처님이 세상을 떠난 후 100년 만에 태어났다.  그는 부처님께 공양하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겨 금과 쇠 몇 근씩을 모아서 세 번이나 불상을 부어 만들었지만 성광공지 못했다.  이때 왕의 태자가 아뢰기를, "그 일은 혼자의 힘으로 성공하지 못할 것을 저는 벌써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왕은 그 말을 옳게 여겨 그것을 배에 실어 바다에 띄웠더니, 그 배는 남염부제(南閻浮提)의 16개 큰 나라와 500 중국(中國), 10천의 소국(小國), 8만의 촌락(村落)을 두루 돌아다니지 않은 곳이 없었으나 모두 불상을 부어 만드는 일에 성공하지 못했다.  최후로 신라국에 이르러 진흥왕이 문잉림(文仍林)에서 이것을 부어 만들어 불상을 이루니 좋은 모양이 다 이루어졌다.  아육왕은 이래서 근심이 없게 되었다.

뒤에 대덕(大德) 자장(慈藏)이 중국으로 유학하여 오대산(五臺山)에 이르렀더니 문수보살(文殊菩薩)이 현신(現身)해서 감응하여 비결(秘訣)을 주면서 그에게 부탁한다.  "너희 나라의 황룡사는 바로 석가와 가섭불(迦葉佛)이 강연하던 곳으로, 연좌석(宴坐石)이 아직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인도의 무우왕(無憂王)이 황철(黃鐵) 몇 근을 모아서 바다에 띄웠던 것인데, 1,300여 년이 지난 뒤에야 너희 나라에 이르러서 불상이 이루어지고 그 절에 모셔졌으니, 이는 대개 위덕(威德)의 인연이 그렇게 만들어 준 것이다(별기別記에 실려 있는 것과 같지 않다).

불상(佛像)이 이루어진 뒤에 동축사(東竺寺)의 삼존불(三尊佛)도 역시 황룡사로 옮겨져 안치(安置)했다.  <사기(史記)>에는 이렇게 말했다.  "진평왕 5(6)년 갑진년(甲辰; 584)에 이 절의 금당이 이루어지고, 선덕왕(善德王) 때에 이 절의 첫 번째 주지(住持)는 진골(眞骨) 환희사(歡喜師)였고, 제2대 주지는 자장국통(慈藏國統), 그 다음은 국통혜훈(國統惠訓), 그 다음은 상률사(廂律師)였다."  이제 병화(兵火)가 있은 이후로 대상(大像)과 두 보살상(菩薩像)은 모두 녹아 없어졌고, 작은 석가상만 남아 있을 뿐이다.

찬(讚)해 말한다.

 

속세(俗世) 어느 곳인들 참 고향이 아니랴만,

향화(香火)의 인연은 우리 나라가 으뜸일세.

이것은 아육왕(阿育王)이 착수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월성(月城) 옛터를 찾느라고 그랬던 것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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