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덕사는 문무왕 당시 당나라의 악붕귀가 사천왕사를 조사하러 왔을 때
사천왕사의 존재를 감추기 위하여 급조한 절이다.
절 입구는 벌지지 쪽인데 당간지주와 금당지, 동서탑의 자리가 뚜렷이 남아 있다.
13층 목탑으로 추측되는 곳에는 심초석, 十자형 목탑지, 기둥 받침들이 많이 남아 있다.
<삼국유사기록>
그 후(668년당군의 1차 침입) 신미년(671)에 당나라는 다시 조헌을 장수로 삼아
5만명의 군사를 보내 정벌하도록 했는데, 또 그 비법을 썼더니 이전처럼 배가 침몰되었다.
이때 한림랑 박문준이 김인문과 함께 옥중에 있었다. 고종이 박문준을 불러서 말하였다.
"너희 나라에는 무슨 비법이 있어서 두 번이나 많은 병사를 보냈는데도 살아돌아온 자가 없느냐?"
박무누준이 아뢰었다.
"저희 속국의 신하들은 윗나라에 온 지 10여 년이나 되어서 본국의 일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 나라가 상국의 두터운 은혜를 입어서 삼국을 통일하였으므로 그 은덕을 갚기 위해서
새로 낭산 남쪽에 천왕사를 짓고 황제의 만수무강을 빌며 오랫동안 법회를 열고 있다고 합니다."
고종은 이 말을 듣고 아주 기뻐하며, 예부시랑 악붕귀를 신라에 사신으로 보내어 그 절을 살피게 하였다.
왕은 사전에 당나라 사신이 곧 올 것이라는 말을 듣고는 이 절을 보여주어서는 안 될 것으로 판단하고
그 남쪽에다 따로 새로운 절을 짓고 사신을 기다렸다. 사신이 와서 말하였다.
"먼저 황제의 만수를 비는 곳인 천왕사에서 절을 올리겠습니다."
이에 인도하여 새 절을 보여주었다. 그 사신은 문앞에 서서 말하였다.
"이것은 사천왕사가 아닙니다."
덕요산의 절을 바라보면서 끝내 들어가지 않았다.
그리하여 나라 사람이 금 천 냥을 주니 그 사신은 돌아가 아뢰었다.
"신라는 천왕사를 지어 새 절에서 황제의 만수를 빌고 있었을 뿐입니다."
이에 새 절은 사신의 말에 따라 망덕사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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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경덕왕 14년
망덕사(사지는 경주 낭산의 동남쪽)의 탑이 진동하였다.
당의 令狐燈이 쓴 '신라국기'에 이르기를
'신라가 당을 위하여 이 절을 세운 까닭에 그렇게 이름한 것이다.
두 탑이 상대하여 있는데 높이는 13층이다.
홀연히 층탑이 진동하고 開合하여 수일 동안이나 쓰러질듯 하였다.
그 해에 안록산의 난이 일어났으니 아마 그것의 반응이었던가 한다'고 하였다.
목탑터
금당터
서편 목탑터 심초석
(참고자료스크랩)
사찰이 탑 중심에서 금당중심으로 변화하여 갔다는 것은 통일신라시대에 지어진 건물에서 찾아볼 수 있다.
비슷한 시기에 지어진 사천왕사, 망덕사, 감은사, 그리고 시대가 떨어지는 천군리사지, 불국사를 비교하여 보면 몇 가지 차이점을 알 수 있다. 우선 회랑으로 둘러싸여 있는 전체 규모를 보면 사천왕사가 제일 크고
망덕사, 천군리사지, 불국사 순으로 크기가 줄어든다.
그러나 망덕사와 사천왕사를 보면 후에 지어진 천군리사지나 불국사보다 전면의 회랑 폭이 넓다.
이는 목탑의 규모가 석탑보다 상대적으로 클 수밖에 없기 때문에 회랑의 폭이 넓어진 것으로 생각한다.
금당의 형식을 보면 비슷한 시기에 지어진 사천왕사, 망덕사, 감은사는 전면이 넓은 장방형의 평면을 보이고 있는 반면 천군리사지와 불국사의 금당은 정사각형에 가까운 평면을 보이고 있다.
금당의 면적을 보면 사천왕사( 2280尺²),망덕사( 1170尺²),천군리사지( 2491尺²),불국사( 2392尺²)이다.
여기서 사천왕사의 경우 망덕사, 천군리사지, 불국사보다 훨씬 큰 규모를 보이고 있어 비교할 수 없으나
비슷한 절의 규모를 보이는 세 절의 경우 후에 지어진 천군리사지와 불국사의 금당이 훨씬 큰 것을 알 수 있다.
우선 평면의 형식에서 장방형과 정방형평면의 차이는 많은 의미를 지닌다.
장방형평면에는 앞뒤가 깊지 않기 때문에 불상을 모셔두고 별도의 의식을 할 공간이 협소하다.
따라서 장방형평면에서는 불상을 모셔두는 것을 목적으로 만들어졌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정방형평면은 중앙에 불상을 모셔두어도 의식이 가능하다.
김성우교수는 쌍탑가람의 형식의 등장과 금당의 익랑의 보편화가 같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것은 금당의 활용도가 높아지고 사람의 출입이 잦아지면서 기능적인 배려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닐까한다.
익랑의 설치는 쌍탑가람에서 금당의 중요도가 높아지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감은사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감은사는 목탑계열의 가람에서 석탑계열의 가람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우선 감은사의 탑을 보면 매우 큰 규모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탑의 규모는 초기 탑인 고선사지 탑과 함께 장대한 규모를 자랑한다.
탑의 규모가 큰 것은 목탑에서 석탑으로 전이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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