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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재 이언적을 제향하고 후진을 교육하기 위해 1572년에 건립한 옥산서원(경주시 안강읍 옥산리)의 구인당(求仁堂). 1574년 사액(賜額)을 요청, '옥산'이라는 이름과 서책을 하사받았다. '玉山書院' 현판 글씨는 추사 김정희 작품이다. | |
| 회재(晦齋) 이언적(1491~1553)은 화담 서경덕과 함께 한국적 성리학의 토대를 만든 대표적 성리학자다. 회재는 특히 조선의 성리학자들이 금과옥조처럼 받들던 주희(朱熹)의 주장을 바꿀 정도로 독자적인 학문 체계를 구축했다. 그는 정주(程朱)의 학설을 따르면서도 답습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독창적인 생각을 바탕으로 학문을 펼쳤던 것이다. 회재는 '내가 날마다 세 가지를 반성하니 내 몸이 하늘을 섬김에 다하지 못함은 없는가, 임금과 어버이를 섬김에 정성되지 못함은 없는가, 마음을 지킴에 바르지 못함은 없는가'라는 글을 책상 위에 써 붙이고 스스로를 경계했다. 삶에 대한 자세가 어떠했는지 엿볼 수 있다.
퇴계 "선생의 사람됨을 흠모하지 않을 수 없었다"
퇴계 이황은 회재에 대해 '선생이 살아 계실 때 스스로 깊이 감추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선생이 도를 지니고 있음을 알지 못했다. 내가 어리석어, 일찍이 벼슬에 나아가 선생을 우러러 보고서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해 이런 문제를 가지고 깊이 물어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 10여년 전부터 병이 들어 재야에 묻혀 있으면서 하잘 것 없는 것들을 살펴보는 가운데, 의지할 데를 찾아서 물을 곳이 없음을 돌아본 후에야 억울하고 원통한 마음으로 선생의 사람됨을 흠모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평했다.
또한 '오호라, 우리나라가 예로부터 인현(仁賢)의 교화를 입었으나 그 학문은 전해지지 않았다. 고려 말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호걸스러운 선비로서 이 도에 뜻이 있고, 세상에서 또한 도학자라 칭송한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후세에 칭송을 받더라도 학문의 연원을 징험할 바가 없으며, 후세의 학자들로 하여금 찾고 따르게 할 바가 없어서 지금의 암울한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선생은 학문을 주고받은 곳이 없으면서도 스스로 유가의 학문에 힘을 쏟아 어렴풋한 속에서도 날로 드러나고 덕이 행동과 딱 들어맞았으며, 밝게 글로 표현해 후세 사람에게 전해지게 했으니, 우리나라에서 찾아보아도 선생과 짝할 사람은 드물 것이다'며 찬사를 보냈다.
화담의 기(氣) 중시 철학과 달리, 이(里) 중시 철학의 출발점이 된 회재의 학문은 회재와 퇴계의 앞 글자를 따서 '회퇴(晦退)학파'라고 불릴 정도로 퇴계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고, 그 결과 영남 사림들의 성리학 형성에 선구적이고 지대한 역할을 했다.
망기당 조한보와'인간의 도덕법칙'두고 열띤 논쟁
회재의 사상 형성에 큰 획을 그은 일은 망기당(忘機堂) 조한보와의 태극논쟁(太極論爭)이다. 회재 20대 후반에 이뤄진 이 논쟁은 회재의 사상뿐만 아니라 한국 성리학의 흐름에서도 큰 의미를 지닌다. 망기당은 만물의 본질인 태극이 자질구레한 우리의 일상생활을 넘어서서 초월적인 무엇인가에 들어있다고 보았고, 회재는 이와 달리 태극이 초월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구체적 현실을 떠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태극은 만물의 본질인 동시에 진리다. 유가는 도덕적 본성과 생리적 본성이 궁극적으로 다른 것이 아니라고 봄으로써 도덕법칙을 자연법칙으로 이해했다. 따라서 이 논쟁은 말하자면 인간의 도덕법칙에 대한 논쟁이라 할 수 있다. 망기당은 도덕법칙이란 보편적인 것이며 가장 궁극의 진리이기 때문에 구체적인 사람 하나하나의 행동을 넘어선 초월적인 곳에 있다고 생각했다.
이에 비해 회재는 비록 도덕법칙이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사람들의 일상 행동을 떠나서 있는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예를 들면 사람다움이란 보편적인 개념이지만 구체적인 행동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며, 나이에 따라 아버지답고·자식답고·형답고·남편답고·학생답고·선생다운 모습에서 사람다움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회재의 이같은 주장은 중국 성리학자의 말을 인용한 부분이 많지만, 그 견해를 그대로 답습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을 토대로 자신의 주장을 만들어가면서 중국 학자들의 우주론적 논점을 인간론 중심의 한국적 성리학으로 바꾸어 간 것이다.
논쟁과정에 오간 회재의 편지글은 탁월했다. 선조 때 명나라에서 온 사신이 조선에도 공맹(孔孟)의 심학(心學)이 있는지를 물으면서 관련 자료 보기를 요청했을 때, 두 사람간에 오간 편지를 묶은 '태극문변(太極問辯)'을 보여주었을 정도였다.
朱熹의 호 '晦庵'서 '晦'를 따와 자신의 호 '晦齋'로
회재는 경주 양동마을에서 태어나 을사사화 여파로 유배돼 강계에서 63세의 나이로 숨질 때까지 사화(士禍)의 격동기를 살면서 한국 성리학의 기초를 다졌다. 원래 이름은 적(迪)이었으나 31세 때 이름이 같은 사람이 있어 중종의 명에 의해 언(彦)자를 더해 언적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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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재종가 무첨당 대청에서 진행되는 불천위 제사 모습. 일반 제관들은 무첨당 마당에서 참례한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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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재 불천위 제사 장소인 무첨당. 조선중기 건물이며, 보물로 지정돼 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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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재가 벼슬에서 물러난 뒤 고향인 경주 안강으로 돌아와 1532년 건립한 독락당(獨樂堂)의 별채인 계정(溪亭). 회재는 이곳에서 학문에 열중, 그 깊이를 더해갔다. | | |
고쳤다. 호 '회재'의 '회'는 주희의 호 '회암(晦庵)'에서 따온 것이니, 주희를 흠모한 정도를 알 만하다.
10세 때 아버지를 여읜 회재는 어린 시절 외삼촌(손중돈)의 임지를 따라 다니며 공부를 했다. 23세 때 소과에 합격했고, 24세 때 별시 문과에 합격해 벼슬길로 들어섰다. 27세 되던 해 첫날에는 '외천잠(畏天箴)' '양심잠(養心箴)' '경신잠(敬身箴)' '개과잠(改過箴)' '독지잠(篤志箴)'을 지어 스스로 경계했다. 양심잠의 내용이다.
'마음이란 영묘한 것으로, 안으로는 뭇 이치를 갖추고 밖의 온갖 변화에 응한다. 이 마음을 잘 함양하면 천지와 합일하게 된다. 마음을 함양하는 방법은 경(敬)이다. 경이란 마음을 오롯하게 하는 것이다. 마음이 고요할 때는 곧 태극이니, 경으로써 마음을 오롯하게 해야 본체가 드러난다. 마음을 어디에 집착하거나 흐트리지 말고 고요히 간직해야 명정한 가운데 대공무사(大公無私)하게 된다. 천지만물이 제각기 형식을 지키면서 본성을 실현해 나가도록 도우려는 인간의 노력은 실로 경공부의 근본이 된다.'
사간원 사간(司諫) 시절, 김안로에게 세자 보양관(輔養官) 소임을 맡기자는 여론을 반대했다가 좌천 후 파직당해 안강으로 낙향, 1532년 독락당(獨樂堂)을 짓고 학문에 열중했다. 공부는 더욱 깊어졌다. 6년 후 다시 벼슬길로 나아갔으나 57세 때 명종 대신 수렴청정으로 권력을 휘두르던 문정왕후와 그 측근들을 비방하는 글이 양재역 벽에 붙은 사건에 연루돼 평안도 강계로 귀양간다. 유배지에서 주희의 '대학장구'를 개정한 '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와 왜 그렇게 고쳤는지를 설명한 '속대학혹문(續大學或問)'을 짓는다. 회재의 독창적인 사상이 잘 나타나 있는, 가치 높은 저서다. 훗날 정조는 이 책(속대학혹문)을 간행하면서 직접 서문을 써서 앞에 붙였는데, 이언적의 저술 동기를 높이 사면서 '주희를 잘 배웠다'고 칭찬했다.
회재의 경(敬)공부 수준을 말해주는 일화다.
'흔들리지 않는 힘이 있어 창졸간이라도 빠른 말과 급한 낯빛을 한 적이 없이, 차분하고 바름(靜正)으로 스스로를 지켰다. 전주 부윤 시절, 명절을 맞아 민간의 놀이를 하였다. 감사인 모재(慕齋) 김안국은 정인군자인데도 종종 돌아보고 웃는 일을 면하지 못했는데, 선생은 초연하게 보지 못하는 것같이 했다. 옥당에서 번을 서면서 혹 동료들과 종일토록 서로 대하여도 말하지 않았으니 이는 경을 유지하는 공부가 깊어서이지 애써 그렇게 한 것은 아니었다.'
퇴계가 지은 회재 행장 글이다.
■'회재 불천위'이야기
종부가 아헌 안 올리고 煎을 제수로 안써
祭酒, 20일전 담가 사용
불천위 회재의 기일은 11월23일(음력)이며, 제사는 회재종가(경주 양동마을)의 무첨당 건물에서 12시40분쯤 시작된다. 요즘 참석 제관은 50~60명이다. 제수는 옥산서원이 마련한다.
회재종가에서는 다른 종가와 달리 제수로, 전(煎)을 쓰지 않는다고 했다. 회재 종손 이지락씨는 "전 종류는 양을 푸짐하게 하려는 의도인 듯한데 옛날에 물산이 풍부해서 따로 안 쓴 듯하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전해오는 이야기를 들려줬다. 일제시대(1926년경) 총독부 관리가 양동마을 무첨당에 와서 대접을 잘 받고 간 뒤(마을 입구에서부터 흰 천을 깔아 맞이했다 함) 동해안 일정 구간의 어민들에게 나라에 낼 세금을 면제하는 대신 무첨당에 내도록 했으나, 회재종가는 이를 거절했다. 그러나 어민들은 나라에 세금을 내지 않게 된만큼, 보답하는 마음으로 그 이후 한동안 좋은 어물을 서로 다투어 회재종가에 공급해왔다고 한다.
제사 때 쓰는 술인 제주는 집에서 제사 20일 전에 담가(재료는 쌀과 누룩) 사용한다. 그리고 아헌을 종부가 올리지 않는데 그 이유를 종손이 설명했다. 제사 장소인 무첨당 대청 마루의 대(臺)가 다른 종가보다 높아서, 대청 아래 마당에서 제사에 참례하는 제관들에게 종부의 뒤태가 그대로 드러나게 되는 환경이라 종부의 아헌을 피한 듯하다는 것이었다. 불천위 사당은 무첨당 건물 오른쪽 뒤편에 자리잡고 있다. 김봉규기자
■ 이언적 약력
△1491년 경주 양동 외가에서 출생 △1514년 별시 문과 합격 △1530년 사간원 사간 △1540년 예조참판, 성균관 대사성, 사헌부 대사헌 △1542년 이조판서, 안동부사 △1543년 경상도관찰사 △1547년 양재역벽서사건에 연루돼 강계 귀양 △1553년 별세 △1568년 영의정 추증 △1569년 시호 문원(文元: 도와 덕이 높으며 학문이 넓다는 의미의 文, 의를 주로 삼아 덕을 행한다는 뜻의 元) △1610년 문묘 배향
영남일보 투데이 영남브리핑 경북지역 〃불천위 기행〃 연재 내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