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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경주 남산 지킴이 김구석!

박근닷컴 2011. 4. 5. 12:59

경주 남산 지킴이 김구석 / "내 이름은 '남산구석' 남산에 죽고 못살죠" / 공직생활 접고 남산알리기 몰두 … 종교이자 신념

 

경주=글·사진 김미리기자miri@chosun.com / 입력 : 2005.05.12 15:12 15' / 수정 : 2005.05.12 17:11 59'


▲ "눈 감아보이소. 신라 석공 정(釘) 소리 들리능교. 이 단단한 돌덩이에 부처 새기던 마음. 그 마음 전할라꼬 내가 여기 있는기라요." 남산 냉곡 선각육존불 앞에 앉은 김구석씨.
불교 성지 경주 남산에 가면 별난 사내 하나와 부딪히게 된다. 사내는 자기 이름을 ‘남산구석’으로 소개한다. 어허, 성이 남, 이름이 산구석이란 말씀인가. “‘남산’이 호(號)고, 이름이 ‘구석’임더, 김구석. 몇 년 전에 부산에서 놀러 온 한학자 선생이 호 지어주데요. 남산에 미쳤다고. 허허.”
 

이름부터가 별스럽다. 김구석(51·경주남산연구소 소장). 농반진반으로 붙은 호처럼 남산 구석구석 돌아다니는 데 근 40년을 보낸 특이한 사내다. 원 직업은 공무원이었다. 울산시청 산림과에서 시작해 경주 사적공원관리소 사업과까지 18년 동안 공직 생활을 했지만 머릿속에는 온통 남산, 남산이었다. 불교 신자였기에 처음엔 취미삼아 남산 곳곳 널려 있는 불상·탑·절터 공부하고, 그 얘기들을 산에서 옷깃 스친 인연들에게 개똥철학 보태 풀어놨다.

 

한 번 두 번 그게 쌓이더니 ‘특기’가 됐다. “직장에서 ‘남산 도사’가 되부렸는기라. 외지에서 손님 오면 으레 나를 찾더라고. 신나서 손님들하고 남산 한 바퀴 휘휘 저으며 공부한 거 탈탈 털어놨지요.” 결국 근무시간 절반은 사무실에서, 절반은 남산에서 보내게 됐다. 1984년에는 남산에 죽고 못사는 지인 몇몇하고 ‘남산사랑모임’을 만들어 남산 바위 하나, 기와 한 장에 서려 있는 신라 역사를 알려 나갔다.

 

특기가 ‘전공’이 된 건 1997년이었다. 경주 동국대 고고미술사학과에 입학했다. 만학(晩學),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터다. “스승 윤경렬 선생(작고·함경북도에서 태어나 근대 사학자 고유섭 선생의 권유로 경주에 정착한 이래 신라 문화를 알리는 대표적인 학자로 생을 살았다) 보고 맘 먹었심더. 이 분이요, 50년 동안 신라 연구 죽도록 하셨는데 돌아가실 때까지 무늬없는 ‘향토 사학자’로만 불리셨다 아닝교. 초등학교밖에 못 나오셨거덩. 선생님 저서 군데군데 베껴 자기 꺼인양 버젓이 논문 내는 교수도 여럿 봤지요. 배움이 짧으면 그렇게 설움 당하더라고요.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아님니꺼.”

 

늦게 배운 도둑질, 무섭다. 마흔 훌쩍 넘어 시작한 공부가 그리 재미있을 수 없었다. 머리 싸매며 밤을 새웠다. 학부를 졸업했는데도 여전히 굶주렸다. 회사와 남산,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어차피 언젠가 선택해야 할 운명! 1999년 사표를 던졌다. 서울 동국대 대학원(미술사 전공)에 진학했다. 1주일에 두 번은 기차 타고 서울과 경주를 오갔다. 사무실과 남산, 두 공간이 이제는 강의실과 남산으로 바뀌었다. 그 무렵 본격적으로 남산 연구를 위해 ‘경주남산연구소’(www.kjnamsan.org)를 열었다. “공부 잘 했지요. 선생 한 번 해보는 게 소원이었는데 대학원 나오니까 불러주는 학교도 있데요. 다 남산이 준 선물인거라.”

 

산에 미쳐 멀쩡하던 회사 때려친다는데 가만히 있을 아내가 어디 있겠는가. “마누라요? 아무 소리 못하죠. 갱상도(경상도)에서 마누라가 남편 하는 일에 가타부타해대면 집에서 쫓겨나요. 그냥 내 맘대로 저지른 거지, 껄껄.” 겉은 웃지만 속은 미안함이다. “선생님으로는 최곤데 친구 남편으로는 ‘개뿔’이라요.” 그 마누라의 친구이자 강의 나가는 학교 제자인 이동숙씨 타박에 대꾸 하나 못한다. 맘 고생했던 아내 임희숙씨는 지난해 서라벌대 문화재해설과에 입학해 남편과 한 길을 걷고 있다.

 

남산, 대체 그 산이 뭐길래. 경주 토박이지만 15살에 처음 남산에 올랐다. 그냥 동네 뒷산 정도로만 생각했다. 교복 단추 풀고 깡소주 한 병 들고 바위에 새겨진 부처에 기대 누워 땡땡이 치기, 그게 전부였다. 그런데 1981년 울산에서 공무원 생활을 시작하면서 그제서야 확인했다. 남모르게 싹텄던 사랑의 감정을. 남산의 불상들이 보고 싶어서 미칠 것 같았다. 해질녘 붉게 타오르던 마애관음입상의 붉은 입술, 새벽빛에 포름하게 빛나던 석조여래좌상의 포근한 품, 가을볕에 노랗게 익던 선각육존불….

 

“남산은 ‘신라의 자궁’입니더. 신라를 연 박혁거세가 이곳에서 태어났고, 신라 천년 막을 내린 포석정도 여기 아닝교. 500m도 안 되는 자그마한 산에서 역사가 시작됐고 끝난 거죠. 산은 무지랭이 백성들에게 믿음을 줬어요.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하면 좋은 곳에 간다카이 절하고 정성을 올린 거지. 그 정성이 모여 성산(聖山)이 됐고요.”

 

간절한 신라인들 바람이 불교문화와 함께 서려 있는 남산을 알리고 지켜나가는 거야말로 “화랑의 후예가 할 일”이라 믿는다. 그래서 구석씨에게 남산은 ‘종교’다. 지금까지 800번이 넘는 산길 안내와 강의 120번으로 3만6000여명에게 그 종교를 설파했다.

 

그렇게나 많으냐니 이제 시작이라 말한다. 헤어질 때, 갓 출가한 사미승들이 익히는 원효대사의 발심수행장 한 구절을 읖조린다. ‘月月移移 忽來年至(월월이이 홀내년지)/ 年年移移 暫到死門(연년이이 잠도사문), 다달이 바뀌어 가는 게 홀연히 한 해 지나 내년에 이르고 /한 해 두 해 지내다 보니 잠깐 사이에 죽음 문턱에 이르네.’

 

“우리 갈 길이 바빠. 시간은 흐르고 눈 뜨면 죽음 문에 와 있을지 몰라. 그러니 젊을 때 열심히 살아야지. 기자는 열심히 글 쓰고, 난 남산 빨리 알려야지.” 구석씨 얼굴에 부처의 미소가 설핏 기운다.


▲ 머리가 잘려 나간 석조여래좌상.

[추천코스] 보름달에 듣는 신라의 전설 ' 남산 달빛 기행'

‘寺寺星張 塔塔雁行(사사성장 탑탑안행), 절들은 하늘의 별만큼 많고, 탑들은 기러기가 줄지어 서 있는 것 같다.’ 삼국유사는 서라벌(경주의 옛 이름)을 이렇게 묘사한다. 그 많고 많은 불교 유적 가운데 열에 아홉은 남산에 있었다. 지금도 절터 147곳, 불상 118체, 탑 96기 등 곳곳에 유적이 널려 있다.

 

색다르게 남산을 즐길 법이 없을까. 경주남산연구소에서는 매월 음력 보름 ‘남산 달빛 기행’을 실시한다. 손전등 하나에 의지해 보름달 아래 펼쳐지는 남산의 장관을 만끽하는 코스. “햇빛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달빛에 젖으면 전설이 된다”고 했다. 깜깜한 밤 안내자들이 들려주는 신라의 전설이 귀에 콕콕 박힌다. 대금 연주도 곁들여진다. 5월 21일, 6월 18일, 7월 16일, 8월 20일, 10월 15일, 11월12일, 12월17일 실시. 코스는 날짜마다 다르다. 약 4시간 소요. 참가비 무료. 참가신청 www.kjnamsan.org나 이메일 kjnamsan@hanmail.net 으로. 남산연구소는 이 밖에 서남산(삼릉~용장), 동남산(국사골~지바위골), 남남산(열암골~칠불암) 코스를 매주 일요일 무료 안내한다.

출처 : 경주학연구원 慶州學硏究院
글쓴이 : 경주학연구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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