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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구례 연곡사 - 현각선사탑비/순절비/삼층석탑

박근닷컴 2011. 5. 13. 03:35

 

연곡사(鷰谷寺)는 우리 현대사의 질곡을 간직한 피아골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직전리(稷田里) 조금 못 미쳐 있다. 피아골은 한국전쟁 직후 빨치산의 아지트였던 탓에 이들을 토벌하려는 군경과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피아골이란 이름도 당시 이곳에서 죽은 사람들의 피로 골짜기가 붉게 물들어서 생겼다고들 하지만, 직전리라는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피를 많이 가꾸었다고 해서 생긴 '피밭골'이란 이름에서 왔다.

피아골 입구에 있는 연곡사는 8세기 중엽 경덕왕 때 연기조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전한다. 하지만, 현재 남아 있는 유적들로 볼 때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기에 창건된 절로 추정한다. 이 절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인조 5년(1627년) 소요대사 태능(逍遙大師 太能, 1562~1649)에 의해 복구되었는데.
참고로 현각선사 부도비 바로 위쪽에 '연곡사 서부도'라고들 하는 부도가 하나 있는데, 이 부도가 바로 소요대사의 부도이다.

연곡사는 그 후 1895년쯤 조선 왕가에 신주목(神主木)으로 봉납한 밤나무의 남용으로 문제가 생겨 절이 망할 지경에 이르자 승려들이 떠나 결국 폐쇄되기 이르렀다고 한다. 구한말과 한국전쟁 때 다시 파괴되었다가 근래에 들어서야 중창 불사가 크게 이루어졌다.

  

 

 

 

연곡사 현각선사 부도비

'연곡사 현각선사 부도비(鷰谷寺 玄覺禪師 浮屠碑)'는 연곡사 대적광전 서쪽 입구에 있는

커다란 부도비이다. 이 부도비 바로 위쪽 언덕에는

앞서 잠깐 언급했던 '연곡사 서부도'가 있다.

서로 비교적 가까이에 있지만, 이 부도와 부도비는 같은 스님의 것이 아니다.

부도비는 현각선사의 부도비이고, 부도는 소요대사의 부도이다.

 


 


현각선사 부도비는 지금 비신은 사라지고 귀부와 이수만 남았다.

사라지고 없지만 비의 비문은 학사(學士) 왕융(王融)이 지었고,

동정주국(同政柱國) 장신원(張信元)이 썼다고 한다.

그리고 옛 탁본에 의하여 고려 경종 4년(979년)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고 한다.

거북은 네 다리를 사방으로 뻗쳐 납작 엎드린 형상이며,

왼쪽 앞발을 살짝 들어 앞으로 나서려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새로 나라를 연 시기의 포부와 힘을 담고 있는 듯 귀부의 조형은 매우 거대하고 당당하다.

 

이수의 뒷면

이수에는 여덟 마리의 용이 앞면과 뒷면에 각 네 마리씩 새겨져 있다.

 이들 용은 구름 속에서 화염에 싸인 여의주를 다투는 것과 바깥쪽을 향해 있는 것으로 나뉘어 있다.

 

 

 

이수 앞면의 전액(篆額)에는 '현각왕사비명(玄覺王師碑銘)'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어

 이 글자만으로도 이 부도비가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있다.


비좌 옆면

비좌(碑座)의 옆면에도 문양이  안상 가운데 새겨진 귀꽃이 인상적이다.

 그리고 귀부 등의 귀갑문에도 꽃과 '卍'자를 새겨 멋을 한껏 부렸다.

 



그런데 귀부와 이수의 돌 빛깔이 마치 같은 부도비의 것이 아닌 것처럼 너무 다르다.

귀부는 흙빛이지만 이수는 회색에 가깝다.

이는 귀부의 석재에 철분 성분이 많아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지금처럼 변한 것으로 본다.

 

 

귀부 머리

귀부는 지나치게 큰 머리와 큼직한 입이 특징이다

 부리부리한 눈과 함께 입 주위로 갈기 모양의 수염이 새겨져 있다.

 어찌 보면 조금 우스꽝스럽기도하다.

 비신은 임진왜란 때 화재로 손상을 입은 것이 풍화에 의해 깨졌다고 하며

 거기에다가 구한말 의병항쟁 도중에 일본군의 약탈과 방화로

 이 부도비는 더욱더 파괴되었다고 한다.

 지금의 모습은 당시 흩어져 있던 거북 조각을 1970년에 한데 모아 붙여 놓은 것이라고 한다.

 

 

 

 

 

 

 

 

 

 

 

 

 

 

 

 

 

 

 

 

 

 

 

 

 

 

 

 

 

 

 

 

의병장고공광순순절비

 

 

 

 

의병장 고광순 순절비

고광순(高光洵, 1848∼1907)은 1895년 을미사변 이후 의병을 조직하여 전라도 지역에서 일본군과 싸우던 중 연곡사에 들어와 유격전을 펴다가, 1907년 8월 26일 일본 군경의 야간기습공격을 받아 같이 있던 의병들과 함께 순절하였다. 이때 연곡사도 불에 탔다고 한다.

이처럼 연곡사 현각선사 부도비는 말 없는 가운데 고난스러웠던

 우리 역사의 한 부분을 어렴풋하게나마 보여주고 있다.

 

 

 

 

 

 

 
연곡사는 임진왜란과 구한말의 의병활동, 그리고 한국전쟁에 이르기까지 갖은 난리를 치르면서 불에 타지 않는 돌로 만든 것을 제외하곤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는데.

최근에 이루어진 중창 불사로 지금에 모습이다.

연곡사 삼층석탑은 일주문을 지나 대적광전으로 들어가기 전 왼쪽 채소밭에 서 있다.

이 탑은 높이는 4.3m로, 무심코 걷다 보면 십중팔구는 그곳에 탑이 있는지조차 모른다.

 

 

연곡사 삼층석탑은 얼핏 보면 통일신라시대 석탑의 전형을 따르고 있는 그저 평범한 탑처럼 보인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당시 탑에선 볼 수 없는 특이한 점이 있다.

통일신라시대나 고려시대 초의 석탑 기단부는 대부분이 단층 내지 2층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 석탑의 기단부는 3층으로 되어 있다.

 특이한 예라고 할 수 있다.
기단부를 굳이 3층으로 한 까닭이 과연 무엇이었을까?

몸돌과 지붕돌은 각기 다른 돌로 이루어졌으며

 각 몸돌에는 모서리 부분에 우주를 새긴 것 외에는 별다른 장식은 없다.

 

3층 지붕돌이 떨어져 뒹굴던 것을 1967년 1월에 완전히 해체수리하여 복원하였는데,

 이때 맨 위층 기단의 자연 판석 위에서 높이 23.5cm 되는 금동여래입상이 나왔다고 한다.

이 입상은 현재 동국대학교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한다.

각 부재의 구성양식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 말이나 고려시대 초에 만든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나

 석탑 안에서 발견된 금동여래입상의 연대가 고려시대 초로 내려오는 것으로 현각선사가 활동하던 10세기 중반쯤 세워진으로 본다함.

 

 

 

 

 

 

 

연곡사 화장실(해우소)

 

소지품,특히 주머니에 휴대폰이 들었다면 조심하고 볼일을 볼일이다.

멋모르고 들어가서 조심조심 했던일이 지금도 아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