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탑 [ 塼塔 ]
- 유형
개념용어
점토(粘土)를 방형 또는 장방형으로 빚어서 말린 뒤 800∼1,000°C로 가마에서 구워 만든 전으로 축조한 탑. 전은 여러 가지 용도에 쓰이므로 크기나 모양도 용도에 따라 다양하나 탑을 축조하는 데 사용되는 전의 크기는 대개 27∼28㎝의 방형에 두께 5∼6㎝이고 사용하는 위치에 따라 반의 크기로 만든 것도 있다.
이러한 전으로 탑을 축조하였을 때 표면에는 어느 한 면만이 노출되고 모서리에서는 두 면이 노출된다. 따라서, 문양을 넣는 경우에는 노출되는 어느 한 면 또는 두 면에만 넣으면 된다. 전탑에 사용한 재료는 목탑이나 석탑의 재료와는 전혀 다르고, 더욱이 작은 덩어리들이어서 축조방법도 다를 뿐 아니라 외형에도 차이가 생긴다.
한편, 재료의 특이성으로 인한 탑 자체의 취약성을 피할 수 없어서 현존하는 예는 적으며 석재를 전과 비슷한 모양으로 가공하여 축조한 모전석탑(模塼石塔)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전탑은 인도에서 시작하여 지금도 그 유례가 곳곳에 남아 있는데, 불교의 전파와 함께 중국에 전해져서 정광(正光) 4년(523)의 축조로 전하는 숭악사(嵩岳寺) 12각15층탑을 최고(最古)의 예로 하여 적지 않은 전탑이 중국에 남아 있다. 전은 중국사람들이 즐겨 사용하던 건축자재로서 탑뿐 아니라 다른 지상의 건조물은 물론 지하에 축조하는 분묘에까지 이용되었다.
우리 나라에서도 일찍부터 전을 건조물에 이용하여 522년에 죽은 백제 무령왕의 능이 연화문으로 장식된 전으로 축조되었고, 인접한 곳에서도 문양전(文樣塼)으로 축조한 분묘가 또 발견되었으나 전탑은 건조된 흔적이 없다. 신라에서는 634년(선덕여왕 3)에 축성된 분황사(芬皇寺)에 석재를 이용한 모전석탑이 있는 점으로 보아 그 이전에 이미 전탑이 건립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뒤이어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에도 건립되었으며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색상이 다양한 전을 사용하여 각종의 문양을 표현한 건조물까지 출현하였으나, 우리 나라에서는 전문화가 생활과 밀착되지 못하여 전축고분도 현재까지는 백제의 두 가지 예가 있을 뿐이고, 전탑도 고려시대의 한가지 예를 끝으로 더 유행하지 않았다. 그러나 석재를 이용한 모전석탑이 오히려 성행한 점은 우리 나라 국민의 전재(塼材)에 대한 기호의 정도를 말하는 듯하다.
전탑이 완성된 뒤의 외형은 목탑이나 석탑과는 전혀 다른 형태가 된다. 먼저 목탑과 비교하면 기단(基壇)이 낮은 단층기단인 점은 동일하나 탑신부(塔身部)는 목탑에는 기둥이 서고 그 위에 포작(包作)이 짜여지며 한 면의 중앙 한 칸은 문을 달아서 공간으로 된 내부로 출입할 수 있도록 되었으나 전탑에서는 기둥의 표현이 없고 포작은 층단으로 형식화되었으며 내부는 꽉 차있으나 일면에 감실(龕室) 또는 문비(門扉 : 문짝)를 설치하여 내부가 공간임을 암시하였을 뿐이다.
옥개부(屋蓋部)는 목탑에서는 추녀가 위로 반전되고 낙수면에는 기와를 입혔는데 전탑에서는 처마선이 추녀에 이르기까지 수평이며 낙수면 역시 층단을 이루었으나 그 위에 기와를 입혔던 자취가 일부 전탑에 남아 있다.
이에 비하면 석탑과는 오히려 친연성이 많아서 석탑의 옥개석 밑의 층단 받침 또는 처마선이 추녀에 이르기까지 수평인 점, 내부가 가득 차서 막히고 다만 문비형을 탑신에 조각한 점 등은 동일하나 기단이 2중으로 된 점, 탑신에는 사방의 모서리에 기둥모양을 모각한 점, 옥개석의 낙수면이 완만하게 경사진 점 등은 전탑과 다르다.
이러한 간단한 비교만으로도 전탑에는 목탑의 형식이 반영되어 있고 석탑에는 전탑의 형식이 반영되어 있다는 점을 볼 수 있어서 우리 나라 탑파에서 전탑이 차지하는 위치를 짐작할 수 있게 된다.
전탑을 축조하는 데 사용한 전에는 흔히 문양이 장식된다. 현존례는 안동조탑동오층전탑과 여주신륵사다층전탑에서 볼 수 있다. 조탑동전탑은 여러번 보수를 거친 결과 시대를 달리하는 전이 섞여 있으나 그중에 신라시대 창건 당시의 것으로 보이는 아름다운 당초문(唐草文)이 돋을새김된 전이 몇 장 남아 있어서 문양전을 사용하였음이 분명하다.
신륵사전탑도 후세의 졸렬한 수리로 원형이 크게 변형되었으나 연주문(連珠文) 반원형과 함께 문양이 돋을새김된 전이 상당수 남아 있어서 당초에는 표면 전체를 문양전으로 장식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 밖에도 불상과 불탑이 돋을새김된 문양전이 청도 불령사(佛靈寺)의 탑지에 남아있고, 또, 울산광역시 울주구 농소면에서는 불상과 불각(佛閣)을 교대로 조각한 전이 발견된 일이 있다. 이러한 현상은 백제의 전축분묘에 사용된 전에 모두 화려한 문양이 돋을새김되어 있는 점과 일맥상통하는 양상이라고 할 수 있다.
전탑은 우리 나라의 풍토나 민족성에 용납하지 않았던지 건립된 수도 많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재료에서 오는 취약성으로 인한 파훼로 현존수는 석탑에 비하여 아주 적다. 현존례는 안동시내의 신세동칠층전탑·동부동오층석탑, 안동군조탑동오층전탑, 칠곡송림사오층전탑, 여주신륵사다층전탑의 5기뿐이다.
그중 신륵사의 전탑은 후세의 보수로 원형이 크게 변형되어 원래의 층수를 알 수 없게 되었으나, 송림사의 전탑에는 금동제(金銅製) 상륜부(相輪部)까지 남아 있으며 1959년의 대보수 때 귀중한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가 발견되었다.
안동 시내의 전탑 중 신세동칠층전탑은 현존하는 최고의 예로 추정되고 있으나 기단부는 후세의 변형으로 원형이 아니며, 상륜부에는 금동제 상륜이 있었으나 임진왜란 때 명장(明將)이 헐어냈다고 읍지인 ≪영가지 永嘉誌≫에 기록되어 있다. 동부동오층전탑은 각층에 형식적인 감실이 설치된 점이 특이하며 상륜부는 역시 임진왜란 때 명장이 헐어냈다고 한다. 이 두 탑에는 옥개 낙수면에 기와가 입혀 있어 주목된다.
조탑동오층전탑 역시 낮은 기단 위에 초층탑신만이 화강석으로 축조된 점은 전탑으로서는 특이하며 한 면에는 좌우에 인왕상(仁王像)을 배치한 감실이 개설되어 있다. 그 밖에도 안동시내에서는 ≪영가지≫에 있는 임하사(臨河寺) 전탑지가 확인되었으나 탑은 완전히 붕괴되어 흔적이 없고 탑지에서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었다.
안동시 풍산읍 금계리에는 4층까지 남아 있는 무문전탑이 확인된 바 있었으나 현재는 잔재만 부근에 흩어져 있다. 그 밖에도 ≪영가지≫에는 월천(月川)전탑이라는 것이 기록되어 있는 등 안동지방에서 집중적으로 건립된 사실이 주목되나 그 이유는 밝히지 못하고 있다.
또, 청도 불령사에도 문양전으로 축조한 전탑이 있었으나 일찍이 무너져 전만이 흩어져 있던 것을 한 곳에 모아놓은 것이 있다. 한편, 과거에 경주 삼랑사지(三郎寺址), 경주 현곡면 금장리에서도 탑을 축조하는 데 쓰였던 것으로보이는 전이 발견된 일이 있었다고 한다.
이상의 실존례 외에 기록에 따르면 곳곳에서 전탑을 건립하였던 사실을 알 수 있다. ≪삼국유사≫에는 청도 운문사(雲門寺)의 창건설화를 전하면서 보양(寶壤)이 옛 폐사지에 5층전탑을 세우는 인연과 경주 영묘사(靈妙寺)에 전조소탑이 있었는데 이것이 바로 양지(良志)가 조성한 것이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특히, 영묘사전탑은 ‘彫?造一小塔’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이 전탑에는 문양이 있는 전을 사용하였을지도 모른다.
또, ≪고려사≫에는 영주에 무신탑(無信塔)이라는 전탑이 있었으나 공민왕 때 정습인(鄭習仁)이 헐어서 객관을 수리하는데 사용한 사실과 고려 태조가 금천(衿川 : 경기도 시흥의 옛이름) 안양사(安養寺)에 7층전탑을 건립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데, 특히 안양사전탑은 탑내 네 벽에 불화(佛?)를 그리고 낭무(廊?) 12칸을 세우고 벽마다 한 상씩을 그리는 등 전탑으로서는 대규모의 특이한 형식이었던 듯하다. 이 탑이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실려 있는 점으로 보아 조선 초기까지는 유지되었던 모양이나 지금은 볼 수 없다.
또,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함경남도 갑산군 백탑동에도 전탑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확인할 수 없다.
「韓國塔婆의 硏究」(高裕燮, 同和出版公社, 1975)
「國寶 6-塔婆-」(秦弘燮編, 藝耕産業社, 1983)
「安東錦溪洞化人圭址塼塔」(秦弘燮 -國立中央博物館, 『美術資料』1, 1960. 8)
'☆-역사.문화관련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모전석탑 [ 模塼石塔 ] (0) | 2011.07.26 |
---|---|
목탑 [ 木塔 ] (0) | 2011.07.26 |
석탑[ 石塔 ] (0) | 2011.07.25 |
감은사지/황룡사지/불국사 가람배치도 (0) | 2011.06.14 |
부처님 수인 (0) | 2011.06.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