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12일) 오늘일정은 비림/대자은사 대안탑/섬서성박물관/화청지/병마용갱
서안은 주나라 때부터 천하의 중심이 되어온 중국의 고도였기에
서안은 우리에게 장안이라는 이름으로 더욱 친숙한 곳이다.
서주 시대에 도읍이 된 이래로 13개의 왕조가 이곳을 수도로 삼았는데,
진시황 시대에는 함양, 전한 시대에는 장안, 서경 등으로 불렸으며 당나라 때 크게 번성하였다고 한다.
원래 수나라 때 건립한 대흥성을 증축하여 장안성으로 탈바꿈하였는데
실크로드의 기점이자 중원 교통의 요지로서 당의 도읍 역할을 톡톡히 해내었다.
차창밖으로 보이는 장안성(서안성)
중국 당나라의 도성.
비림 바로 옆에는 장안성을 둘러싼 성벽이 붙어 있으므로 이쯤에서 성벽위로 한번 올라가 보는 것도 좋으련만
우리는 지나왔다. 서안은 당나라 때까지만 해도 장안성으로 불렸고 원나라때는 봉원성으로 불렸다고 한다.
현재의 장안성벽은 당 장안성의 기초 위에 명나라 때 새로 건립한 것이다.
성벽 둘레만도 약 14km이니 규모만 해도 대단함을 알 수 있다.
성의 높이는 12m 정도이고 성벽 위 폭은 약 12m, 성벽 아래 폭은15m 내외이다.
숫자로 얼마나 큰 성인지 약간은 짐작이 되며. 성벽 바깥에는 적의 침입을 방지하기 위한 해자가 파여 있고 물이 흐르고 있다한다.
성벽에 올라 아래를 보면 그 규모를 더욱 더 확실하게 알 수 있을터인데....
비림 가는길...
이른 아침이라 상점들은 물건들 진열준비가 한창이다.
온갖 고서화와 문방사우, 골동품들이 길거리에 즐비하다.
나도 5~6년전...몇년동안 서예를 했는데...
그때왔다면 이 종이에 눈독을 들였을터이다.
함께 운동하는 모습도 보인다. 이 같은 모습은 여행기간동안 자주 보게되는데..
길가에, 공원에 카셋트를 틀어놓고 춤을춘다.
딱히 운동복을 입고 하는것도 아니다. 편한옷 또는 구두를신고,외출복을 입고, 핸드백은 나란히 모아 걸어두고
모양새로보아 아침여가 시간에 잠시나와 운동을 하는것같지않은데.... 참 특이한 모습이다.
사회주의국가흐름이 남아 경직되고 폐쇄적일거라는건 나만의 오산이다.
자유로운 춤,그들만에 자세가 있겠지... 지정된 공간이 아닌 공원, 넓은 공터...노,소 자유롭고 한가롭다.
보는 눈의 차이인가...
공자를 모신사당 공묘라는 글..
입구를 들어선 곳이다.....
비석이 숲을 이루었다 하여 비림이라고 한다. 원래의 공묘(공자님의 사당)자리에 건축하였는데 북송 철종년간(1087년)
에 처음 지어져 지금까지 900여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비림은 현재 7개의 대형 진열실과 8개의 회랑
그리고 8개의 비정에 한대부터 청대까지 2,300여개의 비석을 수장하고 있으며, 그 중 1000여개를 전시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전서,예서,초서,행서,해서 등의 각종 서체를 비교할수 있으며 유명한 왕희지,구양순,안진경 등
서예가들의 필체를 직접 감상할 수 있다. 비림은 중국 고대 서예 예술의 보물고이자 고대 문헌서적과
비석의 조각 도안 등이 집중되어 있는 곳으로, 대외 문화 교류의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고 있는 유적지이다.
우리나라는 서예(書藝),일본은 서도(書道),중국은 서법(書法)이라고 서로 글자를 달리 표현한다.
반원 모양의 연못 분수가 있다.
공자가 말하기를 "내가 평생을 걸쳐 얻는 지식은 완전한 원형이 채 되지 않는다"했다고
그 의미를 담아 반원형으로 만들어 놓았다고...
비석의 글씨체를 탐구하고 공부하기 위해 여러 유생들이 이곳을 찾았다고 하는데,
(가이드 말로는 과거급제한 사람은 이 연못에 붓을씻게 했다는데...맞는말인지.)
원래는 공자를 모시는 사당이었는데 비석이 유실되는 것을 막기 위해
당나라 시대 이후의 비석 3천여 개를 문묘 뒤에 보관, 전시하고 있다.
입구 들어오기전 담벽에 공묘라는 글도 있듯이 이문 앞쪽에도 문묘라는 글이 있다.
공자위폐를 모시던 자리로 그 문을 아직도 남겨둔것....
들어가는 입구에는 삼문으로 되있다.
가운데 문은 과거 급제자만 출입할 수 있었고, 양쪽의 두 문으로 유생들이 출입했다한다.
왠 문이 이리도 많은지....
석물이 서 있다.
기와가 황금색인 비각이 여섯개 있는데 그러나 문이 잠겨있다.
청나라때 세운것으로 내용은 한족을 비방하는것들이라 공개를 하지않는다한다.
- 당경운종 -
711년 예종 경운 2년에 주조하여 경운종이라함
높이 205m, 둘레 1.7m ,중량6톤 ,청동주물 ,6각호형
조각한글 총18행 293자 ,당 예종 이단이 문장을 직접쓴글을 새김
중국에서 '천하제일종' 이라 한다.
종에는 앞면 하단 한면은 글이 새겨져있고 그외는 짐승모양의 용뉴와
용,봉황,소,사자,학 등 구름 넝쿨 문양이 새겨져 있다.
글내용은 도교의 신비와현묘한 내용 과 종에 대한 찬사의 말을 새겻다.
서안성 한가운데 있는 종루에 있었던 것을 옮겨온 것이다. 중국에서도 매년 정초에 우리의 보신각종처럼 이 종을 울리는데
실제로는 종을 치는 것이 아니라 녹음해서 들려주는 것이다.
종의 문양들이다. 소는 찾아보니 안찍었다.
- 碑 ? 林 -
비림박물관의 현관격의 비각에는 편액에 ‘碑林(비림)’의 글씨를 보면 ‘비(碑)’ 자의 획이 하나 없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청나라 장군 임칙서(林則徐, 1785 ~ 1850)가 쓴 것인데 그는 1840년에 일어난 아편전쟁 당시 서안에 왔다가 광동성으로 가는 중에 비림의 현판을 남기면서 전쟁에서 승리하면 시안에 돌아와 점을 찍겠다고 했는데, 그가 전쟁에서 패하고, 남경조약이 체결된 뒤 신강에 가서 죽고 말았기 때문에 아직도 그대로라 한다.
왕희지, 구양순, 장욱, 안진경, 송공권.....,
비림은 이름 그대로 각처에 산재한 유명한 비석들을 한곳에 모아 정리해 둔 곳이다.
그 곳은 한자문화권에 속한 동북아시아 서도(書道)문화의 고향이다.
진대(秦代)로부터 한(漢), 북위(北魏), 진(晋), 청(淸) 등 수 천년 중국 역사에 유명한 온갖 필법을 담은
비문을 집합시켜 놓은 곳이기 때문이다.
각화(刻畵), 석경(石經), 묘지(墓誌·墓志)를 포함하여 전서(篆書) 예서(隸書) 해서(楷書) 행서(行書) 초서(草書)등 한자의 발달과정을
한눈에 살필 수 있는 관광요지중의 요지이다.
지금부터 천 여년 전인 송나라 철종 때(哲宗·1090년)때에 조성한곳으로 알려져 있으니 유서 깊은 곳이다.
당(唐) 현종이나 ,송(宋) 휘종의 친필도 감상할 수 있다.
석대효경비
석대효경정 안에는 높이 3m에 달하는 거대한 '석대효경비( 石台孝经 碑 )'가 있다.
큰 글자는 당 현종 이융기가 공자 효경의 원문을 예서체로 쓴 것이고,
작은 글씨는 현종이 해서체로 쓴 주석이다.
석대효경에는 효에관한것과 공경의 도리에 관한것을 다루고있다.
석대효경비는 4장의 돌로 합쳐 만들었다. 비머리에는 구름문양을 새긴 비관과
아래는 조각장식을 한 3단의 받침석대가 받치고있다.
북송 원우 2년 (1087년)에 이자리로 옮겨와 비림에서 가장 이른시기의 비로 900여년된다.
이 비문에 피휘결획을 볼수있다.
(피휘(避諱)는 군주나 자신의 조상의 이름에 쓰인 글자를 사용하지 않는 관습이다.)
피할 글자의 한 획, 특히 마지막 획을 긋지 않는다.그 글자에서 획수를 빼는 결획(缺劃)
양귀비와열애로 역사에서는 그리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 현종이지만
시와 서예, 음악에 능하고 미술애호가인 다재다능한 인물.
당 현종이 아들에게 양귀비를 빼앗으며 아들은 부모에게 효와 공경을 다하라는...
비림 1실. 빼곡하게 서있는 개성석경(開城石經)
비림은 송나라의 여대충(呂大忠)이 당나라의 개성석경(開城石經)이 황폐하는 것을 애석히 여겨
문묘의 뒤에 옮기고 현종(玄宗)황제 어주효경비(御註孝經碑)와 안진경(顔眞卿) 구양수(區陽修) 저수량(楮遂良) 서호(徐浩) 몽영(夢瑛) 등이 쓴 돌비석을 그 주위에 세워 보존한 데서 비롯되었다.
명나라의 성화. 청나라의 강희,건륭.가경 연간에 수리하여 현재에 이르렀다.
그 동안 당송 이후 근대에 이르는 비석을 증치하였고,또한 순화각법첩을 비롯한 유명한 서가법첩의 석각을 많이 수집하여
지금은 500여에 이르는데 보관 건물이 여섯 채나 된다.
시안 부근은 예로부터 비석이 많았지만 당나라 말 황소의 난 때 파괴, 소실되었다.
다행히 비림만은 보존되어 당 이후의 서법 변천과 석비의 양식을 구체적으로 알수 있게 한다.
공자의 초상화
공자가 이미 기원전 500년전에 그것도 더 지난시대에 존재했다는 증거...
달마동도
달마는 중국 선종의 1대조사 소림사의 달마
귀부의 등 모양
비석이 많아 숲을 이룬다고 하여 이름 붙여진 비림(碑林) 정말 고금의 명필들이 글자와 그림을 새겨 넣은 비석들로 가득했다.
기념품으로 비석의 탁본을 판매하는 모습도 보인다.
당나라 때(635년)에 만든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
당대의 "대진경교유행중국비"이다. "대진"은 당시 로마를 뜻하고,경교는 기독교를 뜻한다.
중국 경교(景敎 : 네스토리우스파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초기 선교활동이 새겨져 있는 비석.
당나라 때 이미 기독교가 실크로드를 통해 유래했다는 사실이다.
635년에 기독교가 중국에 전파된것을 기록해둔 비다.
그리스도교는 나중에 중국에서 금지되어서 이비석은 땅속에 뭍혀잇다 발견된것이라한다.
예수가 죽은지 600년이 지나 예수의 종교가 중국으로 왔다는 증거다.
1625년 중국의 산시[陝西] 지방에서 예수회 선교사들이 발견했다.
781년에 세워진 이 비석은 중국문자로 기록되었고, 주로 성직자나 공직자였던 128명의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고대 시리아어로 서명했다.
역사책에서 볼수 있는 유명한 서예가들의 필체를 직접 볼수 있다는게
정말 심장이 두근두근 할 정도다. 글씨체가 예술이고 왜 유명한지 느낄수 있는 곳이다.
구멍이 뻥 뚫린 비석이 있다. 모두 제주도의 대문처럼 나무를 끼웠을 것이란 추측을 했지만 사실 이것은 해시계의 역할을 하는 것이란다. 비석의 초기 형태는 무덤 앞에 세우는 것이 아니고 관 위에 덮는 형태였다. 오시가 되어 해가 그 구멍에 그림자 없이 비칠 때 비로소 나머지 흙을 덮었다고 한다.
곳곳에 귀중한 유물들에 탁본하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것은 .....?
또 박물관에 상품대에서 고미술품을 파는거와
우리나라같으면 가능한일인가....
현지 가이드말로는 말매던 기둥이라한다.
동물조각 모양이 다양하다.
들어오는 입구에서도 비슷한것을 봤는데
자료를 찾아보니 소릉에서 출토된 신도에 있던 신수들이란다.
사람키보다 높은 거대대석상들이다. 해태상도 있다.
( 함께찍은 사진은 이정길선생님 사진이다.)
비림
중국에서는 상나라, 당나라, 금, 원, 명, 청조를 거치면서 이미 비림의 개념을 갖춘 박물관이 생겨 나기 시작하였으며
현재 섬서성에 위치한 고대 비림인 서안 비림이나 개봉시에 한원비림 등 여하간의 도시에서는 비문의 탁본이나
서예, 조각, 정치,종교, 경제등 역사자료들을 한자리에 모은 비림을 쉽게 찾아 볼 수가 있다. 또한사회와 문화
예술의 실체를 한자리에 모음으로써 자국문화예술의 근원 및 발전과정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게 하는 이러한
비림들은 관광객들이 그 나라에 대한 이해를 돕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고 있다.
.
(아래사진)박물관 안에 있는 석각예술관
주로 한과 당대에 능묘석각들이라고 안내문이있다.
능묘석각은 묘실안의 화상석,석곽,석관과 능원 안에 있는 기념용과 의식용 석각 등을 포함하는것이다.
당나라 석등
소릉출토 육준마
육준마
육준마란?- 구주산에 있는 당나라 태종의릉 소릉에서 나온것으로
각각 준마 1필씩을 부조한것으로 모두 6필의말로 육준마이다.
이것은 태종이 전장에서 기승한 애마를 추억하여 636년에 만든것이다.
석곽의 문양
석각전시실에 있는 노자(老子)상
당나라 석거북
당나라 이수
석곽의 문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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