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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황사 석탑의 사리장치와 장인』

박근닷컴 2011. 9. 17. 23:12

탑(塔)은 산스크리트어로 스투파(Stupa)이며 원래 의미는 신골(身骨)을 담고 토석(土石)을 쌓아 올린 불신골(佛身骨, 眞身舍利)을 봉안하는 묘(墓)건축물이다. 이것은 대부분 네모난 기단을 다진 후 그 위에 봉분에 해당하는 둥근 구조물을 얹고 다시 그 위에 우산 모양의 상륜부를 얹은 당시 인도의 무덤 형태를 따랐다.

이처럼 탑은 불교가 발생되기 전부터 인도에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장례의 모습이었으나, 기원전 5세기 초에 석가모니가 입적하자, 그를 모시기 위한 분묘(墳墓)로 축조되었다. 그로 인하여 후세에까지 불탑으로서의 형식이 내려온 것으로 보인다.

 

탑은 시대·지역·재료에 따라 그 특색을 달리하나, 탑 내부에 봉안하는 사리의 원칙만은 오늘날까지도 변함없이 지켜져 오고 있다. 탑의 내부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몸에서 나온 ‘진신사리(眞身舍利)’ 이외에도 불상, 불경 같은 ‘법신사리(法身舍利)’를 함께 봉안한다.

숭고한 석가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만든 사리용기는 소형의 골장기(骨藏器)로 직접용기(直接容器)와 외용기(外容器)로 구분된다. 직접용기는 유리, 수정, 황금 등으로 병형(甁形), 호형(壺形), 탑형(塔形)의 모양을 만들고, 다시 금·은·동·석재의 외용기에 차례로 넣어 3중, 4중으로 보호된다.

이와 같은 장엄법은 석가의 보관(寶棺)이 금·은·동·철의 4중관이었다는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에 근거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신라시대 경주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탑은 분황사 석탑(국보 30호)이다. 현재는 3층까지만 남아 있지만 주변에 모아 놓은 탑재들을 고려한다면, 7층 또는 9층이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1915년 일제강점기 수리 당시 2층과 3층 사이에서 1개의 석함이 발견되었다.

석함 내부에는 다수의 옥류(玉類)와 가위 등 많은 유물이 발견되었는데, 특이하게도 많은 여성용품과 상평오수(常平五銖) 등을 보아 고려시대에 중수를 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사리함에서 화폐가 출토된 인도의 경우, 때로는 수백 개씩 나오기도 하지만 고려시대에는 한 두뿐인 예여서 더욱 주목된다. 또한 국내 사리 외함으로 석함을 사용하는 것도 드문 예에 속한다.

사리용기는 사리를 직접 봉납하는 그릇이기에 그 제작에는 온갖 정성과 최고의 재료 그리고 기술이 사용된다. 이런 까닭에 한 나라 공예 의장(意匠)과 기술의 역사를 보여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가 바라는 것은 공예품 제작에 있어 명장과 기능보유자 등의 타이틀과 같은 명성에 집착하기보다는 내실과 본분에 충실한 순수한 장인(匠人)정신이다. 잘 만드는 기술력보다는 정성을 담아 만든 작품들이 더 오랜 기간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법이다.

또한 장인들의 설 자리를 위해 정부는 이들에 대한 관심과 새로운 접근의 정책이 필요하며 이러한 정부의 후원 아래에서야 활력 있는 전통문화의 계승과 장인으로서의 자부심이 지속 될 것이다.


김호상 신라문화유산조사단 조사연구실장, 동국대학교 겸임교수, 신라문화진흥원 이사 kjlove1966@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