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봉총(瑞鳳塚) 금관의 영광과 비극(悲劇)
우리나라 여성 중에 유일하게 신라 금관을 머리에 쓰고 신라시대 금목걸이, 귀걸이, 허리띠를 차본 사람은 평양기생 차릉파였다. 1935년 10월 차여인이 머리에 써봤던 신라 금관은 서봉총(瑞鳳塚) 금관(보물 339호 1963년 1월 21일 지정)인데 아주 기구한 운명의 금관이다. 일제 강점기인 1925년, 경주역에서 기관차고를 짓는데 매립할 흙이 모자라자 일제는 신라 고분의 봉분 흙과 자갈을 쓰기로 하고 그때 지목된 것이 서봉총 고분이었다. 그러나 1921년에 금관총 금관(국보 87호), 1924년에 금령총 금관(보물 338호)이 계속 발굴되었고 농부들의 쟁기질에도 유물이 쏟아지니까 봉분의 흙과 자갈은 공사장에 보내고 유물은 유물대로 파보자는 꿩 먹고 알 먹고의 심사로 이 고분을 파헤치기 시작하였다.
당시 이 고분은 남북 52m, 동서 35m, 높이 7m였는데 원래 10m 높이가 넘었을 것으로 추측되었다. 발굴 책임자는 조선총독부 촉탁이던 고이즈미(小泉顯夫)였고 1926년 10월 드디어 목곽(관)이 발견 되었다.
이때 일본에는 스웨덴의 아돌프 구스타프 6세(1882~1973)가 신혼여행 차 황태자 비 루이스 마운트배튼과 함께 머물고 있었다. 일본은 유럽에 잘 보일 필요도 있었고 또 구스타프가 고고학에 조예가 깊다는 것을 알고 구스타프에게 신라 고분발굴에 참가하기를 간청하였다. 구스타프는 흔쾌하게 수락하고 10월 9일 관부연락선을 타고 사이토 총독의 영접을 받으며 부산에 도착하였다. 구스타프는 10월10일 새벽, 경주 토함산 일출과 불국사를 구경하고 경주박물관에서는 에밀레종의 웅장하고 장중한 종소리를 감상하였다. 그는 10시에 노서리(路西里) 발굴현장에 도착, 몇 시간에 걸쳐 발굴 작업을 지켜보고 마지막 유물을 덮은 흙을 직접 걷어내었다. 그러자 찬란한 1500년 전의 금관이 나타났던 것이다. 그는 금관을 발굴하는 영광을 매우 흡족하게 생각하였다. 그날 저녁 구스타프가 경주 최부자 댁의 고풍스런 99칸 저택에 머물며 순 한국식 진수성찬을 대접받는 자리에서 일본 관리들은 이 고분의 명칭을 스웨덴(서전, 瑞典)을 지칭하는 서전총이라고 명명하자고 하였다.
그러나 구스타프는 정색을 하면서 “1천년 찬란한 신라의 왕실무덤을 모독할 수 없다. 왕관에 봉황새 문양이 있으니 봉황대(鳳凰臺)로 하면 어떨까 ”하며 사양하였다. 일본 관리들은 머쓱해서 “그럼 서전의 서자와 봉황의 봉을 따 서봉총(瑞鳳塚)으로 하겠습니다.” 해서 지금의 이름이 생긴 것이다.
아돌프 구스타프는 그 후 한국의 고대 문화에 심취하였고 경주 최부자 집의 환대와 양반가문의 정서에 흠뻑 빠졌다. 한국을 잊지 않고 있던 구스타프는 1950년 구스타프 5세의 뒤를 이어 69세에 스웨덴 왕에 등극하였는데 1951년 6.25동란이 발발하자 즉각 의료진을 파견하여 한국을 돕게 하였다. 그는 파견하는 간호원들에게 경주 최부자 댁의 안채와 부엌 살림살이나 생활풍습을 사진 찍어오도록 명령하였다. 그가 아무리 유럽의 황태자라 하여도 한국 양반가문의 안채를 볼 수 없었으므로 그것이 궁금하였던 것이다. 더구나 한국양반 가문의 그 융숭한 대접은 유럽의 여러 왕실이나 귀족의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별세계였던 것이다.
서봉총 금관(金冠)은 높이 30.7cm, 지름 18.4cm, 수식(드리개) 24.7cm인데 정 중앙에 山자 3개에 끝은 꽃봉오리 모양이고 양옆에는 사슴뿔 모양의 장식에 금판과 옥과 영락을 달았고 사슴뿔 장식에서 가운데로 모은 장식 끝에는 봉황새가 만들어져 있다. 그리고 귀걸이 형태에 태환(太鐶)식 드리개를 한 전형적 신라금관이다. 이 금관과 함께 금 귀걸이를 비롯하여 쇠솥 2개, 청동제 그릇, 유리구슬, 마구 등 숱한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특이한 것은 다른 금관총에서는 없던 기명(記銘) 은제합(銀製盒)이 나왔다는 점이다. 은제합의 뚜껑 안에 “연수원년신묘(延壽元年辛卯)”라는 연호가 새겨져 있는데 이 글자가 지금껏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이다. 신라 고구려, 백제, 중국의 연호 중에 임금의 원년에 해당하는 신묘년은 광개토대왕이 유일한데 광개토대왕은 연수라는 연호를 사용한 기록이 없는 것이다. 그 무렵 신묘년은 서기 391년, 451년, 511년 밖에 없어서 역사학자 간에 지금껏 논란이 되고 있다.
서봉총 발굴로 평양박물관장으로 승진한 고이즈미는 1935년 10월 9일 평양박물관에서 서봉총 유물 특별전을 개최하여 큰 성황을 이루었다. 이에 기고만장한 고이즈미는 그날 저녁 평양의 고위 기관장들을 불러 기생집에서 파티를 열었는데 기생 차여인에게 왕관을 씌우고 목걸이, 귀걸이며 요대(허리띠)를 채우는 만용을 부렸다. 이 금관 쓴 황당한 사진이 시중에 나돌고 급기야 신문에까지 나게 되었다. 이 해괴망측한 사건으로 고이즈미는 파면된다. 참으로 어이없는 사건이었던 것이다. 더욱 해괴하고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것은 서봉총 왕릉 자리가 평지가 되어 현재 잔디밭으로 남아있다는 점이다. 서봉총의 흙과 자갈 모두가 기관차 차고지를 매립하는데 들어가고 그 자리를 그대로 방치하였던 것이다. 지금은 서봉총 금관 출토지라는 빗돌 하나만 달랑 세워져 있는데 지금이라도 옛 모습 그대로 봉분을 조성하고 무령왕릉 내부처럼 전시실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서봉총 금관이 기생머리에 올라앉는 수모도 모자라 왕릉 자리가 평지가 되어 잔디밭으로 변해버린 것은 문화국가임을 표방하는 우리나라의 수치인 것이다.
이 성 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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