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문화관련자료

신라금관1.황남대총 북분 금관

박근닷컴 2011. 10. 1. 22:26

 

 

황남대총 북분금관 국보191호

 

황남대총북분금관수하식 (皇南大塚北墳金冠垂下飾)

경북 경주시 황남대총(皇南大塚)북분에서 출토된 5∼6세기 신라의 금관 및 수하장식.

국보 제191호. 높이 27.5 cm, 지름 17 cm, 무게 750 g.

북분의 목관 내 시신의 머리 부분에서 나왔으며, 금관에는 앞면 중앙과 좌우에 3개의 山자 모양의 장식이 세워져 있다.

이 장식은 나무를 단순한 의장으로 생각한 것 같 고, 뒷면 좌우에 세운 2개의 의장은 사슴의 뿔을 간략화한 것이다.

대륜(臺輪) 위에 山자 모양을 3개 겹쳐놓은 것은 나무의 줄기와 옆가지를 뜻한 것 같다.

1가지에 곡옥(曲玉)과 영락(瓔珞)을 5개씩 달았다.

대륜의 위아래 에는 2줄의 점선무늬가 안에서 두드려 밖으로 도드라져 있고

 여기에도 역시 곡옥과 영락을 달았다.

금관에는 좌우에 각각 3개의 수하식(아래로 늘어뜨린 장식)이 있으며,

 이 수식 중 1쌍에는 끝에 청색 곡옥이 달려 있고 다른 금관보다 수식 2쌍이 더 있는 것이 특징이다.

 

황남동에 소재한 제98호 고분으로,  1980년 문화재위원회 회의에서 신라 최대의 고분이라는 뜻으로 ‘황남대총(皇南大塚)’이라는 별칭이 부여되었다. 그러나 황남대총이라는 현재의 별칭은 2개의 무덤으로 구성된 고분의 특성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황남대총쌍분’이라고 고쳐서 불러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이 고분은 현존하는 고신라 최대의 표형(瓢形)봉토를 가진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이다.

이 고분의 발굴은 신라고분의 내부를 국민에게 보여주겠다는 교육적 의도에 따라, 대통령의 특별지시로 1973년부터 1975년까지 만3년6개월 여에 걸쳐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산하 한시적 조사단체인 경주고적발굴조사단(현 경주문화재연구소)에 의하여 체계적으로 발굴 조사되었다.

당시까지만 하여도 5~6세기대의 신라 돌무지덧널무덤에 대한 발굴자료는 일제강점기와 해방직후에 이룩하여 놓은 것이 거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들 대개는 일제의 발굴을 빙자한 보물찾기식의 조사와 비전문가에 의한 졸속 발굴작업 등이어서 돌무지덧널무덤의 구조나 매장내용을 과학적으로 해명할 수 있는 기본자료는 거의 없었던 셈이었다.

그러던 차에 황남대총을 제대로 조사하기 위하여 그 전초작업으로 외형이 조금 작은 천마총(황남동 제155호분)을 먼저 발굴하였고, 이어서 황남대총(황남동 제98호분)을 발굴하게 된 것이다. 이들 2기의 고분발굴은 한국 고고학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결정적인 전기가 되었고, 결과적으로 고신라 돌무지덧널무덤의 세부내용을 상세하게 이해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계기가 제공되었다.

 

이 황남대총의 축조연대는 대형 돌무지덧널무덤의 축조 상한연대를 결정하는 중요한 기준이 되고 있는데, 발굴조사자는 묘곽형식의 변천, 고식마구(古式馬具)의 등장시기, 신라토기의 편년, 북분에서 출토된 중국제 흑갈유자기소병(黑褐釉磁器小甁)의 매납시기 등을 근거로, 남분은 4세기 중엽경, 북분은 4세기말~5세기초경으로 추정하였다.

이에 반하여 고구려군남정설(高句麗軍南征說)이라는 고대사 연구성과를 근거로 삼는 귀고리, 신라토기편년 연구자나 혹은 중국에서의 고식마구 출현에 대한 다른 해석을 근거로 삼는 연구자들은 황남대총 남분을 5세기 중후반, 북분을 6세기초로 편년하고 있기도 하다.

또 다른 해석으로는 사료상에 나오는 왕세계(王世系)와 혼인관계 등을 비교하여 남분의 피장자를 내물마립간(奈勿麻立干)이나 눌지마립간(訥祗麻立干)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제시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