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복사지(崇福寺址) 귀부(龜趺)
박물관신문 272호 / 박방용(경주박물관 학예연구사)
비석(碑石) 받침으로 쓰인 귀부(龜趺)는 한 마리로 된 것이 보통이나 두 마리로 된 것은 무장사지귀부(무藏寺址龜趺), 창림사지귀부(昌林寺址龜趺), 법광사지귀부(法光寺址龜趺), 숭복사지귀부(崇福寺址龜趺)가 있다.
이 가운데 무장사지귀부(무藏寺址龜趺)가 애장왕(哀莊王) 2년(801년)에 만들었고, 숭복사지귀부(崇福寺址龜趺)가 진성여왕(眞聖女王) 10년(896년)에 된 것으로 보면 쌍귀부(雙龜趺)의 형식은 무장사지귀부(무藏寺址龜趺)가 처음이고, 그 다음이 숭복사지귀부(崇福寺址龜趺)임을 알 수 있다.
숭복사지귀부(崇福寺址龜趺)가 동부동(東部洞)박물관으로 옮겨지고 현재의 박물관 자리로 다시 이전(移轉)될 때까지도 귀부(龜趺)의 잔등 위에는 가로 1백25cm×세로54cm되는 장방형(長方形) 홈만 남은 상태였다. 1978년 7월 학예연구실에서 숭복사지(崇福寺址)를 답사하던 중 금당(金堂)자리 북쪽 약 30m 떨어진 곳에 살고 있는 김종식씨(氏)(당시 67세)를 만났는데 이 절터에서 논을 갈다가 수습(收拾)한 것이라면서 와당편(瓦當片) 세 조각과 비석편(碑石片) 두 조각을 보여 주었다. 김씨(金氏)의 전언에 의하면 비석편(碑石片)을 수습한 위치가 숭복사지(崇福寺址) 금당지(金堂址)의 동남 모서리에서 동남쪽으로 약 10m 가량 떨어진 동탑(東塔)의 중간 지점이고 이 자리에 귀부가 있었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또 김씨(金氏)의 집 뒤뜰에는 인물상(人物像)과 안상문(眼象文)이 새겨진 대석(臺石)이 두 토막난 채 놓여 있었으며 이 절터에 있던 것을 옮겨다 놓은 것이라 하였다.
이동(移動)이 쉬운 와당(瓦當)과 비석편(碑石片)은 경주군 문화공보실에 매장문화재(埋藏文化財)로 신고하고 대석(臺石)은 며칠 후 박물관으로 옮겨왔다.
박물관에 옮겨온 파손된 두 조각의 대석(臺石)을 맞추어 보니 하부(下部)에 약 2cm 가량의 촉이 나와 있어 조립(組立)할 수 있게끔 되어 있고, 대석(臺石) 윗면에 비석(碑石) 같은 것을 꽂을 수 있도록 파놓은 점으로 보아 귀부(龜趺)에 부속된 비석 받침임이 확실하였다.
이 대석(臺石)을 숭복사지귀부(崇福寺址龜趺)의 비석받침으로 보는 또 하나의 이유는 무장사지귀부(무藏寺址龜趺)와 비교해 보면 무장사지귀부(무藏寺址龜趺)는 비좌(碑座)와 거북받침이 한 개의 돌로 되었고 비좌(碑座) 4면에 12십이지상(十二支像)을 새겼으나 숭복사지귀부(崇福寺址龜趺)는 비좌(碑座)를 별석(別石)으로 만들고 안상문(眼象文) 안에 천인상(天人像)이 있는 점만 다를 뿐이다.
숭복사지(崇福寺址)가 학계(學界)에 공식적으로 처음 알려진 것이 1931년 7월 大阪 金太郞氏에 의해 확인되었다는 설(說)이 있지만, 실제로 귀부(龜趺)가 박물관 유물등록대장(遺物登錄臺帳)에는 1930년 10월 10일에 국고 귀속되었고 또, 당시의 신문 스크랩 내용으로 미루어 1930년대 후반에 이 절터가 알려지고, 1929년 겨울에 귀부(龜趺)가 옮겨진 것으로 보여진다.
귀부(龜趺)의 크기는 현고 77cm, 가로 1백80cm, 세로1백90cm이고 본(本) 12021번으로 국고 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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