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문(金仁問) 묘비(墓碑)
박물관신문 289호 / 박방룡(朴方龍, 경주박물관 학예연구사)
김인문묘비(金仁問墓碑)는 두 조각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한쪽은 경주박물관 본관과 미술공예실(美術工藝室)에 전시 중에 있고 이 비석의 후면(後面)에 해당되는 조각은 별도로 보관되어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것은 전시 중인 전면(前面)이며 후면(後面)은 잘 알려진 것이 아니나 이들은 크기가 같으며 석질(石質)이 세로의 판상(板狀)으로 갈라진 한 개채분임이 확실하다.
이 비석이 발견된 것은 1331년 12월 11일이고 발견한 사람은 有光敎一氏(당시 조선고적연구회(朝鮮古蹟硏究會) 경주주재(慶州駐在) 연구원(硏究員))와 이성우씨(李盛雨氏)(당시 동연구회조수(同硏究會助手))이며, 이 사실을 有光敎一氏가 청구학회(靑丘學會)에 원고를 보내어 『청구학총(靑丘學叢)』7호(1932년 2월 발간(發刊))에 소개함으로써 학계(學界)에 정식으로 보고 되었다. 이 글에 의하면 양씨(兩氏)는 서악방면(西岳方面)의 유적답사를 하던 중 서악서원(西岳書院)을 들렀다가 이 비석을 보게 되었는데 이미 12월 초순 무렵 서원(書院) 누문(樓門)의 수리공사때 인부(人夫)들에 의해 누문(樓門) 서쪽 모서리 부근의 땅속 15㎝ 깊이에서 출토되었고 글씨가 새겨진 것을 소중히 생각하여 한켠에 둔 것을 보게 된 것이다. 有光敎一氏는 중요한 신라(新羅) 금석문(金石文)임을 인지하여 경주박물관에 신고하고 이를 옮겨 보관하게 되었으며 <경주(慶州) 173번으로 국고귀속 됨> 세밀히 판독(判讀)하여 학계(學界)에 소개한 것이다. 이를 소개(紹介)하면서 비석 전면(前面)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이 없는데 발견 당시부터 두쪽으로 나뉘어진 것을 명문(銘文)이 없으므로 별로 중요시 하지 않은 듯 하다. 비석의 두께를 말하면서 후면(後面)의 두께를 포함하지 않고 전면(前面)의 두께인 6촌(寸)(18.2㎝)으로 기술(記述)하고 있어서 이후의 여러 문헌에도 척(尺)을 ㎝로 환산하여 사용되고 있다. 후면(後面)의 크기는 전면(前面)과 거의 같으며 두께는 9.1㎝-9.6㎝로 전면(前面)에 비해 조금 닮은 편으로 전후면(前後面)을 합한 두께는 27㎝가량 되었다고 생각된다. 이와 같은 점으로 미루어 보아 원비석(原碑石)은 높이 2백㎝, 너비 95.0㎝, 두께 27.0㎝ 크기이며 후면(後面)에는 처음부터 글씨를 새기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이 비석이 세워졌던 귀부(龜趺)의 비좌(碑座)는 나비 93.0㎝, 20.6㎝로 비신(碑身)의 크기에 비해 조금 작은데, 이로 인해 이 비석(碑石)이 귀부(龜趺)와 짝이 되지 않는다는 견해도 있지만 이것은 비신(碑身)의 하단부(下端部)에 있었던 촉이 끼워진 크기이므로 당연하다고 하겠다.
1931년 이 비석이 발견되기 전까지 김인문묘(金仁門墓) 귀부(龜趺)를 김유신묘(金庾信墓), 김양묘(金陽墓)의 귀부(龜趺)인 것으로 잘못 알고 있었다. 이것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 김유신묘(金庾信墓)에 묘비(墓碑)가 있다는 기록과 이 묘가 『각간묘(角干墓)』로 불리우는 사실로 인해 비문(碑文)의 검토없이 붙여진 것이고, 김양묘(金陽墓)라고 한 것은 태종릉(太宗陵)(무열왕릉(武烈王陵)) 배장(陪葬)하였다는 기록을 따른 것으로 1931년 이전(以前)까지도 그대로 불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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