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산은 신라시대에 冷山으로 불렀는데 아도화상이 산에 오르니 여름에도 골짜기에 얼음이 맺혀 있었기 때문이란다.
이 산을 냉산으로 부르다가 동국 최초의 가람을 짓고는 그 격을 높여야 하기에 太祖山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절을 창건할 당시 겨울철인데도 복사꽃과 오얏꽃이 피어 있어서 桃李寺로 이름지었다 한다.
복숭아 꽃(도-桃)과 오얏 꽃(리-李)이 겨울에 피어난 상서로움이 이 절의 탄생 전설.
설선당
수선료
태조선원
도리사/태조선원
태조선원에서는 (고) 성철큰스님이 수행 정진을 하신 곳. 이곳에서 장좌불와-눕지를 않고 앉아만 있는-수행을 하셨단다.
이 마루를 거닐고 마당을 서성이며 수행에 매진하셨을 풍경을 그려본다.
큰 스님과 여러 대중스님이 하루에 한끼를 드시면서 화두참구에 몰두하고
중생을 구원하고자 하는 원을 실천하시던 장소라 ......
서슬퍼런 5공시절...모든 종교지도자를 청와대로 오라던날...조계종정 성철스님의 명패자리만 비어 있었단다.
그래서 그 자리에 모인 모든 다른 종교 지도자들이 놀랬다는 일화가 있다.
그래서 그 후로는 청와대에 불교계는 종정이 아닌 총무원장이 초청된다고...
- 극락전 -
극락전에는 아미타불좌상을 모시고 있으며 특히 극락전 외부 벽화가 눈여겨볼만 하다.
아도화상이 지었다는 원래의 도리사는 불에 타서 없어지고, “도리사 금당암 중창기<1807>(桃李寺 金堂庵 重創記)”와 “선산 도리사 법당 중수기<1876>(善山 桃李寺 法堂 重修記)”에 따르면 도리사에는 금당암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건물 전체적으로 보아 외부 앙설(仰舌)과 상부의 익공(翼工)과 특히 주두부분에서 창방과 평방을 안팎에서 둘러싸고 있는 안초공(按草工)의 발달된 모양이 1870년에 중건된 경복궁 근정전의 공포 구성양식과 매우 근접한 형식을 갖춘 조선시대 후기말 건축의 특징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 [글:도리사홈]
세존사리탑
전하는 이야기....
그 근방에 어떤 사람이 꿈을 꾸는데, 땅속에 부처님 사리가 묻혀 있다고 얼른 캐라고...그래서 발굴하니까 근처 폐사된 절의 것인데...
그 안에는 신라시대때 모신 진신사리가 있었다고. 그 것을 다시 도리사에 모셔 놓은 것이 조선시대였단다.
그 탑이 무너지는 바람에 속을 열어 보고는 근래에 그 진신사리를 새로운 사리탑을 만들어 모시게 되었다.
도리사의 역사기록서가 있어서
그 내막을 잘 전해 주었으면 좋으련만 모두가 임진란때 불에 타서 없어진 아쉬움을 전할 뿐이다.
절내에 있는 적멸보궁에 새로 생긴 사리탑이 있다.
이 석종형 사리탑에는 사리가 없는 사리탑이다.
- 아도화상 상 -
도리사에 스님말씀을 글로 적으면......
말은 있으되 적을 글이 없던 시절이다. 아직 한문대신 이두로 글을 적어두던 때, 머리를 삭발한 사람이 와서 낮에는 머슴처럼 일을 한다.
그래서 얼굴은 검게 탔다. 모례네 집의 작은 방을 빌려서...머리에 치장으로 계급을 표시하던 시절이 신라시대의 풍습인데...까까머리라?
그래서 사람들은 애기머리라는 뜻으로 '아두'라고 불렀단다. 훗날 한문으로 소리를 적다보니 '아도(阿度)'라고 했다나...
그리고 모례는 털보숭이라고 얼굴에 털이 많은 사람이었단다. 그래서 한문으로 모례(毛禮)라고 적고, 절이라고 처음 생긴거니까 당연 이름이 없다.
최초에 생긴 절을 무엇으로 불렀을까?..아마도 그냥 털보네집 정도 아니겠는가?
털에서 절로 발음이 변해서 지금 절이라는 우리말이 생겼다는 이곳의 전해오는 이야기이다.
현장감있는 스토리탤링이다.
좌선대와 자운비
아도화상이 도를 닦았다는 좌선대 옆에는 아도의 사적비겸 자운비가 있는데
앞면에는 인조 17년에, 뒷면에는 효종6년에 새긴 아도의 사적이 음각되어 있다.
아도화상 좌선대
계단을 오르면 적멸보궁이다....
도리사(桃李寺)에 있는 세존사리탑(世尊舍利塔)으로 전해 내려오는 석종형(石鐘形) 부도(浮屠) 안에서 발견된 사리를 새로모신 사리탑이다.
1977년4월18일 절의동쪽에 도굴꾼에 의해 넘어져 있던 석종형부도 를 절로 옯기던중 발견된 진신사리와 함께 금동사리함이 발견됐다.
이에 도리사에 적멸보궁을 창건하고 이 사리탑을 세워 사리를 안치하였다.
도리사 금동사리함
1977년4월18일 석종형부도 에서 발견된 진신사리와 함께 있던 금동사리함이다.
사리함은 높이 17㎝로 기단, 탑몸, 지붕으로 구성되어 있고, 표면에 도금이 잘 남아 있다.
평면 6각형으로 각 면의 기단에 안상을 뚫었다. 2면의 탑몸에는 불자(拂子)와 금강저를 든 불교의 수호신인 천부상을
선과 점으로 새겼다. 남은 4면에는 사천왕상을 선으로 새겼다.
이들의 배치는 사천왕상 중에서 탑을 들고 있는 다문천을 중심으로 좌우에 천부상을 배치하여
다문천이 정면이 되게 한 듯 보인다.
지붕 처마와 추녀에는 고리가 있어 장식을 달았던 것처럼 보인다.
꼭대기에는 연꽃을 도드라지게 새겼는데, 그 중심에 꼭지만 남아 있어 원래 꽃봉오리가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8각이 유행하던 시기에 6각형의 사리함이 나타났다는 점이 특이하며
시대를 달리하는 종 모양 부도에 안치되었던 것도 특이하다 하겠다. 이 금동사리기는 현재 직지사 성보박물관에 보관중이다.
얼굴무늬수막새의 문양이 범종각앞에 놓여있다.
- 삼국유사 (신라본기)에 의한 도리사창건 이야기 -
아도화상은 중국 위나라 아굴마의 아들이고 엄마는 고구려인 고씨도령이며
일명 묵호자라고 한다.
신라 눌지왕때(417년) 19세의 나이로 고구려에서 신라에 불교를 전하기
위하여 들어 왔다.
어느 늦 가을날 옷은 비록 남루하였지만 용모가 예사롭지 않은 한 고구려인이
지금의 선산에 있는 모례장자의 집을 찾아와
“나는 묵호자라는 고구려의 승려입니다.
인연이 있는 땅을 찾아 왔으니 이집에 묵을 수 있도록 주선하여 주십시오“
하였다.
당시 신라에는 불교가 공인되지 않은 때라 모례장자도 불법에 관한 설명이
쉽게 납득이 가지 않았으나 전생부터 무슨 인연인 것 같아 지하 밀실을
지어 편히 지내게 하였다.
이 무렵 조정에서는 중국에서 예물로 의복과 이름 모를 물건을 보내 왔는데,
이름도 모르고 사용법도 몰라 나라 안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알아보게 하였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묵호자는
“이는 향이라는 것으로,
태우면 그윽한 향기가 풍기고 태우면서 정성이
신성한 곳에 까지 이르도록 간곡히 축원을 하면
무슨 소원이든지 영험이 있을 것입니다” 라고 가르쳐 주었다.
얼마 후 공주마마가 위독하여 백방으로 약을 쓰고 의원을 불렀으나,
전혀 효험이 없다하여 서라벌로 가 공주가 누워있는 방에 향을 피우고
불공을 드리고 염불을 외우니 공주의 병이 나아 버렸다.
왕은 기뻐서 묵호자에게 소원을 물었다.
“빈승에게는 아무것도 구하는 일이 없습니다.
다만 천경림(흥륜사가 창건된 숲이며 귀족들이 제천의식을 행하던 곳)에
절을 세우고 불교를 널리 펴 국가의 복을 비는 것을 바랄뿐 입니다.” 라고 했고
왕은 즉시 이를 허락하여 불사가 시작 되었고, 숨겨둔 불명 아도라는 이름을
이때부터 사용 하였으며 수행에 전력하고 불법을 펼쳤으나, 왕이 세상을
떠나고 새 임금이 등장하자 아도화상을 헤치려는 사람이 나타났고
아도화상은 제자들과 함께 모례장자의 집으로 다시 돌아왔다.
낮에는 소와양 일천마리를 길렀다.
그렇게 5년을 보낸 뒤 훌쩍 길을 떠났다.
모례장자가 가는 길을 물었으나
“나를 만나려거든 얼마 후 칡순이 내려
올 것이니 칡순을 따라 오시오.” 라는 말을 남겼다.
그 후 정월 엄동설한에 모례장자의 집 문턱에 칡순이 들어 왔다.
그 줄기를 따라 간곳이 신라불교의 초전지인 도리사 터였다.
아도화상은 “내 이곳에 절을 세우려하니 망태기에 곡식 두말만 시주하시오.”
하니 흔쾌히 승낙하고 집에 와 망태기에 두말은커녕 두섬을 부어도 차지 않았다.
결국 모례장자는 전 재산을 팔아 시주하여 절을 지었다.
절은 다 지은 아도화상이 잠시 서라벌을 다녀오는데 설중에 태조산 밑에 때 아닌
복사꽃이 만개하여 눈이 부셨다.
이에 아도화상은 절 이름을 도리사라 칭하고
마을 이름을 도개마을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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