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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 운문사[2014.02.09] 관음전/작압전 석조여래좌상/사천왕석주

박근닷컴 2014. 2. 11. 22:20

 

 

 

 

 

 

 

- 운문사 작압전

작압(鵲鴨)은 처음 보양 국사가 지었고, 1105년(고려 숙종 10) 원응 국사가 3중창하였다. 그 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중건되었는데, 이름 그대로 까치집 모양을 하고 있으며 경내의 전각 중에서 가장 작은 건물이다. 편액은 '작압(鵲鴨)'으로만 되어 있으나 편의상 작압전이라고 부른다. 이 편액은 1910년에 쓴 것이다. 그런데 이 작압의 원형은 신라시대에 조성한 전탑 형식의 불전(佛殿)이었다. 훗날 세월이 흘러 무너지자 1935년 무렵에 벽체의 벽돌을 제거하고 목조 건물의 형태로 완전히 새롭게 만들었다.

 

- (또다른기록)

운문사의 원래 이름은 작갑사(작압사)였다. 서기 600년 원광국사가 제1 중창을 한 후 서기 930년 보량국사가 작갑사의 옛터를 찾아 절을 지으면 반드시 불법을 보호하고 삼국을 통일할 어진 임금이 나올 것이라는 서해 용왕의 뜻을 받들어 이 터를 찾아왔다가 까치 떼가 모여들며 땅을 쪼아대는 것을 보고 내려와 땅을 파보니 오래된 벽돌이 무수히 나와 작갑사의 옛터임을 확인하고 그 벽돌로 탑을 조성하였다는 전설에서 비롯된 작은 전각이 작압전이다.

 

 

 

운문사 작압전 석조여래좌상

보물 제317호

작압(鵲鴨) 내에 봉안된 석조 여래좌상은 석불 좌대의 사리공(舍利孔)에서 865년(신라 경문왕 5)에 해당하는 '함통육년(咸通六年)'의 연호가 새겨진 사리합(舍利盒) 등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어 이 불상 역시 그 당시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크기는 불신 높이 63㎝, 대좌 높이 41㎝, 광배 높이 92㎝이다. 이 석불은 항마촉지인에 결가부좌의 자세로 대좌와 광배를 모두 갖춘 완전한 불상의 형태이다. 다만 불상은 화강암 위에 호분(胡粉)이 두껍게 칠해져서 본래의 모습을 잘 알 수가 없는 것이 아쉽고, 얼굴의 채색도 조잡하여 복원 작업이 시급하다. 나발(螺髮)의 머리에는 둥근 육계가 높직하게 표현되었다. 원형(圓形)의 상대석엔 14엽(葉)의 앙련이 조각되어 있으며, 연화문이 매우 화려하게 표현되어 있다. 또한 불신의 신체 비례는 둔감하며, 불의(佛衣) 안에 내의의 일종인 승각기가 묘사되었으나 옷주름 선은 힘 없이 흘러내리고 있다. 이 석조 여래좌상은 제작년대가 거의 확실하여 9세기 불상 양식의 한 표준작이 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자료로 여겨진다.

 

 

 

 

 

 

 

 

 

 

 

운문사 사천왕 석주

보물 제318호

작압 내 좌우 벽면에 있는 사천왕 석주(四天王石柱)는 통일신라시대에 조성한 것으로 석주 형태로 다듬질된 석면에 사천왕상이 새겨진 형태로 작압 내부 좌우 벽면에 대칭으로 각각 2기씩 전부 4기가 배치되어 있다. 각각의 높이는 114㎝·118㎝·122㎝·128㎝로 조금씩 다르다. 이 사천왕상들은 모두 무인(武人)의 복장으로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들었으나, 머리에는 보관을 쓰고 있다. 또한 원형 두광을 지니고 악귀를 밟고 서 있는 자세로 천의 자락을 휘날리고 있다. 지물(持物)로는 보탑을 지닌 북방 다문천왕 외에 나머지 3위의 천왕은 칼과 봉(棒), 삼고(三納)의 금강저(金剛杵) 등을 지니고 있어 현재 이들 사천왕의 각각의 명호를 구별하기가 어렵다. 이 사천왕 석주가 언제부터 이 자리에 배치되었는지 잘 알 수 없는데, 본래부터 이렇게 위치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 작압의 원형은 외형은 불탑이면서 내부는 불전으로 꾸며져 석조여래좌상을 봉안하였는데, 이 석주가 작압 창건 당시 외벽에 배치되었는지 혹은 지금처럼 내벽에 놓였는지 현재로서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우측에..

 

 

 

좌측에...

 

 

 

 

 

 

 

 

야외석조물

 

 

테두리에도 문양이 있는 석조물의 용도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