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 전시·관람

경주박물관 미술관 전시물 2.(부처/보살)

박근닷컴 2010. 5. 24. 23:26

 

부처

경주 인왕동 출토 (신라 7세기 전반)
이 부처는 인왕동 부처로 알려져 있는데, 인왕동은 국립경주박물관 인근 동네입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정확한 발견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보통 부처의 이름은 부처의 손 모양으로 알 수 있습니다. 손가락 뜻이 하늘을 향한 오른 손은 시무외인 이라고 하는데, ‘두려움을 없애준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반대로 손가락이 땅을 향한 왼손은 ‘모든 소원을 들어 준다’는 여원인입니다.  4등신에 가까운 신체, 둥글둥글한 얼굴은 장창골 미륵삼존불과 매우 비슷합니다. 이러한 특징을 보이는 불상은 주로 7세기 전반에 조성되었습니다.



부처

 경주 읍성 추토 (통일신라 8세기)
이 불상은 흔히 볼 수 있는 불상과 그 재료가 다른데, 바로 사암으로 만든 것입니다. 우리나라 불상은 대개 화강암을 재료로 하였습니다. 양질의 화강암을 쉽게 구할 수 있었던 경주지역에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마치 서양 사람의 얼굴을 보는 듯합니다. 얼굴생김새뿐만 아니라 옷주름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이 불상은 인도 굽타시대 마투라 지경의 불상과 매우 유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무래도 우리나라 불상은 중국 불상의 영향을 주로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불상은 중국이라는 징검다리 없이 인도에서 곧바로 신라로 유입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특히 재료가 사암이라는 점은 화강암 조각에 익숙했던 신라 장인이 아니라 사암에 익숙한 장인, 가령 신라에 와있던 인도 장인의 손에 만들어졌을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인도에서 제작되어 배에 싣고 왔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부처

경주남산 왕정골 출토 (통일신라8세기 후반)
이 불상은 경주 남산 도당산 토성 동쪽에 있는 왕정골 절터에 있던 것을 박물관으로 옮겨온 것입니다.

약간 살이 오른 얼굴은 탄력감이 느껴지며, 옷 주름은 단이 져 있어 마치 실물을 보는 듯 합니다. 이러한 특징은 삼국시대 불상에서는 볼 수 없던 특징인데, 사실성이 강조된 당나라 불상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통일신라 불상의 정수라 할 석굴암 본존불에서 볼 수 있는 사실적인 인체 표현과 종교적 숭고미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중국의 사실적인 불상의 영향을 받으면서 그것을 그대로 표현하지 못했던 것일까요?

 물론 신라 사람들이 자기화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이유만은 아닙니다. 바로 중국의 새로운 불상을 받아들이면서 조각상이 아닌 그림을 모본(模本)으로 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래도 그림은 평면이기 때문에 입체로 재현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왕정골 불상과 매우 비슷한 불상이 동국대학교 박물관에도 있는데, 모본을 단 한 장만 그린 것이 아니라 여러 장 그려 유표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약사불

경주남산 개선사터 출토 (통일신라 9세기 말-10세기 초)
이 불상은 1930년대 경주 남산의 개선사터에서 박물관으로 옮겨왔다고 합니다. [경주 읍지]에 따르면, 개선사는 금오산 동쪽 기슭에 있는데, 임진왜란 때 불타버리고 조선 인조9년(1631) 그 자리에 대승암을 세웠다고 합니다.

왼손에 둥근 단지를 쥐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약사불임을 알 수 있습니다. 통일신라 전성기 때의 불상은 부조상이라도 마치 원각상을 보는 듯 고부조로 조각한 것에 비해, 이 불상은 매우 얕게 조각되어 있어 그 조성 시기가 통일신라 전성기는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친근한 얼굴, 양발을 벌려 직립한 모습, 골곡이 전혀 표현되지 않은 신체 등으로 미루어 보아 일반 백성들이 주도하여 조성한 불상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특히 다음 세상이 아닌 지금 세상의 모든 질병을 없애주고 배고픔을 없애 준다는 약사불은 당시 일반 백성들에게 가장 각광받는 부처임이었습니다. 그 조성 시기는 아마도 일반 백성의 생활이 매우 어려웠던 9세기 말에서 10세기 초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부처

경주 외동읍 입실리 출토 (통일 신라 9세기 말-10세기 초)
이 부처의 네모난 얼굴은 위에 소개된 왕정골 출토 부처와 비슷합니다만,  얼굴에 비해 낮은 머리와  동심원이 반복되는 두광은 다른 불상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특징이기도 합니다.

이 부처의 네모난 얼굴은 8세기 불상에서 주로 볼 수 있는 특징입니다. 그러나 어깨가 좁고 왜소한 것은 9세기에 조성된 불상의 전형으로 두광의 표현에서는 강한 토속성이 느껴집니다. 이러한 특징은 잦은 반란과 호족의 성장으로 중앙집권이 무너진 9세기 말 이후의 불상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어, 이 불상의 조성시기 역시 그 즈음으로 여겨집니다. 이 불상의 조성주체는 위에 소개된 개선사 약사불과 마찬가지로 일반 백성들이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국보 제28호 백률사 금동약사여래불 (통일신라 8세기 후반)

국보 제 26호 불국사 비로자나불과 국보 제 27호인 불국사 아미타불과 함께 신라 3대 금동불로 불리 우는 금동불입니다. 이 약사불은 원래 경주 소금강산 백률사에 있던 것인데, 1930년에 박물관으로 옮겼습니다. 소금강산은 불교 공인 과정에서 순교한 이차돈의 머리가 날아갔다고 한 곳으로, 신라인들에게는 불교 성지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약단지를 쥔 손이 없는 데도 무슨 이유로 약사불이라고 부르는 것일까요? 일제강점기에 우리 문화재 사진집인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사진을 보면 왼손에 약단지를 들고 있는데, 경주 사람들은 이 부처를 약사불로 여겼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온 몸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외형 틀과 내형 틀을 고정하기 위한 틀잡이[형지型持] 자국이 있습니다. 뒷면에는 머리 한 곳과 몸체 세 곳에 사각형 구멍이 뚫려 있는데, 모두 턱이 져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별도의 구리판을 끼워 마감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불상의 표면을 자세히 보면, 여러 곳에 붉은색, 푸른색, 녹색의 흔적을 볼 수 있습니다. 원래는 부처의 몸에서 금빛이 난다는 경전의 내용을 쫓아 금도금하였을 것이지만, 점차 도금이 없어지자 어느 때인가 불상에 채색하였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신체의 양감이 두르려졌던 8세기 중엽 불상과 달리 다소 밋밋해졌지만, 입가에 자비로운 미소를 머금은 얼굴에서 8세기 중엽 불상에서나 볼 수 있는 종교적 숭고미가 느껴지는 것으로 미루어 8세기 후반에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십일면관음보살

경주 낭산 출토 (통일신라 8세기)
큰 얼굴과 머리 위 중앙 화불(化佛) 주위의 얼굴까지 합하여 총 11개의 얼굴이 있어, 십일면관음보살이라고 합니다. 경전에 따르면, 정면의 세 얼굴은 보살의 모습인데 자비로운 마음으로 중생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왼쪽의 세 얼굴은 분노하는 모습인데, 슬픈 마음을 일으켜 악한 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것이며, 오른쪽 세 얼굴은 흰 이를 드러낸 모습인데 바르게 행하는 사람을 더욱 권면하기 위한 것입니다. 보이지는 않지만 뒤쪽 얼굴 하나는 웃는 모습으로 모든 중생을 웃음으로써 거두어들인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십일면관음보살은 이 보살상 외에 석굴암에도 있습니다. 석굴암 십일면관음보살상의 경우 삼단으로 11개의 얼굴을 배치한 반면에 이 십일면관음보살상은 한단에 일렬로 배치한 점이 가장 큰 차이입니다. 이렇게 일렬로 배치한 예는 중국이나 일본, 인도 등지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것으로 신라인의 독창성을 엿볼 수 있습니다.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사진을 보면, 이 불상은 경주 낭산 중생사 터 부근에 있던 삼존불 가운데 오른쪽 협시보살로 여겨지는데, 현재 본존불과 왼쪽 협시보살은 찾을 수 없습니다.



관음보살

경주 분황사 출토 (통일신라 9세기)
분황사에 있던 상으로 원래 머리와 몸체가 떨어져 있던 것을 붙였습니다. 이 보살상은 동그란 얼굴, 감은 듯 만 듯한 눈, 짧은 코, 좁은 어깨, 왜소한 신체, 대좌의 화려한 연꽃무늬 장식이 특징인데, 이러한 특징은 9세기의 불상에서 살펴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로써 이 보살상이 9세기에 조성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을 우리는 관음보살이라 부릅니다. 왜 일까요? 그것은 보관에 화불이 새겨져 있고, 정병을 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보관에 화불을 새긴 이유는 [관무량수경]에 관음보살의 보관에는 화불이 있다는 내용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관음보살은 왜 정병을 들었을까요? 이는 [청관음경]에 나오는 관음보살이 맑은 물과 버드나무 가지로 병든 사람을 고쳤다는 내용에서 유래합니다. 물을 형상화할 수 없으니 물을 담는 용기인 정병으로 이를 대체한 것이지요. ‘자비의 화신’이라는 관음보살의 이미지를 극대화하고자, 정병을 든 모습의 관음보살을 조성하였던 것입니다.



미륵삼존불

경주 남산 장창골 출토 (신라634년)
1924년 경주 남산 장창골 한 석실에서 발견되어, 그 이듬해 박물관으로 옮겨 온 불상입니다. 삼화령 미륵삼존불이라고도 부르는데, 왜 그럴까요? 그리고 이 불상은 왜 미륵삼존이라고 하는 것일까요?

삼국유사 생의사석미륵 조에

신라 제 27대 선덕여왕 때 생의(生義)라는 중이 도중사(道中寺)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어느 날 꿈에 한 승려가 나타나 그를 대리고 남산 남쪽 골짝기로 대리고 올라가서 풀을 매어 표시하게 하고 말하길,

“내가 이곳에 묻혔으니, 대사께서 꺼내어 고갯마루에 안치해 주시오."

생의가 꿈에서 깨 다음 날 친구와 함께 꿈에 표시한 곳을 찾아가 그곳을 파내니 돌미륵이 나와 삼화령 위에 모시고 선덕여왕 13년 갑진년(644년)에 그곳에 절을 짓고 공양을 하며 살았는데 후에 생의사라고 이름을 지었다.

이 불상처럼 천진난만한 어린 아이와 같은 얼굴의 표현이나 4등신 신체 표현을 한 불상이 주로 7세기 전반에 조성되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삼화령 미륵삼존불이라 칭하기도 한다. 삼화령의 위치에 대해 현재 두가지 의견이 대립되는데 윤경렬 선생은 용장계곡 위쪽 연화대좌가 삼화령이라 주장하시고

(참조:http://kr.blog.yahoo.com/halbe1@ymail.com/128) 페이지의 위에서 약 1/3 지점)동국대 전 총장이셨던 황수영 교수는 불상의 조상 연대로 이것이 삼국유사에 나오는 삼화령 미륵삼존불이라 주장을 하신다.

 

단 황수영 교수의 주장은 삼국유사에 나오는 남산 남쪽과는 위치가 다른 남산 북쪽에서 이 삼존불이 나왔기에 약간의 모순점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기록과 유물이 차이가 날 경우 유물을 우선시 하는 것이 역사쪽에선 일반론인가 봅니다. 하여간 누구 말이 정답인지는 타임머신 나오긴 전까지는 알수 없을 듯..경주 쪽에서는 윤경렬 선생의 주장이, 박물관 쪽에서는 황수영 교수의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는 거 같습니다.
본존불은 장창골의 한 석실에서 발견이 되었고 두 협시보살은 인근 민가에서 발견이 되었습니다.










 

 

 

 

 

 

 

 

분황사출토사자 동쪽에서...

 

남쪽에서...

 

서쪽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