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재 이언적 선생의 삶과 학문
1491년(성종22년)경주시 양동마을에서 성균관 유생 이번의 장남으로 출생, 10세에 부친상을 당한다. 소년 이언적은 당시 영남학파를 주도하고 후에 이조판서까지 오른 외삼촌 우재손중돈이 외지에서 관직 생활을 할 때, 그를 따라 다니며 힘써 공부하며 14세에 벌써 학문의 기초를 다이루고 어린나이에 스스로 유교의 성리(性理)를 구명한다. 그가 학자적 명성을 떨치게된 계기는 27∼8세에 망기당(忘機堂 )조한보와의 4차례에 걸친 ;무극태극(無極太極)논변'이다. 회재는 냉철한 논리를 바탕으로 조한보의 학설을 비판하여, 이황을 포함한 후대 학자들로부터 "이단의 사설을 물리치고 성리학의 본원을 바로 세웠다"는 극찬을 받는다. |
24세에 별시에 급제한 후 관직에 나아가 요직을 거치나, 그리 순탄치 않았다. 당시 실력자인 김안로의 등용을 반대하다가 끝내 관직을 박탈당하고 그의 나이41세에 낙향하여, 옥산계곡에 독락당과 계정을 짓고 송죽과 갖가지 화초를 심어두고 자연과 책을 벗삼는다. 청년기 망기당 조한보와의 치열한 논쟁이 회재사상의 틀을 완성시켰다면 중년의 소요자적(逍遙自適)생활은 자연의 섭리를 깨닫고 인격과 학문의 폭과 깊이를 더해준다. |
|
회재 선생의 저서들 |
김안로 퇴출 후 중종의 부름을 받아 7년동안의 소요자적을 끝내고 47세에 다시 벼슬길에 올라 여러 요직을 거치면서 종1품 의정부 좌찬성까지 오른다. 그러나 당시 인종측의 대윤파와 명종측의 소윤파 간의 정치적 갈등 사이에서, 인종이 즉위 8개월만에 세상을 떠나고 명종이 즉위하자 윤원형 일파가 일으킨 을사사화에서 '양재역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그의 나이 57세에 평안도 오지 강계로 유배되어 1553년 63세로 숨을 거둔다. |
|
어서각 유품 |
그 유배6여년 동안 아들 잠계공은 지극한 효성으로 아버지를 시측하였으며 아버지의 시신을 엄동설한에도 불구하고 평안도 강계에서 경주까지 운구한다. 이 유배생활은 회재선생에게 정치적으로는 불행한 시기였으나 학자적으로는 더 없이 소중한 기회였으니「대학장구보유」「봉선잡의」「구인록」「진수팔규」그리고 회재의 언행록이라고 볼 수 있는 「관서문답록」등 유학사에 길이 남을 많은 저작들을 남긴다. 회재선생의 학문적 탁월함과 정치적 청렴함은, 후일 스스로 회재선생의 後學이라 일컬은 퇴계선생이 쓰신 행장(行狀)에 잘 나타난다. 세상을 하직한 지 13년 후인 명종21년에 삭탈되었던 관직이 회복되고 선조 즉위년(1568년)영의정으로 증직되며 광해군2년에는 학자로서의 최고의 명예인 문묘(文廟)에 오른다. |
시(詩)속에 담긴 삶
중종16년 당시 실력자인 김안로의 등용을 반대하다가 끝내 관직을 박탈당하고 그의 나이41세에 낙향하여 옥산계곡에 초려삼간 독락당, 옥산정사에서 소요자적 생활을 시작한다. 이공의 생활에서 선생은 자연의 섭리를 몸으로 깨치고 자신의 인격과 학문의 폭과 깊이를 더한다. 이때 옥산의 계절마다의 아름다움과 자연에서 느끼는 섭리를 시(詩)로 남겼으니, 이가 임거십오영(林居十五詠)이다. 이 중 네 시(詩)를 소개한다. 회재는 그의 나이30세에 입잠(入箴)을 짓기를, " 하늘의 덕을 본 받아 바른 법을 따름에 있어 구습(舊習)을 버리고 성법(聖法)만을 한결 따라서 경망함을 바로 잡고 태만함을 일깨워, 남이 하나로서 되거든 나는 백(百)을 해서라도 진실을 쌓고 노력을 계속하여 성인(聖人)의 지경에 들어가련다"고 다짐하였다. 무위(無爲)그리고 관심(觀心)詩를 보면 그가 30세에 지은 입잠(入箴)을 몸소 실천한 곳이 바로 옥산정사 독락당임을 알수 있다. |
- 계정(溪亭)
숲속에 우는 새는 듣기에도 즐겁구나
시냇가 경치따라 집 한 채 이룩했네
밝은달 벗삼아 술잔을 기울이니
흰구름아 한 데 놀자 흩어지지 말아다오.
- 무위(無爲)
세상사 왜 이다지 잘도 변하는가
이 몸 홀로 유연히 진리 찾아 지내리라
세월의 흐름속에 부귀공명꿈 밖이니
푸른산과 벗이 되어 이것저것 읽으리라.
- 독락(獨樂)
- 관심(觀心) 공산(公山)한 밤중에 옷 깃을 정제하고 앉았으니 증험(證驗)하였거늘 살펴서 찾아 볼 것이다. |
학문속에 담긴 충효정신 |
효성이 지극했던 회재선생은48세에 어머님의 봉양을 이유로 전주부윤으로 자청하여 내려간다. 당시 기강이 문란하고 백성들은 고달픈 그 곳을 바른 치정을 통하여 실기 좋은 고을로 만드니, 경세가로서 선생의 정치철학을 실천적으로 행한 곳이다. 이 때 중종이 정치적 개혁을 바라는 소장을 올리라는 뜻을쫓아 一綱十目疏(일강십목소)를 지어 아들 전인으로 하여금 전달케하니, 중종은 이를 세자에게 읽혀 자질을 높혀 국본(國本)을 튼튼하게 함과 동시에 조야에 전시하여 국정의 규범을 삼도록 하였다. |
1강 : 군주의 마음 다스림- 心術 (서정이 번잡함과 만민의 중다함은 군주의 마음에 근본) 1조목 : 가정(家庭)을 엄격히 다스리는 것 2조목 : 국본(國本, 즉 세자)를 보양하는 것 3조목 : 조정(朝廷)을 바로 잡는 것 4조목 : 인재(人材)를 쓰고 버리는 것을 긴중히 할 것 5조목 : 천도(天道)에 순응할 것 6조목 : 인심(人心)을 바르게 하는 것 7조목 : 언로(言路)을 넓히는 것 8조목 : 치욕(治慾)을 경계하는 것 9조목 : 군정(軍政)을 정비하는 것 10조목 : 기미(機微)를 살피는 것 |
이를 보면 예나 지금이나 나라를 다스림에 그 근본이 변치 않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이 일강십목소를 올린 50년후 임진왜란이 일어 났으니 군정 정비를 강조하신 회재선생의 선견지명이 돋보인다. |
사상: 무극태극론(無極太極論)
모든 물상(物象)은 그 재료와 기운을 하늘과 땅에서 얻기 마련인데, 그 형상이 각양각색이다. 그천라만상을 주재하는 것은 모든 존재의 근원인 이(理)이다. 이(理)는 인간의 인식과 감각을 초월한 영원불멸한 것으로, 그 근원은 태극(太極)이다. 이 태극의 무궁함을 형용하여 무극(無極)으로 표현한다. 이 태극이 현상을 주재하기는 하나 마치 현상과는 별개의 독립된 것처럼 여기는 일부사상가들과 달리, 회재선생은 이(理)가 각 현상(現象)에 내재(內在)하고 있다고 보았다. 즉, 선생은 우리나라에 주리적(主理) 유학의 체계를 세우게 되며 퇴계 이황선생을 포함한 유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준다. 인간이라는 형상에도 마찬가지로 이(理)가 내재하니, 그 바탕이 바로 심(心)이다. 심(心)이 외부자극에 반응하게 될 때, 이를 성(性)이라 한다. 인간은 오로지 그이(理)를 거슬리지 않는 바른 도(道)를 걸어야 한다. 그러기 위하여 자신의 심성(心性)을 다스려야 하며, 그 다스림에 가장 중요한 덕목이 바로 인(仁)이다. 그리고 인간은 그 인(仁)을 구(求)함에 있어 몸소 민첩하게 남이 보지 않더라도 몸소 실천하여 득하는 체득(體得)을 강조하셨다. 이 같은 선생의 철학은 그의 저서 '求人錄' (구인록)에 잘 나타나 있으며, 또한 옥산서원의 주요 건물 이름들에서도 표현되어 있다. 예를 들어 서원의 강당이 '求人當' (구인당)이고, 그앞 좌우로 '敏求齋' (민구재: 민첩하게 구함), '闇修齋' (암수재: 어두운 데서 닦음)가 있으며, 강당 뒤편의 사묘는 '體仁廟' (체인묘: 인을 모소 체득함)이다. |
아들 잠계공 이전인의 효행
회재선생의 아들 잠계공 이전인(李全仁)은 1516년 회재선생이 26세 때 태어났다. 천성이 온화하고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배움과 행함에 정성을 다하였다. 그의 나이20세에 서천잠(誓天箴)을 지어 지성으로 도를 행할 것을 맹세하니, 그 몸가짐을 마치 "군부(君父)나 귀신(鬼神 )이 위에 있는 것 같이 하고 얇은 살얼음이 아래에 있는 것 같이"라고 표현하였다. 회재선생이 명종2년(1547년) '양재역벽서사건'에 연루되어 평안북도 강계부 적소로 유배되었을 때, 잠계공은 아버지 옆에서 몸과 마음을 모아 정성으로 시측하였다. 선생이 명종8년(1553년) 63세의 나이로 돌아가시기까지 6여년 동안 부자(父子)의 정뿐 아니라 사제(師第)로서 수많은 학문과 삶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것이 바로 '관서문답록'(關西問答錄)이다. 그 부자지정(父子之精)을 이단상 선생은 "백어(白魚,공자의 아들)에 공자(孔子)같다"고 찬탄하였다. |
1553년 11월23일 회재선생이 돌아 가시자, 아들 전인은 추운 겨울에도 불구하고 그 시신을 운구하니 12월12일 강계를 출발하여 이듬해2월에 경주에 이른다. 이 때 유배된 자의 시신이라 아무도 과감히 도움을 베풀지 않았다. 엄동설한의 추위에 손발에 동상이 걸리면서 그 먼길을 운구해올 때 사용된 대나무 운구죽(運柩竹)이 아직도 그 모습을 생생히 보여주고 있다. |
|
|
1565년 문정왕후가 죽자 그 이듬해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상소문을 작성하여 회재선생이 저술한「진수팔규」와 함께 명종에게 올리니 명종은 대감오하여 선생의 관작을 복명한다. 1568년 전인은 선생의 유문(遺文)과 퇴계이황이 쓴 행장을 갖추어 올리니 선조 즉위년에 회재선생은 의정부 영의정에 증직(贈職)된다. |
이때 아들 잠계공에게도 종1품 판사 벼슬을 내리나 공은 이를 취하지 않고 오히려 선조에게 감사의 사은소(謝恩疏)를 올린다. 전인은 아버지의 유품들을 지성으로 간수하였으니, 회재선생이 평소에 사용했던 벼루, 지관, 옥각띠, 옥관자, 옥인, 옥갓끈, 연적, 적대 표주박 등 많은 유품과 회재선생의 친필들이 독락당 어서각에 잘 보관되어 오늘까지 국보급 보물로서 세전되고 있다. 이 같은잠계공 이전인의 효심은 대한민국 충열효열록(忠義孝烈錄)에 올라 있다. 독락당 앞 당수나무 곁에 잠계공 이전인의 기적비가 있다. |
|
'▶답사 안강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안강 옥산 사산오대(四山五臺) (0) | 2010.07.30 |
---|---|
안강 보물 제526-2호 여주이씨옥산문중소장유묵(麗州李氏玉山門中所藏遺墨) (0) | 2010.07.30 |
독락당 주엽나무 (0) | 2010.07.30 |
<경북소식> 경주시 옥산서원ㆍ독락당 보수 (0) | 2010.07.30 |
- 안강 옥산서원 앞 계곡...1 (0) | 2010.07.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