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 충청도

충북 보은- 삼년 산성

박근닷컴 2010. 8. 20. 22:13

 

 

1번 주차장에서 2번 서문지를 지나,7,8, 번순으로 답사를 진행

3번은 아미지(蛾眉池)라 불리우는 저수지....

 

 

삼년산성은 신라시대(서기 470년 축조)의 석축산성이다.

성 둘레가 1,680m, 최대높이 22m, 폭 8~10m 로 신라를 대표하는 산성이자

우리나라 산성중 최고로 손꼽히는 산성이라고 한다.

산의 능선을 따라 성문지가 4개소,옹성이 7개소,우물터가 5개소가 있고 배수시설등이 갖춰져있다.

 

"삼국시대의 보은은 삼년군,삼년산군으로 불렀기 때문에 삼년산성으로 불린듯하나

'삼국사기'에는 성을 쌓는데 삼년이 걸렸기 때문에 삼년산성이라 한다는 기록이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보은조에는 삼년산성이 오정산성으로 표기되 있다.

산성을 둘러싼 산이 해발325m 오정산이기 때문이다.

 

 

 

 

하단부는 보축성벽이 있다.

 

 

 

두터운 문성벽.

납작한 돌을 이용해서 한 층은 가로 쌓기를 하고, 한 층은 세로 쌓기를 하여 튼튼하게 하였다.

 

 

 

 

발굴된 정문인 서문지...

삼년산성에는 4개의 성문지가 있는데 그중 가장 낮은곳의 주 출입구로 백제쪽을 바라보는 서문이다.

문은 밖으로 열리는 구조로 되어 있어서 공격 위주의 성이라고 할 수 있다.

 

 

 

가로로 길게 문지방석이 있는데 양쪽에 움푹 들어간것은 수레가 지나다니던 자국이라고 한다.

수레 바퀴의 폭이 1.66m 라고 하니 제법 큰 수레가 통행 했으리라 짐작되며,

삼년산성이 전시에만 사용된 성이 아니라 전투와 보급,두가지 기능과 읍성으로서의

역할도 한것으로 추측된다고함.

 

여기서 수레를 이용하고 있었던 것으로 경주박물관에 흙으로 만들어 구워낸 수레의 실물 미니어쳐가 생각났다.

 

 

 

 

 

 

성곽 내 ..아미지(蛾眉池)라 불리우는 저수지....

 

 

일반적으로 평지성에는 성 바깥 둘레에 해자(垓子)를 돌는데,산성의 경우는 해자를 마련하기 어렵다. 

따라서 산성은 안쪽에 해자를 설치하는데 성내로 진입한 적병은 여기서 일단 저지되며,

주위에 매복한 군사에 의해 공격 할수 있다.

 

 

 

서남곡성과 서북곡성이 한눈에 보여진다.

 

바라보이는 시가지는.. 보은시

 

복원시 조급증과 경제적인 이유로 옛 화강암과 다르고 우물정자 형으로 쌓지 못했다는 지적이있다.

오래된 성곽의 복원은 안하는게 제일 좋다는 견해도 있다.

1,500년전의 질감을 되살릴 수는 없겠지요...

 

반원형의(둥글게 튀어나온부분)..옹성같은 치성

 

이 돌은 원래 것이다...

 

납작한 자연석을 이용하여 우물정자(井字) 모양으로 한켜는 가로 쌓기,한켜는 세로 쌓기로하여

성벽이 견고하고 거의 수직에 가깝게 축조

그래서  우물정자(井字)모양에서 한두개가 빠져 나가도 위아래의 돌들의 역활로 허물어질 염려가 없다.

 

 

부분적으로 돌이 빠져 나간 흔적...

 넙적한성돌..어림잡아 7~80cm는 되보인다.

 

 

 

 

남문지 

상당히 두터운 남문모습...폭이 8.8m정도..

현문식이라 밖으로 걸어 내려갈수가 없다 밖은 낭떠러지로

실지로는 창문형으로 보며...문지아래는

성곽이 상당히 높으며.... 단단하게 쌓아져있어 드나드는 문으로는 불가능..

- 현문이란 사다리나 줄을 타고 오르내릴 수 있도록 만든 것으로 가장 뛰어난 방어력을 가지는 성문이다.

 

 

 

 

근데군데 미어져 나온부분....

 

 

솟은 부분이 치부분..이다.

 

 

안쪽은 그런대로 괜찮았는데, 바깥쪽은 거의 무너져있는 상태다.(남동치성에서 본 바깥쪽)

 

 

 성이 안쪽이나 성위로 길이나있어, 전체적인 모습을 보기가 어렵다.

 

 

삼년성의 정문은 서쪽의 백제 쪽을 바라보는 서문이다.
서문은 상대(上代) 문터라 하며 문지방 돌에 수레바퀴가 지나다니던 자국이 남아 있다.
그것도 수레바퀴의 양쪽 바퀴 사이 너비가 1.66m나 되어 폭이 넓은 큰 수레가 지나다녔음을 증명하고 있는데, 삼년산성에 치중의 임무가 없었다면 그렇게 큰 수레가 통행하였을 까닭이 없다.
산성에 이처럼 큰 수레까지 다니던 문을 만든 것은 이곳 삼년산성의 서문이 유일한 것이다.

밖으로 열리는 성문은 성안의 군사들이 갑자기 출동할 때 편리하다. 안쪽으로 열릴 때는 문이 열리도록 물러섰다가 전진하는 만큼의 시간이 단축된다.
성문에 접근한 적을 기습한다면 그런 효과를 볼 수 있다.
성문을 파괴하는 충차(衝車, 수레에 뿔처럼 앞에 댄 것으로 성벽을 무너트리는 도구) 등이 동원되었다고 가정하면, 밖으로 열리는 문짝은 상하와 좌우가 문틀에 지탱되어서 안쪽으로 여는 형태의 문짝이 빗장에만 의지하는 것 보다 월등히 견고할 수 있다.

 

신라는 삼년산성을 축조하여  백제를 견제하면서 북진정책의 전진기지로 삼았다.

신라는 이 지역을 확보 함으로써 삼국통일의 발판을 마련 할수 있었고,

신라말기 후삼국 시대에는 고려의 왕건이 이곳을 직접 공격하다가 실패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신라의 태종 무열왕때에는 당나라 사신을 이곳에서 접견했을 정도로

중국의 성들에 비해 젼혀 손색이 없는 성이었다.

삼년산성은 돌을 이용하여 쌓은 대표적인 산성으로 신라의 우수한 축성기술울 대표하는 것이다.

1,500년의 세월을 견뎌온 석성으로 규모면에서도 대단한 성이라 할수 있고,

역사 기록에는 삼년산성이 함락되었다는 기록은 없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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