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서울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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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승 묘지명과 묘지명함/현종 6년(1665)·청화백자 종 6품의 세자익위사(왕세자 경호 업무)를 지낸 춘주산인 신승의 묘지명.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끌려갔던 작은아버지 신익전의 절조와 그로부터 배태된 신승의 성품과 유유자적한 삶, 필법에 뛰어난 점 등을 소개했다.
영조는 아들 사도세자의 묘지명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만고에 없었던 일에 이르러 백발의 아버지로 하여금 만고에 없었던 일을 하게 하였고, 이어 사도세자가 나쁜 무리들과 어울려 국가가 망할 지경에 이르게 하였다.”
영조가 사도세자를 죽인 소위 임오화변(1762년)에 대한 객관적인 기록은 실록 등에 남아 있다. 그런데 이 묘지명은 사건 당사자인 영조가 직접 자신의 심정을 남겼다는 점에서 또 다른 자료로서 가치가 있다. 영조는 묘비명에서 사도세자의 잘못을 기록해 자신을 옹호했고, 아버지보다는 왕의 입장에서 사도세자에 대한 감정을 남겼다.
묘지는 무덤 안에 묻힌 이가 누구인지 알려주기 위해 무덤 내부 또는 그 언저리 땅 속에 남기는 죽은 자에 대한 객관적인 기록으로, 묻힌 이의 이름·나고 죽은 날·주요 발자취·친인척 등이 담겨있다. 묘지명에는 묻힌 이를 주로 칭송·찬양하거나 추념·추모하는 내용이 실려있으며, 무덤 밖에 세우는 묘비와 다르다.
삼국시대 특히 고구려에서 처음 사용하기 시작해 조선시대에 일반화된 묘지명에는 한 인물의 개인사뿐 아니라 그 주변에서 이루어진 생활·문화·역사 등이 함께 담겨있다.
가령 천연두로 죽은 아이의 묘지명을 통해 당시 천연두가 얼마나 많이 퍼졌는지 짐작할 수 있다. 광해군에게 죽임을 당했으나 나중에 정치적으로 복권된 후 대형 석제로 제작된 영창대군의 묘지명에는 당시 정치적 상황이 녹아있다.
150여개의 묘지명을 통해 이 같은 조선시대의 생활사를 보여주는 전시 ‘삶과 죽음의 이야기, 조선 묘지명’이 서울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 1층 특별전시실에서 열리고 있다. 전시는 삼국시대, 고려, 조선시대로 이어지는 묘지명의 변천 과정과 제작방법을 보여주는 1부와, 조선시대 왕실·명문가·일반계층의 묘지명을 비교해 볼 수 있게 전시한 2부로 구성돼 있다.
고려시대에는 왕족·귀족 등 최상위층에 한해 주로 돌로 만든 묘지명이 사용됐다. 조선시대 들어서는 고려시대 묘지명의 전통이 왕실로 이어졌다. 왕과 출가한 공주의 묘지명은 석제로 만들어졌다. 조선시대에 가장 많이 사용됐던 묘지명은 서책 모양의 청화백자로, 사대부 가문이 주로 사용했다. 후궁과 왕자의 묘지명도 주로 도자로 제작됐다. 조선 후기에는 묘지명이 양반 이하층으로 확대됐고 하급관리, 중인 등은 각자 형편에 맞게 그릇, 벼루, 옹기 등의 형태로 묘지명을 만들었다.
윤용희 국립중앙박물관 고고역사부 학예연구사는 “전통사회에서는 묘를 오래도록 잘 모시려 만드는 묘지·묘지명은 효의 표시·실천이었다”며 “묘지명을 통해 공식적으로 전해진 기록에 없는 생생한 이야기를 접할 수 있다”고 말했다. 4월17일까지.
영조가 사도세자를 죽인 소위 임오화변(1762년)에 대한 객관적인 기록은 실록 등에 남아 있다. 그런데 이 묘지명은 사건 당사자인 영조가 직접 자신의 심정을 남겼다는 점에서 또 다른 자료로서 가치가 있다. 영조는 묘비명에서 사도세자의 잘못을 기록해 자신을 옹호했고, 아버지보다는 왕의 입장에서 사도세자에 대한 감정을 남겼다.
묘지는 무덤 안에 묻힌 이가 누구인지 알려주기 위해 무덤 내부 또는 그 언저리 땅 속에 남기는 죽은 자에 대한 객관적인 기록으로, 묻힌 이의 이름·나고 죽은 날·주요 발자취·친인척 등이 담겨있다. 묘지명에는 묻힌 이를 주로 칭송·찬양하거나 추념·추모하는 내용이 실려있으며, 무덤 밖에 세우는 묘비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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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 묘지명/영조 38년(1762)·청화백자 왕이 직접 묘지명을 지었음을 뜻하는 ‘어제지문’이라는 글이 내용 맨 처음에 적혀 있다.
가령 천연두로 죽은 아이의 묘지명을 통해 당시 천연두가 얼마나 많이 퍼졌는지 짐작할 수 있다. 광해군에게 죽임을 당했으나 나중에 정치적으로 복권된 후 대형 석제로 제작된 영창대군의 묘지명에는 당시 정치적 상황이 녹아있다.
150여개의 묘지명을 통해 이 같은 조선시대의 생활사를 보여주는 전시 ‘삶과 죽음의 이야기, 조선 묘지명’이 서울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 1층 특별전시실에서 열리고 있다. 전시는 삼국시대, 고려, 조선시대로 이어지는 묘지명의 변천 과정과 제작방법을 보여주는 1부와, 조선시대 왕실·명문가·일반계층의 묘지명을 비교해 볼 수 있게 전시한 2부로 구성돼 있다.
고려시대에는 왕족·귀족 등 최상위층에 한해 주로 돌로 만든 묘지명이 사용됐다. 조선시대 들어서는 고려시대 묘지명의 전통이 왕실로 이어졌다. 왕과 출가한 공주의 묘지명은 석제로 만들어졌다. 조선시대에 가장 많이 사용됐던 묘지명은 서책 모양의 청화백자로, 사대부 가문이 주로 사용했다. 후궁과 왕자의 묘지명도 주로 도자로 제작됐다. 조선 후기에는 묘지명이 양반 이하층으로 확대됐고 하급관리, 중인 등은 각자 형편에 맞게 그릇, 벼루, 옹기 등의 형태로 묘지명을 만들었다.
윤용희 국립중앙박물관 고고역사부 학예연구사는 “전통사회에서는 묘를 오래도록 잘 모시려 만드는 묘지·묘지명은 효의 표시·실천이었다”며 “묘지명을 통해 공식적으로 전해진 기록에 없는 생생한 이야기를 접할 수 있다”고 말했다. 4월17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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