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 중성리 신라비’와 관련하여.
-‘포항 중성리 신라비(中城里
新羅碑)’,
(연합[뉴스],
‘가칭, 포항 학성리비’라고 보도된),
어느, [이미지].
혹, 시간이 되신다면,
‘포항 중성리 신라비(中城里
新羅碑)’에 대한, ‘국립 경주 문화재
연구소’ (www.gcp.go.kr)의 보고서
‘원문’을, click 해서, 1차, 참조해
보시기를---.
관련 연구자들의 노고와 고뇌가,
함께, 담겨 있는, 그러나,
어떤 ‘틀’에 박힌 듯한---.
신문에 나기로,
1)- (연합[뉴스],
“---,
‘국립 경주문화재 연구소’는,
지난 11일, 경북 포항 흥해에서,
도로 공사 도중(에) 발견된,
가칭, ‘포항 학성리비’가, 지금까지
알려진 신라 금석문 중, 가장 오래된
‘영일 냉수리비(506년 추정)’보다, 앞서,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크다고 밝혔다.
---, 이 비는, 1989년 ‘냉수리비’(국보!
264호)의 발견 지점에서, 동쪽으로,
약 8㎞ 떨어진 곳에서, ---, 발견---,
전체 200자 정도가 확인---,
비문에선, 왕의 교시를 의미하는 ‘敎
(교)‘라든가, 신라 6부 중 하나인, ‘사탁부
(沙喙部)’, 촌락 이름일 ‘고리촌’(古利村),
관직 중 하나인 ‘도사’(道使)라든가 ‘사인’
(使人), 신라 17관등 중 6번째인 ‘아간지
(阿干支)’, ‘간지’(干支)와 같은 글자가
확인---, ‘특히, 비문(의) 맨 앞에 보이는
‘신사’(辛巳)는, 비문이 제작된 시기를 알려
주는 중요한 단서---, ‘신사년’은, 지증왕
재위 2년인, 501년과 진흥왕 22년인 561년
중, 하나로 판단된다’, ---,
‘561년에 건립된, ‘창녕 진흥왕 척경비’에는,
신라 관등이, ‘아척간’(阿尺干)이나 ‘사척간’
(沙尺干) 등으로 표기된 데 비해, 이 ‘학성리
비’에서는, ‘아간지’(阿干支), ‘사간지’(沙干支)
등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561년보다,
501년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된다’
---”고 했는데,
2)-(조선일보,
“---,
지난 5월, 경북 포항에서 발견돼,
현존, 최고(最古)의! 신라 비석으로
추정 됐던, ‘포항 중성리 신라비(中城里
新羅碑)’는, ‘재산 분쟁’과 관련된 ‘소송
의 판결문’인 것으로 밝혀졌다.
문화재청, ‘국립 경주문화재 연구소’, ---,
는, 비문 판독 결과, ‘과거에, 모단벌(牟旦
伐, 사람? 이름)의 것 (재물), ---(비문에는,
‘宮’으로 표기된 것)---, 을, 다른 사람이?
빼앗았는데, 그 진상을 조사하여, 진실을
밝혀, 본래의 주인에게 되돌려 주고, 향후,
이에 대한 재론(再論)을 못하도록 한다’,
‘이런 판결 과정을 반포해, 현지인과 후세
에, 경계로 삼는다’는 내용으로, 확인---,
비문에는, 신라 6부(部) 중, 가장 강력했던,
‘喙部(훼부)’와 ‘沙喙部(사훼부)’가 등장---,
‘居伐(거벌)’, ‘古利村(고리촌)’ 등, 현재의
포항(浦項) 부근으로 추정되는 지명이 들어
있(고), ---, ‘阿干支(아간지, 6등급)’, ‘沙干
支(사간지, 8등급)’ 등의 관등명과 ‘道使
(도사)’, ‘使人(사인)’ 같은,
관직명도 확인---”,
“ ‘중성리비’는,
부정형(不定形) 자연석 화강암
(최대 높이 104㎝, 최대 폭 49㎝,
두께 12~13㎝, 무게 115㎏)에, 한 면에만,
글자를 음각(陰刻)---, 글자는, 전체 12행
(行)이며, ---, 모두, 203자가 확인---,
비문의 ‘제작 시기’에 대해서는, ---,
첫 대목에 보이는, ---(비문에는, ‘亲巳’로
표기된) ---, ‘辛巳(신사)’라는, 간지(干支)
가 중요한 단서---,
연구소측은, ‘비의 형식---, 서체, 비문에
등장하는 6부의 명칭---, 관직명 등으로
볼 때, 신라 지증왕 2년(501년)으로 추정
---, 비석의 ‘한문 구사력’이, 현저히,
떨어지고? 신라의 옛 국호인, ---(비문에는,
‘折’로 표기된)---, ‘斯盧(사로)’를 사용했다
는 추정에서, 이보다 60년 빠른, 441년으로
보는, 연구자도 있다’고 밝혔다.
501년이라고 해도, 지금까지, ‘최고(最古)
신라비’로 알려진, ‘영일 냉수리비’(503년
추정)보다, 2년 앞선 것이라, 이 비가,
‘신라 최고비’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중성리비’는,
지난 1989년, ‘영일 냉수리비’가 발견된
지점에서, 동쪽으로 약 8.7㎞ 떨어진 곳
에서 발견됐다. ---”고 했다.
---
이로써, ‘비석’의 명칭이,
앞서의, ‘가칭(假稱), 학성리비’에서,
‘포항 중성리 신라비’로 바뀌고,
아마도, 역시나, ‘국보’로!
지정될 듯한---.
우선,
우리네 독자의 입장에서는,
---동 보고서나 앞서의 신문 보도에서
언급한---, ‘사탁부(沙喙部)’가 옳은지,
아니면, ‘沙喙部(사훼부)’가 옳은지,
조금은, 헷갈릴 법도 하다.
한자 ‘喙’의, 우리 말의 독음(讀音)은,
물론, ‘훼’가 옳기는 하나, 그렇다고 해서,
얘기가 그렇게 간단치는 않다는 것.
---
공개된 자료를 취합하면,
‘신라의 육부(六部)’는, 진한(辰韓)시대의
‘육촌’을, 서기 32년(유리왕/弩禮王 9년)에,
‘육부’로 고치고, 각 부에, 성씨를 하사했다.
즉, ‘알천 양산촌’(閼川楊山村)은,
‘양부’(梁部, 及梁部/ 남천(南川)의 남쪽)로
하고, ---이때, ‘梁’의 ‘훈독(訓讀)’은, ‘도(道)’,
혹은, ‘탁(琢)’이라고 쓰니, 역시, ‘도(道)’라고
발음한다 하며---, ‘돌산 고허촌’(突山高墟村)
을 ‘사량부’(沙梁部/ 남천(南川)의 북쪽)로,
‘취산 진지촌’(籬山珍支村, 于珍村)을 ‘본피부’
(本彼部/ 월성(月城) 및 그 동쪽)로, ‘무산 대수
촌’(茂山大樹村)을 ‘점량부’(漸梁部, 牟梁部/
서천(西川)의 지류, 모량천(牟梁川)의 유역)로,
---‘梁’은 ‘탁! (啄)’이라고도 쓴다 하고---,
‘금산 가리촌’(金山加利村)을 ‘한기부’(漢祇部,
韓祇部/북천(北川)의 북쪽)로, ‘명활산 고야촌’
(明活山 高耶村)을 ‘습비부’(習比部/ 明活山
서남)로 고쳤다. ---,
‘양부’에 ‘이(李)’씨, ‘사량부’에 ‘최(崔)’씨,
‘본피부’에 ‘정(鄭)’씨, ‘점량부’에 ‘손(孫)’씨,
‘한지부’에 ‘배(裵)’씨, ‘습비부’에 ‘설(薛)’씨
등을, 각각, 하사했다 하고---,
6세기에! ‘양부’와 ‘사량부’가, 중심적인
2대(大)부로 됐다 하므로, 문제의, ‘喙部’와
‘沙喙部’는, 각각, ‘양부’(梁部)’와 ‘사량부’
(沙梁部)에 다름 아니다!
허면,
왜? 어째서?
‘량(梁)’을, ‘도(道)’, 혹은, ‘탁(琢)’,
또는, ‘탁(啄)’이라고도, 같이! 썼을까?
---그 ‘한자 표기’의 ‘뜻’을 따른 걸까?
무슨, ‘비석의, ‘한문 구사력’이, 현저히,
떨어지고? 운운’, 했는데, 당시 신라인들이,
머리가 참으로 나빠서? 그래서, ‘한자’나,
‘한문’을, 잘, 몰라서? 그랬을까?
오히려,
당시의, 비문에서의, ‘한자 표기’가, 실은,
우리 말의, ‘발음!’을 ‘copy’(寫音)한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때, 참고로 한,
‘한자’의 ‘발음’은, 내가 보기로는,
중국어의! 그것일 터이고---.
먼저,
한자의, ‘사(沙)’[sha¹, 싸]는,
옥편에는, ‘(작게 갈라진) 모래, (솟아
오른, 큰 물 옆에, 따라 있는) 바닷가,
(작게 이룬) 소수이름, 고을이름’ 등의
뜻이 있어, 우리 말의, ‘ㅅ/ㅈ+ㄹ’ 발음
의 어휘들이다.
한편,
한자의, ‘량(梁)’[liang², ㄹ리앙]은,
옥편에는, ‘((받쳐) 들고 있는) 대들보,
(떨어진 곳을 잇는) 나무다리, 돌다리/
징검다리, ((물고기를 잡아), 들이는) 발,
달음박질할, (돋아 올라서) 팔팔 뛸,
‘(부드럽지 않고) 굳셀’ 등의 뜻이 있어,
우리 말의, ‘ㄹ’ 발음의 어휘들이다.
한자의, ‘탁(啄)’[zhuo², 쭤]는,
옥편에는, ‘((새가, 뾰족한 부리의 끝으로),
찍어서, 속으로 ‘들이는’) 쪼다, ((손 따위
로) 쳐서, 소리가 ‘돋아 오르게/들리게’)
문을 두드리다’ 등의 뜻이 있어, 우리 말의,
‘ㅅ/ㅉ/ㅊ+ㄷ+ㄹ’ 발음의 어휘들이고,
한자의, ‘훼(喙)’[hui⁴, 후이]는, ‘(밖으로,
‘돋아 오른’, (새나 짐승의), 입) 부리,
(밖에서, ‘들이’ 마셔) 숨쉴, (밖으로, 버티는
것이 어려워, (속으로)) 괴로울’ 등의 뜻이
있어, 우리 말의, ‘ㅂ+ㄷ/ㅌ+ㄹ’ 발음의
어휘들이다.
또한, 한자의, ‘도(道)’[tao⁴, 타오]는,
옥편에는, ‘(따르는, 돋아 오른) 길, (따라야
하는/틀리지 않는) 이치, (따르는) 순할,
(따라야 할) 도, (다른 이에게 일러서) 말할,
(따라서) 말미암을, 좇을, (다르게 갈라 놓은)
행정구역’ 등의 뜻이 있다. ---우리 말의,
‘ㄷ/ㄸ+ㄹ’ 발음의 어휘들이다.
한자의, ‘탁(琢)’[zhuo², 쭤]는,
옥편에는, ‘((돋아 오른 것을), 들어 가게)
쪼을/옥 다듬을, (다른 것을) 가릴’ 등의
뜻이 있다. ---우리 말의, ‘ㄷ+ㄹ’ 발음의
어휘들이다.
이들을 종합하자면,
‘량(梁)’[ㄹ리앙], ‘탁(啄)’[쭤],
‘훼(喙)’[후이], ‘도(道)’[타오] 및
‘탁(琢)’[쭤] 등의, 서로 바꿔 써도
좋을 만한, ‘공통점!’은, 옥편의 ‘뜻’이
아니라, 바로, 우리 말의! ‘발음!’으로써,
---‘신라 육부’의 명칭이, 각각의, 지형!
(地形)과 그 출신(出身)을 이르는 것이라
보면---, 이를 테면, ‘들이는, 들어간,
떨어진, 돋아 오른, 따르는, 다른’ 등을,
자연스럽게! ‘梁’, ‘啄’, ‘喙’, ‘道’ 및 ‘琢’로,
‘한자 표기’ 했다는 것.
내 말씀이 옳다면,
‘량부(梁部)/喙部’와 ‘사량부(沙梁部)/
沙喙部’는, 각각, ---현재의! 우리 말로
풀이하자면---, ‘(남천(南川)의, 남쪽 밑,
아래로), 내려간 곳에서, 떨어져, 돋아 오른
(무리들)à 梁’과
‘(남천(南川)의 북쪽 위로, 높이), 솟아 올라
있는 곳에서(à 沙)+떨어져, 돋아 오른
(무리들)à 梁’이라는 말씀.
그리고,
연구소의 보고서에는,
‘모단벌’(牟旦伐)이,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땅의 이름’이라는 ‘설(說)’이
하나 있었는데, 꽤, 일리가 있다고 본다.
비문에서, ‘궁(宮)’으로 표기된 것을,
보고서에서는, ‘재물’로 봤는데,
---있다가도 사라질, ‘재물’을---,
왜? 굳이, 비석까지 세워서, 뒷날의
경계(警戒)로, 삼아야만 했을까?
참고로,
한자의, ‘궁(宮)’[gong¹, 꿍]은,
옥편에는, ‘(속에 들어가 사는) 집,
(큰 이들이 들어 있는) 궁궐, 종묘,
(속 안에 들어 있는, 가운데의) 율소리,
(밖으로, (밑에) 달려 있는, 작은 것들을
끊어서/발라 내어) 불알 썩힐, (속을 둘러
싸는) 담’ 등의 뜻이 있다. ---우리 말의,
‘ㄱ/ㄲ/ㅋ+ㄹ’ 발음의 어휘들이다.
만일, ‘모단벌’(牟旦伐)이 ‘땅 이름’이면,
이때의, ‘궁(宮)’[꿍]은, 혹시, 우리 말의,
‘속으로 들어간, 작은 땅’은 아닐까?
그렇다면, ‘비석’ 정도는, 중앙 정부에서,
충분히, 세워줄 만한 것인---.
그리고,
‘阿干支(아간지)’,
‘沙干支(사간지)’ 등의 관등명이,
뒷날, ‘아척간’(阿尺干), ‘사척간’
(沙尺干) 등으로 바뀌었다면, ---내 나름의
결론만을, 간략히, 말씀 드리자면---,
6등급의, ‘아간지(阿干支)’,
[e¹ gan¹ zhi¹, 어+깐+쯔]는, 우리 말의,
‘위에서, (아래로), 떨어진/내려온+(속 안에
들어 있는à) 가운데의+솟은 이’이고,
8등급의, ‘사간지(沙干支)’[sha¹ gan¹ zhi¹,
싸+깐+쯔]는, ‘(아래에서), 솟아 오르는+
가운데의+솟은 이’일 것이며, 이들이 바뀐,
‘아척간(阿尺干)’[e¹ chi³ gan¹, 어+츠+깐]
은, ‘위에서, (아래로), 떨어진/내려온+솟은+
가운데 있는 이’이고, ‘사척간(沙尺干)’[sha¹
chi³ gan¹, 싸+츠+깐]은, ‘(아래에서), 솟아
오르는+솟은+가운데 있는 이’일 터이다.
관직명의, ‘도사(道使)’[tao⁴shi³, 타오+
쓰]는, 우리 말의, ‘(밑의 아래를), 따르도록
+움직이게 하는 이’이고, ‘사인(使人)’[shi³
ren², 쓰+런]은, ‘움직이게 하는+아래의/
다른 이(deputy)’일 것이다.
또한,
비문에는, ‘亲巳(친사)’로 표기된 것이,
‘辛巳(신사)’라는, 간지(干支)를 말한다면,
‘친(亲)’[chen¹, 천], ‘신(辛)’[xin¹, 씬]은,
모두, 우리 말의, ‘(해가, 지평선이나 수평선
아래에 있는, 땅이나 또는 물), 속으로, 들어
가는/내려 가는, 그러한 때’라고 본다.
끝으로,
‘신라(新羅)’의 옛 이름,
‘斯盧(사로)’에서의 ‘斯(사)’가,
비문에는, ‘折(절)’로 표기됐다면,
---이를, 또 하나의 ‘근거’로 보태어---,
우리는, 오랫동안, 오해(誤解) 되어 왔던!
‘수수께끼!’ 하나를 풀 수 있게 된다.
즉, ‘新’= ‘斯’= ‘折’이란 등식(等式)을 만족!
시키려면, 그 ‘한자 표기’의 ‘뜻’으로는, 전연,
불가능! 하며, 이는, ‘羅’= ‘盧’의 등식에서도,
역시나, 그러하다.
---말하자면, ‘신라(新羅)’는, 무슨, ‘새롭게
(新)+벌린/비단(羅) 나라’가 아니라! 는 것.
내가 보기로,
‘新’[xin¹, 씬]= ‘斯’[si¹, 쓰]=
‘折’[zhe², 쩌]의 등식을, 같이, 만족시키는
‘발음’은, 우리 말의, ‘(위에, 높이), 솟은 곳
에서, (밑의), 아래로, 내려온 (이들이)’이고,
또한, ‘羅’[luo², ㄹ+뤄]= ‘盧’[lu², ㄹ+루]의
등식을 만족시키는 ‘발음’은, ---뒷날의, 같은
뜻의 이름들인, ‘서라벌, 셔블, 서울’ 등등을,
함께, 고려하면---, 우리 말의, ‘어울려/위로,
(높이/밝게), 오르도록 (세운), 그러한
(나라)’이다. 그 유구한 ‘옛 역사’가,
‘고조선’과 ‘부여(扶餘)’에까지,
이르는 것인---.
---
윗 ‘보고서’에서,
무슨, ‘비석의 ‘한문 구사력’이,
현저히, 떨어지고? 운운’, 하는 것은,
‘한자 표기’를, ‘중국식’으로만, 해석!
하려는, 참으로, 잘못된 인식 탓이다.
---때 아닌, ‘모화(慕華)’도 아니겠고!
만일,
당시의, 비문에서의, ‘명사’에 대한,
‘한자 표기’가, 만일, 우리 말의 ‘발음!’을
사음(寫音)한 것! 이라면, 이로써, 오히려,
우리네의, ‘고어(古語)’를 살필 수 있는,
참으로, 좋은 기회가 아닐까?
요즘처럼,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동족어(同族語)’도, 해석이 가능한 판에,
같은 땅에서의, ---다만, 시간적으로, 좀,
떨어져 있을 뿐인---, 우리네 선조의 옛말을,
---더구나, 그에 대한 ‘기록’이, 이와 같이,
비문에 남겨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후손(의, 전문가들)이, 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매한 내가 보기로,
그 또한,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다,
할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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